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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7) 1년은 365일이다



권력은 달력을 지배하고 달력은 인간을 지배한다.


1년은 365일이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은 이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다.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에 생존을 의지했다. 그들은 지평선에 시리우스 별이 나타날 때 나일강이 범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별의 주기가 365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시리우스력이라는 달력을 만들었다. 즉 세계 최초의 달력은 달을 기준으로 한 음력도 아니고 태양을 기준으로 한 양력도 아닌 별을 기준으로 한 성력인 것이다. 시리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와 함께 각종 종교 의식이 진행됐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정권을 차지한 후 태양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달력을 제정했는데 이를 율리우스력이라고 한다. 이 달력은 1,50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하여 새로 만든 그레고리력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는 달력이다.


동양에서는 달의 움직임을 따라 달력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계절의 변화를 잘 반영하지 못하여 따로 24절기라는 것을 만들어 농사에 사용했다.


철새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동하듯 인간은 달력에 따라 활동한다. 그래서 달력은 인간의 정치, 경제, 종교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문에 동양에선 권력자가 바뀌면 연호를 사용했다. 중국과 한국, 베트남 등에서 사용된 연호는 왕정의 폐지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입헌 군주국인 일본에선 아직도 연호를 사용한다. 쇼와, 헤이세이를 거쳐 현재는 레이와 6년째다.


기독교 문명이 세계를 지배한 후 전 세계는 예수 탄생을 전후로 한 연호를 사용한다. Before Christ 와 Anno Domini, 즉 BC 와 AD 가 그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AD 2024년 이다.


사회 구조가 복잡다단해지면서 하루를 잘게 쪼개기 시작했는데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해의 움직임이나 물이 떨어지는 양을 측정하여 해시계나 물시계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 현대는 하루를 24시간으로 잘게 쪼개 쓴다. 수탉이 울면 일어나고 해 떨어지면 자던 사람들이 현대에 들어서는 시계바늘에 쫓겨 다닌다.


이 모든게 가능한 이유는 우리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변두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는 태양이라는 유일한 항성을 가졌다. 그래서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라는 격언이 가능하다. 해가 여러 개 있는 항성계에선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어떤 날은 해가 두 개 뜨고 어떤 날엔 북쪽에서 뜨거나 남쪽에서도 뜰 수 있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


많은 항성계가 쌍성계다. 즉 하나의 항성계에 태양과 같은 항성이 하나만 존재하는게 오히려 드물다. 보편적인 항성계가 쌍성계이기 때문에 Type 1a 형태의 초신성이 폭발하며 이를 통해 인류는 멀리 떨어진 은하의 거리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초신성을 관찰하다가 우주가 가속 팽창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연구자들은 노벨상을 받았다. 쌍성계가 일반적이 아니었다면 알아내기 힘든 사실이다.


우리 지구가 은하의 중심부에 있었다면 여러 개의 태양을 가진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소설 Nightfall 이 그런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행성이 10개 정도의 태양이 있는 시스템에 존재했다. 그 행성에 문명이 싹텄는데 행성 거주민들은 ‘밤’ 과 ‘암흑’ 이라는 개념을 모른다. 항상 한 개 이상의 태양이 하늘에 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어두움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별이 빛나는 밤 하늘을 본 적도 없다.


이 행성의 고고학자와 천문 물리학자가 만나 대화를 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고고학자는 자기 행성의 문명이 몇 천년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멸망한 흔적을 발견했다. 물리학자는 잠시 후에 모든 태양이 행성 뒤로 돌아가서 하늘에 태양이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 시기가 곧 온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이 행성에 몇천 년 만에 밤이 찾아왔다. 행성 거주민들은 몇 백 세대 만에 처음 밤을 경험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무수하게 반짝거리는 별들이 나타났다. 행성 주민들은 단체로 패닉에 빠졌다. 이들은 어둠을 쫓기 위해 손에 잡히는 모든 것에 불을 질렀다. 온 세상이 암흑 속에서 불길에 휩싸여 또 다시 문명은 멸망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재미있는 상상력이지만 실제론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리학에서 삼체 문제 Three Body problem 라는게 있다. 세 개의 천체가 있다면 서로의 중력에 의해 일관된 궤도를 그리는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아이작 뉴턴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들러 붙었다. 이 문제는 1800년대 후반 앙리 푸앙카레에 의해 풀리는데, 결론은 “절대 알 수 없다” 이다. 즉 별이 세 개 이상인 세상에선 결코 달력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다.


