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 검색

레이블이 뒤돌아보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뒤돌아보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국제 실험도시 오로빌을 방문했다(feat 인공지능)


인도 남부 첸나이와 폰디체리 사이에 오로빌이라는 국제 실험 마을이 있다.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사회 실험적 성격이 강한 마을이다. 아내가 한때 이 마을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인도 여행할 때 오로빌에 들려 일주일간 묵었다.


이제 인공지능의 시대다. 오로빌에 대해서 내가 이것저것 끄적거릴 필요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웹 브라우저에 포함된 GPT-3.5 기반의 챗봇에게 오로빌에 대해서 정리하라고 시켰다.


이하 마이크로소프트 챗봇이 작성 :


오로빌은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 주 폰디체리 근처에 있는 25㎢ 넓이의 생태 공동체이다. 1968년 프랑스 출신 미라 알파사와 인도의 독립 운동가였던 스리 오로빈도의 이상을 따라 124개국 젊은이들이 모여 창립했다. 오로빌은 “국경과 종교를 뛰어넘은 인류의 평화와 조화”를 모토로 삼으며, 세계 최대 규모의 공동체 마을로 약 2500명이 함께 살고 있다.


오로빌은 원형의 계획도시로, 상품경제를 뛰어넘어, 인류의 영적 진화를 추구하는 일종의 실험 도시이다. 오로빌리언들은 하루 6시간, 1주일에 36시간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일의 종류와는 관계없이 월 1만 루피 (약 17만원)의 생활 유지비를 받는다. 이 돈은 필요한 이들에게만 지급되며, 별도 소득이 있는 사람들은 매달 3150루피 (약 5만 4천원)의 기부금을 내야 한다. 이들은 이러한 경제구조를 선물경제 (Gift Economy)라고 부르며, 서로에게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필요한 만큼 주고받는 것이다.


오로빌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인 '스리 오로빈도'는 인류의 가장 큰 적은 인간 내부의 탐욕에 있으며, 명상을 통한 자기 성찰을 통한 영적 각성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오로빌에는 마트리 만디르 (Matri Mandir)라는 명상센터가 있으며, 각기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길을 존중하고 각자의 명상을 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또한 오로빌에서 부동산은 각자의 소유가 아니라 오로빌 재단의 소유이며, 집을 사더라도 오로빌 재단에 기부를 한 후, 거기서 살 수 있는 권한 (주거권)만 가지게 된다.


오로빌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일구어 나가기 위해 환경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한다. 유기농법과 환경 친화적 적정 기술 연구, 대체 의학, 에너지 재활용, 토양과 수자원 보호 등을 실천한다. 태양열 발전과 바이오 가스 활용 등을 통해 전력을 충당하며, 솔라키친이라는 태양열을 이용해 요리를 하는 곳에서 매일 점심을 제공한다 .


이상 마이크로소프트 챗봇이 작성 끝


어마 무시하다. 자율주행이 나와서 내 먹거리가 끝장날 줄 알았는데 지식 노동자의 세상이 먼저 종말을 맞이할 것 같다.


여튼, 며칠간 오로빌에 머문 후 아내의 환상은 깨진 듯하다. 더 이상 오로빌에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처음 마을이 들어서고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이들은 농업, 의료, 환경, 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여러 가지 대안 실험을 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마법과도 같은 현대 과학 기술과 비교할 때, 이들의 실험은 아기들 소꿉장난 수준보다도 못하다. 수십 년 전의 의욕적인 시작은 현재 전체적인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오로빌의 문제점에 대해 내가 또 주절거릴 필요는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opilot 앱은 GPT-4를 내장하고 있다. 오로빌의 문제점에 대해서 물어봤다.


이하 마이크로소프트 Copilot이 작성 :


오로빌은 인도 남부에 있는 실험적인 생태 공동체로, 인종과 성별, 종교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모여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설립된 계획도시입니다. 하지만 오로빌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오로빌은 자급자족 경제를 통해 최소한의 삶만 유지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로부터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12. 오로빌의 주민들은 8시간 의무 노동을 하고 모두가 똑같은 돈을 받지만, 그 금액은 인도의 최저임금보다도 낮습니다3. 오로빌의 건설과 유지비용은 매우 높으며, 오로빌의 상징물인 마트리 만디르 (Matrimandir)는 황금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4. 오로빌은 유네스코나 유럽연합, 인도 정부 등의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오로빌의 비전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12.


사회적인 갈등: 오로빌은 인류의 공동체로서의 삶을 실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열려있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사회적인 갈등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로빌의 주민들은 오로빌의 창립자인 스리 오로빈도와 미라 알파사의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사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갈라집니다. 또한, 오로빌의 주민들은 인도의 법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행정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도 정부와 오로빌의 관계가 긴장되고 있습니다. 또한, 오로빌의 주민들은 인종과 성별, 종교에 관계 없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인도인과 외국인, 남성과 여성, 힌두교와 기독교 등의 차별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환경적인 위협: 오로빌은 황무지였던 땅을 나무를 심고 물을 공급하여 숲으로 바꾸었으며, 친환경적인 농업과 건축, 교육, 예술,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오로빌의 환경은 여러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로빌은 인도의 가장 더운 지역 중 하나에 위치해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폭염과 가뭄이 잦습니다. 또한, 오로빌은 인도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공해와 쓰레기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오로빌은 인도의 인구증가와 빈곤으로 인해 인근 마을들과 땅과 물 자원을 놓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오로빌은 인도의 독특한 공동체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빌은 완벽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오로빌이 그들의 비전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로빌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도 정부와 인근 마을들, 국제사회와의 협력과 소통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로빌이 인류의 평화와 통합을 위한 모범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상 마이크로소프트 Copilot이 작성 끝


우와~ 이제 지식 노동자들 어떡하냐?


여튼, 인터넷 텍스트를 학습해서 인공지능이 이런 결과물들을 내놓는 세상이다. 나는 오로빌에서 며칠간 묵으며 직접 경험했지만 ChatGPT 처럼 순식간에 정리할 능력이 없다. 앞으로 도대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나?


그런데 이 글의 주제가 오로빌인지 아니면 인공지능인지 헷갈린다. 천연지능인 내가 이렇게나 멍청하다.


인도, 진짜 매력적인 여행지



아직 시차도 적응하지 못했고 황열병 예방주사 후유증으로 으슬으슬 몸살을 앓고있는 와중에 내일 드디어 북미대륙 로드트립을 떠나기 직전입니다.


삼개월여간 네팔, 인도, 태국, 라오스, 일본 그리고 한국을 여행했습니다. 그 중에서 한달간 인도에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달이라는 시간은 인도를 진짜로 경험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인도는 뭐랄까, 꼭 지구에 있는 나라가 아닌것 같았어요.