알파 센타우리 삼체 시스템에 살고 있는 삼체인들은 이런 가혹한 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에겐 달력도 없고 시간도 없다. 오직 크게 stable era 와 chaotic era 가 있을 뿐이다. stable era 는 그들의 행성이 하나의 항성에 붙잡혀 잠깐 동안 예측 가능한 낮과 밤이 있는 때이다. 또한 환경도 활동하기에 적당해진다. chaotic era 는 세 개의 항성이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난잡한 궤도를 그릴 때이다. 삼체의 행성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혼란한 궤도를 그리게 된다. 그래서 삼체 문명은 계속해서 멸망한다. 어떨 땐 혹한에 빠져 문명이 얼어붙고 또 어떨 땐 온 세상이 불에 타 문명이 무너진다. 심지어 세 개의 항성이 일직선상에 놓여 행성 자체를 잡아 뜯어 버리기도 한다.


오랜 기간 이 행성에선 이렇게 문명이 생겨났다가 멸망하기를 9000번 이상 반복했다. 그리고 삼체 행성의 구천 몇백번째 문명에서 우연찮게 지구의 존재를 알게 된다. 1년이 항상 365일 수 있는 세상은 그들에게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라는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 함대를 조직하여 지구로 출발한다. 그리고 드라마가 시작된다.


(계속)


삼체 The Three Body Problem


목차


1) 모택동 때문에 외계인이 쳐들어오는 이야기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1.html?m=1

2)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2.html?m=1

3) 총균쇠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3.html?m=1

4) 개미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4.html?m=1

5) 폰 노이만과 어둠의 숲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5.html?m=1

6) 나는 무엇인가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9/blog-post.html

7) 1년은 365일이다


미안하다. 내가 사람 노릇을 못하고 산다


올 초여름에 한국을 방문했다. 새삼스럽게 한국에는 만날 가족이 한 사람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모친과 단 둘이 살았다. 부친은 내가 세 살 때 세상을 떠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그래서 오랜만의 가족 모임이라는 것은 처가 쪽 식구뿐이었다. 연로한 장인 장모를 만나고, 처형을 만나고, 처 조카 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다. 조만간 오랜만에 만나 볼 친구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기대에 충만했다. 마침 친구들은 단톡방에서 모임 계획을 잡고 있었다. 거기에 짠 나타나면 애들이 모두 놀라겠지? 흐흐흐!


학창시절, 모친과 단 둘만의 단촐한 생활을 하다가 친구들과 인연이 되어 걔들 집에 놀러가곤 했었다. 친구들 집에는 다른 식구들이 북적북적 있는게 생경했었다. 아버지도 있고, 누나도 있고, 형과 동생도 있고, 여동생도 있더라.


마천동에 사는 친구 집에 갔더니 나이 차이가 큰 형이 결혼해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다. 친구 형의 부인이 내 친구에게 “도련님, 도련님” 하고 친구는 “형수, 형수” 하며 대화를 하더라. 나는 드라마에서나 도련님이란 말을 쓸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그런 말을 쓰는 걸 처음 들었다. 꽤나 신기했었다.


은평구 신사동 친구 집에는 다정스러운 누나가 있었다. 술에 취해 하룻밤 신세지러 갔을 때 누나가 정겹게 말을 걸어 주며 맞아 줘서 그 친구가 무척 부러웠었다.


미아리 산동네 사는 친구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날 여동생이 학교로 찾아왔다. 남매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은 내 친구에게 “오빠, 오빠” 하며 뭔가를 이야기하면서 친구의 손을 주무르며 손톱 주변에 일어난 덧살을 잡아 뜯으며 정리해 줬다. 어우, 은평구 신사동 친구 누나보다 백배는 더 부럽더라.


미아리 친구가 군대 갔다가 휴가를 왔을 때 일이다. 휴가 마지막 밤 같이 퍼마시고 술에 취해 헤롱거리다가, 그래도 부대 들어가는 걸 배웅하고 싶어서 놈이 사는 미아리 산동네 골목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때는 한여름이었고 전날 마신 술 때문에 갈증이 너무 심했다. 아직 한참 오르막이 남은 지점에 조그마한 과일 가게가 있었고 수박이 눈에 띄었다. 갈증을 못 이기고 수박 한 통을 사서 놈의 집까지 들어가 친구의 어머니께 수박을 건네 드렸다. 나는 순전히 술 처먹고 갈증 때문에 수박을 산 것인데, 친구 어머니는 나를 세상 예의 바른 청년으로 오해를 해버리셨다. 그리곤 나를 사윗감으로 점찍으셨다. 하지만 당시 본의 아니게 복잡했던 나의 여자관계를 알고 있던 친구놈의 결사 반대로 여동생과 교재까지는 못갔다.