인도사람들은 참 특이합니다. 공무원에서부터 릭샤꾼까지 외국인 관광객을 속이려 하더라고요. 지나가는 행인들까지도 이런 사기 행각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아주 짜증났지만 나중엔 그런 상황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행 종반에는 이젠 여유있게 그들의 귀여운 사기행각을 즐기게까지 되더라고요. 물론 각자 다른 열 개의 손가락이 있듯이 모든 인도인이 그런것만은 아니고요(정확히 그들이 해준 얘기입니다. 그것도 여러 인도인에게 여러번 들은 얘기죠) 유쾌하고 좋은 인도인도 많이 만났습니다.


인도는 참 불결해요. 진짜 더러워요. 상상을 초월하게 더럽습니다. 인도인도 더럽고 인도소도 더럽고 인도개도 더럽고 인도원숭이도 더러워요. 하지만 물갈이를 몇 번 하고 이런 더러움에 익숙해지면, 아니 자포자기 해버리면 더러움 조차도 포용해 버리는 인도만의 매력이 다가옵니다. 여기저기 오물이 묻은 거대한 소들과 골목을 나란히 하며 걸을 수 있게 되는 거죠. 물론 파리쫓는 소꼬리에 맞아가면서, 길바닥의 소똥과 개똥 사이를 조심히 디디면서요.


이런식으로 쓰면 끝이 없겠네요. 요약하면 제가 경험한 인도의 매력은 긍정적인것과 부정적인걸 포괄하는 인도인들의 행태, 여러 볼거리들, 기막힌 사회 인프라들,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마치 다른 별에 온듯한 불결함 등입니다. 이 중에서 여기선 볼거리만 잠깐 말하고자 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힌두교도입니다만 역사적으로 많은 종교들이 인도에서 흥망성쇠를 이뤘습니다. 불교와 자이나교가 힌두교로부터 파생되었고 회교도가 오랫동안 인도를 지배했으며 힌두교와 회교가 믹스되어 시크교가 생기고 근대에는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천주교와 개신교가 전래되기도 했죠. 그래서 인도의 유적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뉴델리의 꾸뜹미나르, 후마윤의 묘, 아그라의 타지마할, 아그라 포트, 파테푸르 시크리 등등은 회교도 유적입니다. 정말 규모가 어마어마 하죠.


뉴델리의 그루두와라 방글라 사힙은 시크교도 사원인데요, 거기서 나눠주는 터번 대신의 머리가리개를 쓰고 맨말로 돌아다니는것도 참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아우랑가바드의 아잔타 석굴은 석굴암보다 훨씬 규모가 큰 석굴이 20여개가 사람의 기를 빨아들입니다. 고대 불교 예술품들이 질, 규모, 양에서 사람을 압도하는데 나중엔 지치더라고요. 그리고 그 다음날 간 엘로라 석굴에선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가 짬뽕이 되어서 관광객을 몰아붙이는데, 와~ 정말 입을 다물수가 없더군요. 저는 타지마할 보다는 엘로라 석굴, 특히 16번 힌두교 석굴 사원에서 100배 이상의 충격을 겪었습니다. 제가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저 고대 인도인들이 막 존경스러웠습니다.


이런 여러 유적중에서 저는 특히 힌두교 사원들이 좋았습니다. 4억명 이상의 신이 있다는 힌두교 답게 갖가지 형상의 신이나 신화들을 내외부에 조각한 힌두교 사원은 미치 미로의 비너스급 예술품들을 재료로 삼아서 건물을 세운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고 때로는 코믹하고 때론 에로틱한 조각들로 둘러쌓인 힌두교 사원에 서면 정말 시간가는줄 모르겠더군요. 델리의 스와미나라얀 악샤르담, 카주라호의 사원군, 마말라뿌람의 해변 사원 들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별 기대 없이 시작한 인도 여행이었는데요, 일정때문에 30일만에 인도를 떠날 때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간 돌아오게 되리라는 걸요. 다음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말이죠.


여행을 좋아하시는분께 정말 추천드립니다. 인도, 믿을수 없을 만큼 좋은 여행지입니다.


2016.6.6

반포텍 수퍼라이트 3인용 사계절 텐트의 추억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 캠핑이나 산행을 자주 했었다. 캐나다로 이사 와서도 트럭 운전을 하기 전까지는 캠핑을 자주 했다. 캠핑을 할 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게 텐트다. 그래서 그동안 많은 텐트를 샀다.


아이들과 같이 캠핑을 가면 큰 텐트를 가지고 다녔는데 혼자나 아내와 같이 캠핑을 할 땐 단 한 개의 텐트만 주로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반포텍의 수퍼라이트 3인용 사계절 텐트였다. 만듦새가 훌륭해서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에도 겨울에도 의지할 만한 텐트였다. 설치와 철거도 순식간에 가능했다. 그래서 집안에 잡다한 모든 텐트를 버려 두고 주로 사용하게 된 건 수퍼라이트 뿐이었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항상 밤에는 그 텐트에서 밤을 보냈다. 10여년이 넘는 기간 텐트와 정이 들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올 때 이삿짐으로 그 텐트를 들고 왔다.

아내와 5개월 정도 북미 대륙을 로드트립 했다. 많은 국립공원의 야영장에서 바로 그 텐트를 쳤다. 크기가 아담해서 따로 구매한 큰 모기장 안에 쏙 들어갔다. 알버타 공룡 주립공원에는 모기가 엄청 많았는데 우리는 모기 걱정 없이 모기장 안에서 밥을 먹고 모기장 안에 설치한 그 텐트에서 잠을 잤다. 남들이 우리를 보고 부러워했다.

텐트에서 수다를 떨었고, 밥을 해 먹었고, 영화를 봤고, 잠을 잤다. 비록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여행을 하거나 캠핑 할 땐 아늑한 우리 부부의 집이자, 거실이자, 식당이자, 침실이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텐트는 점점 낡아갔다. 아니, 우리와 함께 늙어갔다. 한국의 많은 캠핑장과 산에서 피난처를 제공했고 캐나다까지 끌려와서 북미대륙 곳곳을 누빈 텐트는 결국 지퍼가 고장났다. 다행스럽게도 여행의 막바지에 문제가 발생했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텐트를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괜히 울컥해졌다.


그 텐트를 버린 후 더 이상 캠핑을 안 다니게 됐다. 트럭 일을 시작한 후 기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마음에 드는 텐트가 없어졌기 때문인지 스스로 헷갈린다.


똑같은 텐트를 또 사고 싶은데 이미 단종된지 오래다. 반포텍 이라는 회사 자체도 없어진듯 하다.


아내가 요즘 부쩍 캠핑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긴 텐트 치고 자본지도 몇 년이 지났다. 슬슬 또 다른 사계절용 텐트를 찾아봐야겠다.