친구의 반대만 아니었다면 나도 “오빠, 오빠”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내 손톱 주변을 정리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놈이 그 당시엔 무척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생명의 은인이다. 친구의 반대 때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면목동 사는 친구의 집에서 군대 가기 전날 모여 당일 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마침내 출발하는 시간이 되어서 나를 포함해 몇몇이 논산까지 따라가기로 했다. 친구의 아버님은 잠깐 얼굴을 비추시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어머님이 서럽게 우셨다. 이 매정한 친구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휘뿌윰하게 날이 밝아오는 거리를 뛰듯이 걸어 나갔다.


친구 집에 갔을 때 친구의 형제자매나 어머니와는 자주 만났는데 아버님들과는 별로 교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그게 자연스러운 건 줄 알았다.


어느 토요일 밤, 의정부에서 군 생활하던 놈에게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서울에 왔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친구와, 친구의 동네 친구 몇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놈이 의정부에서 외박을 받아서는 서울까지 온 것이다. 당시 헌병에게 걸리면 위수 지역 이탈이라는 죄목으로 영창에 가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동네 친구 둘과 나까지 셋이서 의정부까지 전철을 타고 같이 가기로 했다. 혹시 헌병이 검문하면 때려눕힐 계획이었었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런데 친구의 아버님이 불안하셨는지 의정부까지 동행하셨다. 우리들 넷은 전철에서 실없는 헛소리들을 떠들어댔고 아버님은,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 계셨다. 의정부에 도착하자 마자 아버님은 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전철로 갈아타셨고 우리만 의정부역에서 내렸다. 친구의 아버님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게 내가 경험한 가장 길고도 밀접한 ‘아버지’ 라는 존재였다.


하도 인상적인 경험이어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그때 군인이었던 친구에게 당시 이야기를 했더니 그놈은 전혀 기억을 못 했다.


이처럼 나도 서울 여기저기 친구 집을 방문하곤 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모인 장소는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이 서울 한가운데인 중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경 써야 할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없어서 배짱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친의 호방한 성격 탓에 내 친구들도 모친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친구 몇몇이 우리 집에서 자면 모친은 천 원짜리 세 장에서 다섯 장 정도를 밥상 위에 놓아두고 직장에 나가셨다. 우리는 그 돈으로 근처 신당동에서 떡볶이를 사 먹거나 저녁때 또 술잔치를 하고는 했다. 그 당시 최루탄 자욱한 대학가 허름한 선술집에서 한강처럼 퍼 담아 주는 두부찌개나 김치찌개 안주가 1200원에서 15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한바탕 취하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술자리에서 우리는 지방 방송이 생기거나, 말다툼으로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라는 노래 구절을 다 같이 부르며 술잔을 꺾었다.


하루는 입대 영장을 받아 놓은 친구가 집에서 자고 갔다. 친구는 모친에게 군대 간다고 인사했다. 모친은 입대하기 전에 잘 놀고 가라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친구에게 줬다. 이를 본 오금동 사는 능글능글한 친구 녀석이 몇 주 후에 자기도 군대를 간다고 모친에게 사기를 쳤다. 그렇게 용돈을 받아 놓고선 몇 달 후에 진짜 영장이 나왔을 때 또 얘기를 하고는 다시 용돈을 챙겼다. 모친은 아는 척 모르는 척 속아 넘어가 줬다.


그런데 이 사기꾼 친구는 국가유공자녀여서 허우대는 멀쩡한데 6개월 방위를 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6개월짜리 사회복무 요원이 된 것이다. 당시 이 친구의 별명이 제비였다. 군 복무를 서울 모처의 사령부 사무실에서 군무원들과 사무업무를 봤는데 녀석의 별명에 걸맞게 군무원 여자 직원을 꼬셔서 사내 연애를 했다. 그래서 나도 자주 그 군무원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근데 이 녀석이 6개월 후 제대하자마자 여자 친구를 차 버렸다. 물론 그 전에 나에게 그 여자 친구가 너무 지배적인 성격이라고 불평하긴 했었다. 문제는 이 친구가 확실하게 정리를 하지 않고 잠수를 타서, 그녀가 자주 우리 집에 전화해서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고는 했다. 중간에서 곤란하고 난처한 지경이었다. 하루는 모친이 그녀의 전화를 받고는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며 혼구멍을 내줬다. 이렇게 모친은 그 제비 친구의 여자관계까지 정리를 해 줬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이러한 치부가 아주 많다. 그래서 우리 친구 모임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절대 부부동반 모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 전부터 누군가가 뭣 모르고 여자친구를 데려오면 모두 그 친구의 과거 치부를 여친 앞에서 까발리며 망신을 주고는 했기 때문이다.