자전거 8) 자전거 도로에서 미니벨로를 타 보고 팬이 되다

자전거는 크게 생활용과 레저용으로 나눌 수 있다.


레저용 자전거는 순전히 자전거를 타는게 목적이다. mtb로 라이딩을 하거나 산을 탄다. 혹은 로드 바이크를 타고 포장 도로에서 속도를 즐길 수도 있다.


생활 자전거는 말 그대로 생활속의 자전거 라이딩을 뜻한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기도 하고 쇼핑을 가기도 하고 식당을 가기도 한다.


나의 자전거 생활은 생활 자전거에 가깝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거나 마실을 다니다가 커피숍이나 식당에 들어가기도 한다. 주로 자전거를 잃어버리는 장소도 낯선 곳에 묶어 놨을 때의 일이다.


내가 좀 비싼 MTB를 사고 라이딩을 시작했을 때부터 과거와 같이 생활에 밀착한 자전거 라이딩은 물건너 갔다. 도난이 두려워서 더 이상 아무 곳에나 묶어놓고 다닐 수가 없었다.


생활 자전거 중에서 미니벨로라는 분야가 있다. 20인치 이하의 타이어 크기를 가진 자전거다. 바퀴가 작은 대신 속도가 잘 안나지만 그 대신에 아주 가볍다.


보관하거나 차로 운반 할 때 미니벨로 자전거의 크기를 더 한층 줄이는 방법이 있다. 프레임과 핸들을 접어 버리는 것이다. 폴딩 바이크라고 한다. 이 분야의 선구자 중에 하나가 미국의 다혼이라는 회사다. 다혼 자전거는 한국에도 진출했는데 저가형이 한 70만 원 정도 했었다. 여튼 폴딩자전거계의 명품 중 하나로 간주된다.


한국의 대표적 자전거 회사 중에 삼천리자전거가 있다. 주로 짐 자전거와 생활형 자전거를 만든다. 삼천리자전거가 레저용 자전거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첼로 스포츠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마치 현대자동차가 고급차 브랜드를 표방하는 제네시스를 만든 것과 같다. 첼로 스포츠에서 블랙캣이라는 MTB 시리즈를 판매했다.


어느날 첼로 스포츠에서 블랙캣 콤팩트라는 폴딩 미니벨로를 발표했다. 자전거 꾼들에게 블랙캣 콤팩트가 화제가 됐다. 왜냐하면 프레임이 다혼의 기본형 중에 하나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장착된 부품들이 다혼의 중급기에 적용된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가격은 다혼 저가형의 반값도 안됐다. 다혼이 첼로 바이크에게 OEM 생산하여 납품한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저기 자전거 동호회에서 공동구매를 하는 등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공동구매에 참여했다. 엉겁결에 미니벨로를 타 보게 되었다.


자전거 도로에서 미니벨로를 타 보고 감탄했다. 안정성은 약간 떨어졌지만 속도와 등판능력이 탁월했다. 약간 무리를 하면 MTB 만큼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약간 더 힘은 들었지만 MTB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은 미니벨로로도 올라갈 수 있었다. 한가한 시간대에는 이걸 접어서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다. 접은채로 카페나 술집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나는 미니벨로의 팬이 되었다.


그 미니벨로는 캐나다까지 가져왔는데 결국은 도난 당했다. 가장 아까운 자전거 도난 사건 중 하나이다.


최근 두 대의 접이식 미니벨로를 샀다. 이 자전거 시리즈의 첫 글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것들은 블랙캣 콤팩트와 비교했을 때 주행 성능이나 등판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 약간 실망스럽다. 하지만 역시 다혼의 기술력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트럭 운전을 했더니 다리 근육이 많이 사라졌다. 이제 옛날만큼 등산을 즐길 수도 없다. 예전처럼 자전거로 속도를 내거나 오르막을 오를 힘도 없어졌다. 서글픈 일이지만 받아들여야지 뭐!


다음 자전거로는 브롬톤을 사고 싶다. 영국에서 개발된 유서깊은 접이식 미니벨로다. 이거는 접어서 끌고 다닐 수도 있고 쇼핑을 할 수도 있고 비행기에 실을 수도 있다. 접으면 좀 큰 슈트케이스에 쏙 들어가는 크기다.


눈여겨 보고 있는 모델이 현재 대략 3,000불 정도 한다. 은퇴하면 두 대를 사서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를 여행 다니고 싶다. 아직 까마득히 남은 날이지만 시간이 점점 빨리 감을 느끼고 있으니 조만간 그 날도 갑자기 다가 오겠지.


(끝)

자전거 7) 자전거 도둑으로 몰렸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기분이 나쁘다



일본사람들은 정말 자전거를 많이 탄다. 학생, 가정주부, 직장인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생활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빈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와 전철역 근처에 주차하고 전철을 타고서 직장으로 출근하고는 한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국에는 없는 자전거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위 사진과 같이 일본 전철역에는 대체로 유료 자전거 전용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주차하면 전혀 자전거 도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일본에서는 자전거 등록 제도가 있다. 동네 파출소 같은데 가서 단돈 500엔만 내고 자전거를 등록할 수 있다. 자전거를 등록하면 등록 스티커가 나오는데 이것을 프레임에 붙이고 다닌다. 만약 자전거를 도난 당하면 신고할 수 있다. 경찰은 도난 신고된 자전거와 비슷한 자전거를 발견하면 등록 스티커를 살펴보고 도난 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어딘가에 방치된 자전거가 있으면 경찰이 수거해서 원래 주인에게 연락을 해준다. 등록 스티커가 없는 자전거는 일단 도난 당한 자전거로 의심 받는다. 한국보다는 확실히 자전거 도난에 대해서 걱정을 덜 수 있다.


젊을 때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어느날 한국인 후배 직원이 여럿 들어왔다. 우리들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료' 라는 숙소에서 묵었다. 나는 선배로서 그들을 잠시 케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국과 다른 일본의 에티켓과 전철 타는 방법 등등을 알려줬다.


그 중에 한 명이 경찰에게 잡혔다. 자전거를 훔친 것이다. 그 놈이 자전거 도둑일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일본의 자전거 등록 제도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을 텐데, 신입 사원 중에서 자전거 도둑이 있을 줄 내가 상상이나 했겠냐고요! 여튼 망신을 당하며 간부들과 일본 본사 총무과가 겨우 사건을 무마 시켰다.


그는 일요일날 다닐 교회를 찾아보기 위해 자전거를 잠시 빌렸단다. 용무 후에는 제자리에 갖다 놓을 작정이었단다. 이게 도대체 말이여, 방구여?


한편, 나도 자전거 도둑으로 몰릴뻔 한 적이 있다. 바로 본격 MTB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다.


나는 몸에 딱 맞는 자전거 져지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자전거 탈 때 나의 복장은 그냥 등산복이다. 헬멧도 쓰지 않는다. 어느날 야근을 하고 밤늦게 MTB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신호를 대기 하는 중이었는데 경찰 한 명이 나를 유심히 봤다. 자전거와 나의 복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더구나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경찰이 내게 다가왔다.


'아저씨 잠깐만요. 아, 싼 거구나! 그냥 가셔도 돼요.'


그 경찰은 아마도 자전거에 조예가 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슬쩍 내 자전거의 메이커와 프레임과 달려 있는 구동계 부품을 보더니 나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아마도 내가 카본 프레임에 XTR 급 구동계 부품을 가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면 나는 자전거 도둑으로 몰렸을거다.


그런데 괜히 억울했다. 자전거 도둑으로 몰린 것보다 내가 아끼는 자전거가 무시당한게 더 기분이 나빴다. 무척 비싼 자전거는 아니지만 나는 내 자전거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를 당하다니!


비록 자전거에 정통한 선수들에게는 싸구려 취급을 받을만 한 메이커와 등급이지만 난 그 자전거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내 자전거는 탄탄하고 달릴때 잡소리 없이 그저 지이이잉~ 하는 멋들어진 소리만이 타이어와 아스팔트 사이에서 올라온다. 그간 체인 한번 빠진적이 없다. 더이상 바랄게 없었다. 그런데 정복을 입은 경찰관에게 싸구려라고 무시당했다.


도대체 값비싼 카본 프레임에 최상급 구동계를 쓴 자전거는 얼마나 좋으려나? 궁금하기도 하다만 절대 거기까지 가면 안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뭔가 또 한번 타락해 버릴 것 같아 겁난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계속)


자전거 6) 타락해 버린 육체와 고급 자전거의 역설


오래된 동네의 시장 골목 입구 쯤에는 보통 허름한 자전거포가 있다. 입구에 세발 자전거부터 아동용 자전거들 그리고 짐 자전거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애용하던 유사 MTB 혹은 철티비들도 있었다. 대충 맞춤한걸 찍어 놓고는 흥정을 했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15만원 주쇼.'

'12만원에 하시죠?'

'에이~ 13만원에 가져가쇼.'

'딜!'


이런식으로 자전거를 사고는 했다.


제주도에서 자전거의 신기원을 경험한 후 나도 자전거 전문점을 갔다. 거기에는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분위기에 알맞는 와인을 추천하는 소믈리에가 있듯이 자전거 전문가인 '메카닉'이 있었다. 나는 메카닉에게 제주도에서의 경험과 나의 자전거 용도에 대해서 설명했다.


메카닉은 나의 신장을 대충 보더니 먼저 프레임 사이즈를 정해줬다. 와, 고급 자전거는 사람 키에 따라서 프레임사이즈까지도 정해지는구나, 깨달았다. 한참 후에 나에게 24단 시마노 구동계를 가진 검은색 입문용 MTB가 주어졌다. 비록 이쪽 계통의 자전거 중에서는 싼 거였지만 나로서는 자전거에 처음 지출하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새로 맞춘 자전거는 제주도에서 경험했던 자전거 보다 더 한층 좋았다. 나는 자전거란 모름지기 항상 소리가 나는 물건인 줄 알고 있었다. 항상 페달을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끼익끼익 해야 자전거지! 그런데 나의 새 자전거는 소리가 안나! 오로지 바람 소리와 타이어가 포장도로와 만나 마찰하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지이이이잉~ 하는 타이어와 도로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나에게 황홀경을 줬다.


나는 싸구려 철티비로도 빠른 라이딩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면 속도를 올려 따돌리곤 했다. 헬멧을 쓰고 몸에 착 달라붙는 저지를 입고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쓰고 비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나는 곧잘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내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속도를 내면 앞서가던 라이더가 놀라서 선두를 양보하고는 했다. 그런 나에게 본격적인 mtb는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나는 자전거 도로에서 무적이였다. 단, 로드바이크는 빼고!


이제 더 한층 즐거운 자전거 출퇴근을 즐길 일만 남았는데, 맙소사! 세상 일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나는 더 이상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수 없게 됐다. 한동안 자전거 출퇴근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이 본격적인 mtb는 틀림없이 곧 도둑 맞을거다. 이것을 밖에 묶어 두고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시 옛날에 타던 싸구려 철티비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나의 타락한 몸이 더 이상 싸구려 자전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삐걱거리고 걸핏하면 체인이 벗겨져 버리는 싸구려 구동계는 나에게 좌절감만 주었을 뿐이다.


결국 자전거 출퇴근은 포기하고 주말에만 레저 삼아서 새로산 MTB 라이딩을 즐겼다. 이거 뭐냐! 오히려 자전거를 더 못 타게 되어 버렸다.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 차라리 제주도에서 그 시마노 구동계를 쓴 자전거를 안 만났더라면 나는 지금도 행복하게 자전거 출퇴근을 했을 텐데… 부처님 말씀이 맞다. 좋은 것은 항상 나쁜 걸 동반한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회사에 개인 사무실과 24시간 지하 주차장 이용권한이 생겼다. 드디어 자전거를 회사의 내 방이나 주차장 차 안에 보관할 수 있게 됐다. 다시 자전거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옛날처럼 마실을 다니다가 자전거를 묶어놓고 카페나 식당을 간다든가, 쇼핑을 한다든가 하는 건 불가능했다. 자전거를 모셔야만 하는 이런 상황이 싫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계속)


자전거 5)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하다. 그리고 타락하다.



여러해 전 휴가 때 아내와 같이 3박 4일간 제주도 자전거 일주 여행을 했다. 제주 시내에서 두 대의 자전거를 렌트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 중간 중간 만장굴도 가고 우도도 들리고 성산 일출봉이니 섭지코지니 하는 관광 명소를 둘러 봤다.


이 일은 이것 대로 행복한 추억이지만 나에게는 심오한 자전거의 세계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도 자전거를 잃어버려서 비싼 자전거는 전혀 사지 않았다. 어차피 두 바퀴가 굴러가는 것일진대, 비싼 자전거는 뭐 특별나게 다를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래서 항상 도둑맞아도 아깝지 않을 만한 10만원대 자전거만 타고 다녔다.


싼 가격의 자전거라도 보통 12단에서 21단 정도의 기어가 달렸다. 흔히 유사 MTB 라고 불린다. 핸들바에 기어 조정을 하는 노브가 있었는데 이를 잘 조정하여 달리면서 기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기어를 변경하다가 체인이 빠지곤 했다. 그래서 기어 변경은 최대한 자제하며 자전거를 탔다.