매일처럼 붙어 다니던 우리는 취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계절이 바뀔 무렵엔 꼭 한 번씩은 만났다.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는 주말에 만나 같이 산행을 하기도 했다. 골프 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나를 그 모임에 끌어들이기 위해 친구 한 놈이 나의 직장 근처 골프 연습장에 자기 돈으로 나를 등록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7번 아이언으로 똑딱이를 몇 주 정도 했는데 영 체질에 맞지 않아 때려쳤다.


나이가 더 들어가자 부정기적으로 또 다시 친구들이 모이는, 달갑지 않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친구들의 조부, 조모 상이 그 기회였다. 그 와중에 세 친구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상을 당한 친구는 상복을 입고 형제자매와 함께 문상객을 맞았다. 고인께 두 번 절하고 상주인 친구와 그 친구의 형제자매와 함께 맞절을 했다. 문상객을 맞는 상주의 심정은 내가 막상 상주가 되어 보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친이 병석에 들고 병원 생활을 할 때 친구들이 몇 번 병문안을 왔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 나는 홀로 상주가 되었다. 친구들이 형제 자매가 없는 나를 위해 모친의 발인 날, 화장터와 장지까지 나와 함께 했다. 큰 은혜를 입었다.


이상한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캐나다까지 이민을 와서 살게 됐다. 12년 간의 이민 생활 동안 친구들은 나 빼고 곧잘 모인다. 철이 바뀔 무렵엔 친구들 모임 단톡방에 불이 붙는다. 모임의 성격도 달라져서 얼마 전까지는 주로 캠핑을 하더니 요즘 들어선 배를 하나 전세 내서 바다낚시를 하는 것 같다. 그런 톡을 볼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 나도 같이 놀고 싶다.


어느 날 친구들 단톡방에 대화가 올라왔길래 무심코 봤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한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갑자기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상주의 입장에서 조문객에게, 특히 친한 친구에게 위로받는다는게 어떤 건지 이제 나는 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 줄 방법이 없었다.


내 기억에 아마 1년도 안 된 거 같은데, 아버님마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또 올라왔다. 북미 대륙 방방곡곡을 누비는 보부상 같은 직업을 가진 나에겐 친구에게 달려갈 방법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참담할 뿐이었다.


재작년 겨울에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그저 나를 핑계로 매주 모여서 먹고 마셔댔다. 짧은 기간에 부모님을 여읜 친구도 나를 반겨 줬다. 속으로 나는 면목이 없었으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날 친구들은 나에게 숯불 민물장어구이를 사 줬다. 국가대표 축구팀이 단골이라는 곳으로 용인에 위치했다. 최근 부모님을 잃은 그 친구는 자차로 서울에서 나를 픽업하여 용인까지 실어 날랐다. 그리곤 다시 나를 서울까지 태우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 자리가 파하고 아내와 내가 묵고 있던 동대문의 허름한 호텔 앞까지 나를 태워다 줬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맨정신의 그 친구와 술로 알딸딸해진 내가 오랜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만 그 내용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친구 녀석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결국 아내가 기다리고 있던 호텔로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집으로 향했다.


올 초여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반겨 줬다. 학창 시절엔 꿈도 못 꿨을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글쎄, 안주는 기똥찬데 우리는 더 이상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라는 노래 구절을 부르지 못한다.


모임 마지막 무렵엔 노래주점 큰 방을 빌려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다 함께 소리를 꽥꽥 질러대다가 지쳐서 잠시 소파에 앉아 친구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봤다. 모두 겉모습은 중늙은이가 됐는데 그 내면에는 20대 초반 청년이 아직도 다들 살아 있다.


곧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 그 때문에 친구들이 힘들 때 나는 높은 확률로 곁에 있어 주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나지막히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사람 노릇을 못하고 산다.”


삼체 6) 나는 무엇인가

의술의 발전이 놀랍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기이식을 하기 위한 조건이 무척 까다로웠는데 이제는 혈액형이나 성별 상관없이 간이나 신장이식을 해 버린다.