어쩔 수 없이 기어를 변경해야 할 때는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절대 큰 힘이 체인에 가해져서는 안된다. 달리고 있는 속도보다 천천히 페달을 밟으면서 기어를 조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오르막에서 낑낑거릴때는 절대 기어를 조절해선 안된다. 해서 오르막 오르기 전에 기어를 미리 조정해 놔야 한다. 안 그러면 체인이 빠져버려서 손에 기름때를 묻히며 다시 체인을 걸어야 한다. 특히 체인이 뒷바퀴 스프라켓 사이에 끼어 버리면 낑낑 용을 쓰며 빼내야 했다.


제주도에서 빌린 자전거는 신세계였다. 기어 변경 노브가 디지털 식이였다. 딸깍 딸깍 이쪽 레버를 누르면 기어가 올라가고 딸깍 딸깍 저쪽을 누르면 기어가 부드럽게 내려가는 것이었다. 와! 자전거 기어 변경이 이렇게나 쾌적할 수 있는 것이라니.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 변경이 가능했다. 그리고 절대 체인이 빠지지 않았다. 아! 이래서 비싼 자전거를 사는 거였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후 자전거에 대해서 좀 공부했다. 생각보다 자전거의 세계는 심오했다.


먼저 프레임 소재. 하이텐강을 쓰느냐 크로몰리를 쓰느냐 알루미늄 합금을 쓰느냐 혹은 카본 소재를 쓰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하늘로 솟구쳤다. 비쌀수록 프레임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 진다.


구동계의 부품도 등급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빌린 자전거에는 시마노의 초보적인 등급이 사용됐었다. 그런데 이게 알투스니 투어니니 알리비오니 데오레니 XTR 이니 여러 등급이 있고 높은 등급은 엄청난 가격이 형성 된다. 등급이 높을수록 보다 가볍고 튼튼하며 정밀하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 왔으면서 전혀 몰랐던 세계였다. 드디어 자동차 한 대 값의 자전거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여튼 나는 아직도 도난 걱정 때문에 비싼 자전거를 사지는 못한다. 하지만 구동계는 최소한 시마노 혹은 그에 준하는 부품을 쓰는 자전거를 사게 됐다. 그래서 자전거 구매 가격이 과거보다 몇 배나 올라가 버렸다.


모르는게 약일 때가 있다. 나는 쌀가게 배달용 짐자전거를 타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시마노 구동계가 달린 자전거를 한번 맛본 뒤로는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싸구려 자전거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돼버렸다. 타락해 버렸다.


(계속)


일본이 아니었다면 키작고 못생기고 가난한 내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동영상 : 일본의 버블시절을 상징하는 코카콜라 광고


일본이 거품경제의 최고 전성기에 있을 때, 그리고 거품이 폭삭 꺼질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평균 3개월에 한 번씩 일본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외국인 노동자로서 근무했다.

한일합작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신분의 한국인이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조차 두려워하던 존재였다. 일본 땅을 팔면 미국을 몽땅 몇 번 살 수 있다는둥 하는 말들이 돌고 실제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소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등 기세등등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일본엔 일감이 넘쳤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우리 같은 한국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정말 휘황찬란했다. 이제 막 국민소득 1만불을 넘네마네 하던 한국에서 일본에 간 우리 젊은이들은 일본의 넘쳐나는 풍요를 신기해 하기도 하고 부러워 하기도 했다. 한국인 직원들중 일부는 빠칭코 등 도박에 빠졌고 일부는 토요일, 일요일마다 모여서 볼링을 쳤다. 나는 볼링파였다. 우리들은 한국말로 떠들어대며 볼링장을 전세낸듯 주말마다 놀았다. 간혹 한국인끼리 모여 회식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간사가 되어 회비를 걷고 회식장소를 정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TV에서 가끔 조용필이나 이연자가 등장해 엔카를 불러 제꼈을 뿐이다. 심야시간에 여성의 알몸을 다 드러낸 성인 오락 방송은 그야말로 컬쳐 쇼크였다.

화무십일홍이다. 거품이 꺼지며 일본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일본에서도 이곳 저곳 출장을 다니고 있었다. 마지막 프로젝트가 일본의 지방경시청 일이었다. 개발이 끝나고 현장 설치를 하려니 경시청에서 외국인은 들어올 수 없다며 나의 출입을 막았다. 혼자서 본사 사무실에서 빈둥거리게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거품 붕괴와 더불어 출장 인원들도 줄어들고 점점 한산해 졌다. 일본 정부도 한국인에게 더 이상 3개월 장기 비자를 내 주지 않아서(무비자협정 이전이다) 나도 일주일 간격으로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게 되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지방경시청으로 출장 간 팀원들이 내가 담당한 부분을 적용할 때 뭔가 문제가 있으면 대응하기 위해 계속 일본 본사에서 빈둥거렸다.

여자 숙소는 더욱 비참하게 되어 대부분의 아파트가 공실이 되었다. 그런데 평소 볼링을 같이 치던, 엄청난 미모를 가진 여직원 한 분이 나처럼 일주일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얼굴만 이쁜게 아니라 꽤 능력도 있는 듯 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도 출장을 왔다갔다 하겠지. 그분은 일본 본사에 도착하여 다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모 발전소로 출근 하곤 했다. 그러니 나와 얼굴 볼 일도 별로 없었다.

어느날 오랜만에 일본 본사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왁자지껄 하던 한국인들이 모두 빠지고 갑자기 외로운 처지가 된 한국인 두 사람이 만났다.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모처럼 둘이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근 2년간 주말마다 볼링을 같이 쳤는데 단 둘이서 밥을 먹은건 처음이었다. 그녀와 난 차분히 이러저러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일로 돌아갔고 나 또한 사무실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한국에서는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감원을 단행했다. 분위기는 참담했다. 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의 한계도 느꼈던 바, 나는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내가 사표를 냈다는 소식은 빠르게 회사 사람들에게 전파됐고 예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사표 내셨다면서요? 신기하네! 나도 오늘 사표 냈는데…'

'어, 그래요? 어디 갈 데는 있어요?'

'아니요. 이제부터 찾아 봐야죠.'

이게 인연이 되어서 나는 그녀와 같이 갈 수 있는 회사를 찾게 되었다. 마침, 일본 합작 회사를 다니기 이전 회사의 이사님이 생각났다. 그분은 내가 사직할 때, 언제든 돌아온다면 받아주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 이사님께 연락해봤다. 이사님은 대표이사로 승진해 있었고 나의 복귀를 환영해 줬다. 이전 회사로 돌아갔다. 그녀도 나의 부하직원으로서 같이 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2년 후에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일본 거품경제의 흥망성쇠가 만들어 준 인연이었다.

일본의 버블이 꺼지지 않았다면 키작고 못생기고 가난한 내가 감히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난 일본이 약간 고맙기도 하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에 이르는 장기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인터넷엔 온갖 한국 뉴스와 연예인 뉴스가 흘러넘친다. 한국 드라마와 음악이 일본에 깊숙이 침투해 있고 기무치는 일본인의 기본 반찬이 됐다. 많은 일본의 10대들은 한국에서 K-POP스타가 되기를 열망한다. 실제 많은 수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일본의 이런 몰락이 가끔은 안타깝기도 하다.

노동생산성이라는 사기


 

일본이 거품 경제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을 때 한일합작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인 임원이나 간부들이 한국생산성본부 출신이 많았다. 당시에는 언론이나 교과서 등에서 한국이 노동생산성이 낮다고 떠들어대던 시기였다. 그래서 회사의 임원이나 간부들에게 생산성을 높이라는 말을 계속 들었다.


당시 나는 헤비스모커 였는데 괜히 담배 피는 시간만큼 나의 노동생산성을 낮추고 있는거 같아서 괜히 죄책감이 들곤 했었다. 한국 노동자들은 게으른 건가? 왜 노동생산성이 낮을까? 열심히 일해야지! 따위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일본에 파견 나갔을 때 후지산 근처 하코네에 있는 일본 생산성본부 연수원에서 1박 2일간 회사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양국 생산성 본부간의 뭔가의 커넥션이었겠지. 그때 일본 생산성본부의 사람이 일본과 한국의 노동생산성 차이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강연을 했다. 요지는 일본을 본받아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생산성이라는게 노동자에 의해 결정되는게 아니라는걸 안다. 10명의 인부가 아무리 삽질을 해봤자 포크레인 한대를 이기지 못한다. 네팔 카트만두와 포카라 사이에는 200여 km 정도의 고속도로(?)가 깔려 있다. 말이 고속도로지 여기를 주파하는데 6시간이 걸린다. 네팔 고속버스 운전사들의 노동생산성이 낮아서 그런가? 아니다! 도로가 그만큼 형편없기 때문이다.


즉 노동생산성이라는 것은 노동자가 결정하는게 아니다. 국가의 사회 인프라와 과학기술 수준이 결정한다. 산업계의 자동화와 무인화가 결정한다. 그런데 그렇게 노동자 탓을 하며 사기를 쳐댔다. 한때 출근 후 담배 꼬시르면서 죄책감 들던 시절이 괜히 억울하다.


2018년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일본을 추월했다. 그때 한국을 얒잡아 보며 생산성 운운했던 그 일본인 강사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강연이 끝나고 그날 밤에 조별로 모여서 '회사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분임토의를 하고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같은 성격의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다.


요상하게도 우리 조는 나같은 빨갱이들이 많았다. 해서 분임토의 내용과 발표 자료들이 산으로 가면서 '회사 발전을 위해서 이런 걸 하자'가 아니라 '직원을 위해서 이런 걸 해 주쇼' 라고 회사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돼버렸다.


어찌됐건 내용은 회사 임원진에게 밉보이기 딱 좋았는데 누가 발표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조원 중에 똘똘하면서 초절정 미녀가 있었다. 조원들의 푸쉬에 위해서 그녀가 발표자가 되었다.


여튼 한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이고 일본은 그 최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을 누리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참으로 생산성 없는 일이었다.


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큰 성취 계기가 된 일이기도 했다. 그 똘망똘망하게 발표하던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지.


자전거 4) 찬란했던 20대의 막바지 청춘 - 자전거 출퇴근



두 번째 자전거를 산 것은 결혼 후였다.


약해빠진 사이클에 데인 이후로 튼튼해 보이는 자전거를 골랐다. 뭐 대충 유사 MTB 다. 운동 삼아 동네 마실을 다니다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기로 결심했다.


탄천을 끼고 달리다가 강변으로 해서 삼성동에 있는 회사로, 아침 저녁으로 왔다 갔다 했다. 탄천을 달릴땐 자전거길 위에 구름처럼 떼지어 있는 하루살이 무리를 지나칠 때가 많았다. 날벌레들이 얼굴에 와다다다 부딪쳤다. 헉헉거리며 호흡할 때 하루살이들이 코로도 들어오고 입으로도 들어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마 여러 마리 먹었을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출퇴근 길이었다.


하지만 이 즐거운 출퇴근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회식을 해서 자전거를 묶어놓고 술에 취한 채 집에 갔는데, 다음 날 출근을 해보니 자전거가 사라졌다. 밤새 누군가가 훔쳐간거다.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코엑스 근처로 전시회를 보러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전시회가 끝나고 나와 보니 자전거가 사라져 있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전거는 항상 잊어버려도 아쉽지 않을 정도의 가격대인 10만원대로 주로 샀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곤 했다. 방한모를 쓰고 귀마개를 하고 바라클라바를 쓰는 등 중무장을 했다. 그런데 겨울 자전거 라이딩의 가장 큰 적은 눈알이 시리다는 거였다. 그래서 방풍 안경까지 쓰고 자전거를 탔다.


직급이 올라가고 회사에 개인 공간이 생겼다. 드디어 자전거를 회사의 내 방에 갖다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전거를 잃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타고 다니는 자전거도 좀 더 고급이 되었다.


그런데 큰 자전거를 들고 아침에 엘리베이터를 타는게 고역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너무 보였다. 결국 자전거를 번쩍 들고서 5층 사무실까지 계단을 왔다 갔다 했는데 너무 귀찮았다. 마침 그 당시 유행하던 접이식 미니벨로를 사봤다. 보기보단 다르게 주행성능이 훌륭했다. 미니벨로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회사 앞에서 척척 접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씩 자전거를 접고 펴고 하는게 또 귀찮아졌다. 결국 좀 타협을 하기로 했다. 차 뒷좌석을 폴딩 한 후 가지고 있던 MTB 와 미니벨로를 실었다. 회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MTB를 꺼내 타고 퇴근했다. 다음날 아침 대중교통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 주차장에서 미니벨로를 꺼내 타고 퇴근했다. 다음 날 대중교통으로 출근한 후 차를 가지고 퇴근했다. 다시 두 대의 자전거를 차에 싣고 회사로 출근했다.


이 루틴은 회사를 사임 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이 모든 자전거 출퇴근에 관한 추억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은 신혼 때였다. 나는 사내 연애 했고 사내 결혼했다. 결혼하고도 오랫동안 아내와 같은 직장에 다녔다.


결혼한 후 초창기에 산 자전거 중 하나는 굉장히 이상했다. 프레임에 뒷바퀴 충격 흡수를 위한 쇼바까지 달렸는데 짐자전거처럼 큼지막하고 튼튼한 짐받이도 달려 있었다. 최첨단 자전거처럼 생겼으면서 짐차로도 쓸 수 있는 요상한 물건이었다.