이종간 장기이식도 시도되고 있다. 원숭이에게 돼지 신장을 이식하여 2년 이상 생존에 성공했고 최근엔 사상 최초로 돼지 신장을 인간에게 이식해서 두 달간 아무 탈 없이 소변을 만들어 냈다. 비록 환자는 두 달 만에 숨졌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조만간 돼지 간, 심장, 신장 등등의 장기가 인간에게 이식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돼지 심장을 이식 받은 사람은 100% 인간인가? 한 10% 정도는 돼지로 봐야 하나? 순수한 인간의 정의가 어떻게 돼야 하지?


장기이식뿐만이 아니라 사지이식도 가능하다. 인도에서 사고로 두 팔을 잃은 소녀는 타인의 두 팔을 기증받아 다시 정상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두 팔의 공여자는 자전거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남성이었다. 그런데 수술 이후 이 소녀는 100% 자기 자신인가? 소녀의 성 정체성은 100% 여자인가?


너무 까탈스러운 질문 같다. 물론 그녀의 의지대로 두 팔이 움직이므로 소녀 100% 맞다. 또한 원래 털이 덥수룩하고 까무잡잡했던 두 팔이 점점 소녀의 몸과 융화되며 피부색이 옅어지고 털이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니 소녀는 100% 여자임이 틀림없다.


좀 더 극단적인 경우로 가 보자.


1930년대부터 러시아 과학자들은 이상한 실험들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개의 머리를 잘라서 다른 개에게 붙인 것이다. 머리가 두 개 달린 개는 상당 기간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1970년대에는 원숭이 목을 잘라서 서로 몸을 바꿔 버린 적도 있다. 여러 번 시도했는데 최소 3시간에서 길게는 며칠 동안 살아남은 적이 있다.


최근 들어 머리이식 수술은 의학계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주제가 되었다. 최근 중국에서도 원숭이 머리 이식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약 석달 전엔 미국의 한 스타트업 기업이 인간 머리이식 수술을 정확하게 수행한다고 주장하는 AI와 로봇을 발표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수술을 가능하게 하는 법 제도의 마련이다.


실제로 9년 전에는 러시아에서 머리이식 수술이 이루어질 뻔 한 적도 있다. 사지마비로 고통받는 과학자가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고 담당 의사는 90%의 성공 확률을 장담했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수술이 시행될 찰나, 환자의 심경 변화로 수술이 취소되었단다.


이 수술이 핫한 이유는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전신에 암세포가 퍼진 시한부 환자는 머리이식 수술을 통해 뇌사자의 몸을 통째로 이식 받아 여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상한 생각이 시작된다. 70대의 시한부 환자 조는 30대 뇌사자 톰의 몸을 이식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은 사람은 조인가? 아니면 톰인가? 나는 일단 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된다. 조의 나이는 70대인가? 아니면 30대인가? 톰의 나이가 30대이므로 40년 후에 70대가 된다. 하지만 톰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조의 머리는 110 살이 된다. 이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더욱 이상한 생각을 해 보자. 30대의 몸을 얻게 된 조는 성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 아이는 조의 아이인가? 아니면 톰의 아이가 되나? 여기서부턴 나도 헷갈린다. 그 아이는 틀림없이 톰의 DNA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성관계를 한 자는 톰이 아니고 조였다. 나는 더 이상 판단을 못 하겠다.


1996년에 사상 최초의 복제양 돌리가 탄생했다. 복제 과정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암컷 양에게서 난자를 채취해 핵을 제거한다. 다 성장한 양의 체세포에서 핵을 뽑아낸 후 그 난자에 주입한다. 전기 충격을 주면 그 난자는 자기가 지금 막 수정된 걸로 착각하여 세포 분열을 하기 시작한다. 이 가짜 수정란을 대리모에게 이식한다. 이렇게 복제양 돌리가 탄생됐다.


동물 복제는 이제 일반적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애완견이나 고양이가 있고, 그 애완동물의 죽음 이후를 견딜 자신이 없다면, 아주 손쉽게 애완동물 복제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회당 단돈 5천만 원에서 8천만 원 정도면 애완견의 평균 수명 15년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사랑하는 반려견과 여생을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다.


연구 윤리 따위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같은 방식으로 인간 복제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을 복제한다고 상상해 보자.