어느날 아내가 자기를 뒤에 태우고 같이 퇴근하자고 했다. 내가 자세를 잡은 후 아내가 짐받이 옆으로 걸터 앉았다. 아내를 뒤에 태우고 강변도로를 질주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롤러블레이드 열풍이 불고 있었다. 강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뒤쫓거나 따라잡으며 아내와 같이 달렸다. 둘이서 하나의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뭔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바람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리면서도 '뭐라고? 어쨌다고?' 라고 서로 소리치며 한강변을 달렸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여러 달 후 그 이상한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그 이후에 산 자전거들은 아내를 뒤에 태울만한 짐받이가 없거나 튼튼하지 못했다. 요즘 타고 다니는 미니벨로는 아예 사람을 뒤에 태우는게 불가능하다.


아내를 뒤에 태우고 한강변을 달리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나는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사람들을 주의하며 페달을 밟았고, 아내는 내 허리춤을 꼭 잡거나 나를 뒤에서 부둥켜 안고는 했었다. 그렇게 둘이서 하나가 되어 강변을 달렸다. 찬란했던 20대의 막바지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 행복한 추억이다.


(계속)


자전거 3) 내 첫 자전거의 처참한 최후와 복수 혈전



대학교 신입생 때 노가다 알바를 했다. 2주간 일한 후 약간의 목돈을 쥐었다. 그리고 중고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에 해박한 친구녀석의 단골 자전거포에서 중고로 싸이클을 한대 샀다. 지금도 값이 기억난다. 5만 5천 원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나만의 자전거를 갖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싸이클이라고 하지 않고 로드 바이크라고 한다. 여튼 앞뒤에 기어가 달린 자전거 였고 바퀴가 무척 얇았다. 한동안 이 자전거가 나의 발이 되었다. 통학을 자전거로 했다.


문제는 자전거가 너무 약했다. 포장이 잘 된 트랙용 자전거 였는데 이걸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거나 친구 녀석이 잠깐 타고 나면 포크, 림, 스포크가 금방 휘어 버렸다. 내 용돈의 큰 부분이 자전거 관리 및 수리비로 들어갔다. 그래도 난 그 자전거가 정말 좋았다. 어디를 가든 자전거와 함께였다.


친구들과 시내 모처에서 모이기로 했을 때 친구 녀석들은 버스를 타고 나는 자전거로 움직였다. 내가 친구 녀석들 보다 먼저 도착하는 일이 많았다. 그야말로 그 자전거는 내 두 발이었다.


같은 동네에 친하게 지내던 중학교 동창 녀석이 있었다. 이 녀석은 대학을 안가고 프로 복서가 된다며 체육관을 다녔다. 이 녀석이 프로 테스트를 받을 때 내가 같이 따라갔다. 상대와 스파링을 하는데 무지 쳐맞더라. 코피를 흘리며 피가 잔뜩 섞인 침을 뱉어 대는 녀석에게


'야 인마, 때려 쳐라!'


해 줬다. 녀석은 스파링 후에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내 충고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 복싱을 때려치고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에 취직했다.


어느날 이 녀석이 내 자전거를 빌려갔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안돌려 주는 거였다. 한참 오르막을 올라야만 하는 녀석의 집을 찾아갔다. 나의 소중한 자전거는 그 녀석의 집 마당에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었다. 포크는 잔뜩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고 림은 엿가락처럼 구부러져 있었으며 여러 개의 스포크가 림에서 분리되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할 듯 보였다.


이 쉐키~ 하며 녀석의 방문을 열어제쳤다. 낮잠을 자고 있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 한대 칠까 하다가 그래도 한 때 복싱을 배운 놈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멱살을 놓고 '이 강아지야!' 욕설을 내뱉으며 그냥 뒤돌아 섰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자전거와의 고별이었다. 그래도 내 자전거의 최후를 목격한 셈이니 다행이려나? 왜냐하면 그 후에 내 모든 자전거는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내 첫 자전거를 그 꼴로 만든 그 놈은 그 후 나의 원수가 되었다. 몇 년 후 그 녀석이 녹즙기를 팔러 왔을 때 안 사줬다. 내 자전거의 원수의 물건을 살 수는 없으니까.


'녹즙기 사, 새꺄!'

'안 사, 새꺄! 나 녹즙 안 먹어, 새꺄!'


이렇게 원수를 갚아 줬다.


또 한참이 지난 후 녀석이 뭔가 다단계 사업을 같이 하자며 양복을 말쑥하게 입고 찾아왔다. 난 거절했다. 내 자전거의 원수와 같이 사업을 할 수는 없으니까.


'같이 하자, 새꺄!'

'안 해, 새꺄! 술이나 쳐먹어, 새꺄!'


이렇게 또 원수를 갚아 줬다.


이런 잡글을 쓰고 있노라니 그 놈이 참 보고 싶어지네! 그 녀석의 집도, 내가 그 당시 살던 집도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그 동네 자체가 삼성 래미안인가 뭔가 하는 고오급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이제 녀석을 찾을 방도가 없다. 어떻게 변했을려나? 진짜 한번 보고 싶네!


아차차! 자전거, 자전거!


그러고 보니 내 첫 자전거 외에도 도둑 맞지 않은 자전거가 또 한 대 있었구나. 캐나다에 오기 전, 두 대의 자전거가 있었다. 하나는 MTB 였고 또 하나는 다혼-like 한 접이식 미니벨로였다. 두 자전거 모두 아끼던 거였다. MTB는 형님 - 아내의 오라버니 - 께 드리고 미니벨로는 캐나다까지 이삿짐으로 가지고 왔다.


한동안 집 근처 노즈힐 공원까지 미니벨로로 낑낑대며 올라가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자전거 도둑은 전 세계에 존재한다. 아끼던 미니벨로도 결국은 도둑맞고 말았다. 한국에서부터 캐나다까지 가져온 거였는데 참으로 허무할 따름이었다.


최근에 아내가 레스토랑에서 밥 먹는 동안 밖에다 묶어 놨던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캐나다에서 세 번째 도난이다. 자전거라는게 그렇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자전거는 내 자전거가 아니다. 굳이 비싼 자전거를 사지 않고 쓸만한 것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을 찾는 이유다. 어차피 언젠간 또 도둑맞을 걸, 뭐~


(계속)


자전거 2) 내 자전거가 생겼다



매일 저녁 무렵 카카오톡 음성으로 아내와 통화한다. 서로 별일 없었냐며 안부를 묻고 통화를 끝낸다. 전화상으로는 서로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기에 통화는 보통 5분을 넘기지 않는다. 대화의 시작은 보통 '별일 없었어?' 다.


'미안해! 별일 있어.'


며칠 전 아내가 불쑥 말했다. 별 일이 있다니, 별 일도 다 있다!