상상 속의 나는 부자다. 나는 큰 돈을 주고 모잠비크의 한 흑인 여성으로부터 난자를 하나 샀다. 그 여성은 배란촉진제를 맞고 산부인과에서 복강경으로 난자 몇 개를 제공한다. 나는 냉동된 난자를 가지고 러시아로 간다. 러시아 의사들은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다. 그리고 면봉으로 긁어낸 나의 입천장 세포 중에서 핵을 하나 추출하여 난자에 주입한다. 역시 큰 돈을 주고 금발의 러시아 여성을 대리모로 산다. 러시아 대리모에게 그 난자가 착상되고 열 달 후에 아이가 하나 탄생하게 된다. 그 아이는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몽골계 아이다. 바로 나 자신이다. 아니 나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다. 자연적인 쌍둥이와 다른 점은 이복 형제라는 것과 나이 차이가 무지하게 많이 난다는 것 뿐이다. 바로 그 아이는 나와 100%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지만 나 자신은 아니다.


DNA가 똑같다고 내가 될 수는 없다. 나의 본질은 내 두뇌다. 비록 DNA 설계대로 내 두뇌가 생성됐지만 지금 현재의 나는 그간 살아온 경험, 만났던 사람, 읽었던 책들, 밤새워 했던 공부들 등등이 만들어낸 두뇌 속 뉴런들의 네트워크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내가 오늘 책을 열심히 두 시간 읽었다면 어제의 나와 또 틀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라는 것은 지난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다.


여기서 아주 못된 상상이 시작된다. 저놈은 나와 똑같은 DNA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아니다. 그저 아주 어리디 어린 일란성 쌍둥이 이복 동생일 뿐이다. 나는 나이가 들었고 신체는 노쇠하기 시작했다. 의술의 발전은 머리 이식을 넘어 이제 두뇌 이식이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위의 복제된 클론을 죽이고 나의 두뇌를 거기에 이식하면? 짜잔~ 이런 식으로 나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자, 이제 그만 놀고 본론에 들어가자.


삼체의 외계인들은 엄청난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함대는 무려 광속의 1%로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불과 400년 후 지구에 도착하게 된다. 지구에서는 상상도 못할 과학 기술력으로 그들은 소폰을 만들어 내서 지구의 모든 인터넷 정보를 빼냈음은 물론 삼체의 외계인을 저지하려는 모든 시도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DC(Planetary Defense Council) 는 그들의 함대를 중간에서 정찰하고자 시도한다.


처음에 지구는 사람을 한 명 냉동시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지구의 기술로는 어떤 방법을 써도 광속의 1%로 가속하는게 불가능했다. 원작에선 우주공간에 핵폭탄 1천 개를 탐사선 진행 방향으로 일렬로 배치한 후 순차적으로 터트려서 탐사선을 가속시킨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속의 1%는 불가능했다. 결국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만 그만한 가속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은 PDC는 “오직 전진” 을 외치며 미친 짓을 시작한다. 시한부 생명이면서 천문학과 물리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의 두뇌를 적출하여 냉동시켜 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감시하고 있는 소폰에게 요구한다.


“네놈들도 실제 지구인이 궁금하지? 이 뇌를 받아서 이 사람을 재생하여 살려내라!”


‘결혼 출산 육아’ 시리즈의 ‘체외수정, 인공 수정, 시험관 아기 그리고…’ 편에서 보았다시피 이미 인공 자궁도 상당히 연구가 진척 되고 있다. 그러니 지구보다 까마득히 발전한 삼체의 기술력으로는 사람 하나 재생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게 미래 인류의 우주 여행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주 여행자는 두뇌만 냉동하여 우주선에 탑승하는 것이다. 수백 년이 걸려 도착한 다른 태양계의 행성에서 뇌세포 단 하나의 핵으로부터, 인공 자궁을 사용하여 복제양 돌리를 만들 듯 클론을 만들고 나서, 지구로부터 온 두뇌를 해동해서 이식하면 된다.


여튼 결론은, 광속 1%를 달성하기 위한 인류의 지랄 발광이 결국 냉동된 뇌 하나를 보낸다는 결정은 상당한 과학적 신빙성이 있다는 거다.


아유, 재밌었다.


(계속)


삼체 The Three Body Problem


목차


1) 모택동 때문에 외계인이 쳐들어오는 이야기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1.html?m=1

2)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2.html?m=1

3) 총균쇠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3.html?m=1

4) 개미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4.html?m=1

5) 폰 노이만과 어둠의 숲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4/04/5.html?m=1

6) 나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