***


아내의 직장은 집에서 가깝다. 바삐 걸으면 10분, 천천히 걸으면 15분 정도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내는 집에서 굴러다니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스포첵에서 떨이하던 접이식 미니벨로였는데 튜브 고무가 경화되어 앞뒤 모두 순차적으로 빵꾸가 나고 말았다. 유튜브에서 튜브 바꿔 끼는 걸 공부한 후 월마트에서 튜브를 사서 바꿔줬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아내의 출퇴근은 즐거운 자전거 라이딩이기도 했다.


어느날 아내가 지인을 만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갔다. 식사를 하기 위해 자전거를 외부에 묶어놨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체인을 끊고 훔쳐가 버렸다. 튜브를 바꿔준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말이다.


그래서 별 일 없던 일상에 별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어차피 겨울도 다가와서 내년 봄에 새로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아내의 직장과 스포첵이 제휴하여 최대 70%까지 할인이 가능한 쿠폰이 나왔다. 아내는 이 쿠폰으로 자전거를 사기를 원했다. 알맞은 자전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포첵에 가봤다. 별로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아내에게 미니벨로를 사 주고 싶었다. 그런데 단거리 출퇴근을 위해 샤방샤방 타기에는 너무 거창한 자전거들 뿐이었다.


아내가 자전거를 당장 원하는 것 같아서 다른 매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캐나디안타이어에서 560불 정도 하는 접이식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존에서도 800불 대의 자전거를 390불 정도에 세일 하고 있었다.



아마존에 주문을 했더니 이틀 만에 왔다. 공장에서 막 보내 준게 맞다. 하나도 세팅이 안 되어 있었다. 브레이크를 조정하고 타이어의 중앙을 맞추는 작업등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냈다. 허리가 끊어질듯 아팠다. 초보자의 세팅이라 크게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시운전을 해보니 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내가 퇴근해서 자전거를 보더니,


'싸구려네!'


했다. 상처 받았다.


사실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뒷 기어는 시마노 7단이지만 앞 크랭크가 너무 작아서 전혀 속도가 안날것 같다. 즉 최고속도에 크게 제한이 있다. 단거리 출퇴근 이외의 레저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도 걸어 다니다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아내가 만족해 한다.


며칠 후 아마존과 캐나디안 타이어 사이트를 보니 가격이 변동되어 있었다. 아내의 자전거는 500불대로 가격이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캐나디언타이어 자전거는 320불대로 떨이 중이었다.




아내에게 이걸 말하니 당장 그걸 내 자전거로 사자면서 캐나디안타이어로 가자며 일어났다. 매장에서 직접 본 자전거는 예상 밖으로 꽤 고급져 보였다. 아내가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역시 아내는 반짝반짝 광나는 소재 보다 무광택의 물건을 더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도 블랙 무광택 프레임이 더 고급져 보인다. 나는 탈 시간도 별로 없어서 사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의 강권에 의해 결국은 사고야 말았다.


이모저모 뜯어 보니 아마존에서 산 것 보다는 몇 등급 위다. 뒷 기어 뿐만 아니라 스프라켓과 변속 레버도 시마노 부품이였다. 앞 크랭크도 꽤 커서 속도도 잘 나올 것 같았다.


무척 오랜만에 내 미니벨로가 생겼다. 신난다.


다음날 아내가 출근한 사이, 혼자서 새 자전거를 타고 보우강까지 내려가 강변을 달리다가 올라왔다. 집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을 낑낑거리다가 결국은 끌바를 하고야 말았다. 내가 소싯적에는 절대 업힐에서 포기하지 않는 사나이였는데, 늙어버리고 말았다. 노즈힐 언덕을 한 번도 안쉬고 올라가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래도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니 너무 좋다. 한국에서 가져온 다혼-like 한 미니벨로를 잃어버리고 한동안 안타다가 아내 때문에 또 자전거를 타게 됐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행복을 다시 찾았다.


***


아마존의 그 자전거는 지금은 또 499 불이 돼 있네. 왜 가격이 자꾸 바뀌지? 그런데 이거 사실 바에야 캐나디안 타이어의 320불대 자전거가 훨씬 더 좋습니다. 참고하세요.


자전거 1) 유레카! 드디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어릴 때 조부모에게 위탁 됐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산골짜기에서 살았다. 할머니께서 갑자기 편찮으셔서 서울에 홀로 살던 모친과 같이 살게 되었다. 심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던 촌놈이 갑자기 깍쟁이 서울내기들과 어울리게 됐다.


산골짜기를 뛰댕기던 놈이 갑자기 골목길을 뛰어다니게 생겼다. 나의 첫 번째 문화 충격은 자전거였다. 웬만큼 사는 녀석들은 자기 자전거가 있었다. 산동네 살거나 형편이 여의치 않던 애들은 동네 자전거포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놀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자전거를 그때까지 못 타봤다. 갑자기 자전거가 타고 싶어 졌다.


용돈을 모아 자전거포에서 1시간 아동용 자전거를 빌렸다. 당연히 넘어졌다. 이리저리 시도해 봤지만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두 바퀴로 균형을 잡는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이리저리 까진 무릎을 부여잡고 1시간 후에 자전거를 돌려줬다.


며칠 후에 또 자전거를 빌렸다. 혹시 남이 볼세라 후미진 곳에서 혼자 열심히 연습했다. 누가 뒤에서 잡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런 사람도 없었다.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또 실패했다.


이판사판 삼세판이다. 며칠 후에 또 자전거를 빌렸다. 한 다리를 땅에 딛고 또 한 발은 페달을 밟고서 앞으로 쭉 가다가 중심을 잃고 비틀비틀 하다가 다시 서기를 반복했다. 정신없이 자전거를 부여잡고 방황하다가 길이 갑자기 경사진 곳에 다다랐다. 자전거가 제자리에 서질 못하고 앞으로 쭉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겁을 먹고 어어어 하며 핸들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어라? 안넘어 지면서 쭉 내려가는 것이었다.


유레카! 드디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내 소년기의 엄청난 성취 중 하나였다. 이후 용돈이 생길 때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놀고는 했다. 하지만 이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들보다 성장이 빨라서 키가 커졌다. 더 이상 아동용 자전거를 빌리기 힘들어졌다. 동네 자전거포에 한시간씩 빌려주는 성인용 자전거는 없었다.


이후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 익힌 자전거 타는 방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때 친구 하나가 집에서 쌀장사를 했는데 그 집에서 쌀 배달용 짐 자전거를 타봤다. 마지막으로 아동용 자전거를 탄지 7, 8년이 지났었지만 스무스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 줄 때를 즐겁게 기다렸다. 나는 비록 내리막길의 힘을 빌려 겨우 자전거 타는 방법을 홀로 깨우쳤지만, 내 아이는 내가 뒤에서 안장을 잡아 주며 친절하게 가르쳐 줄 작정이었다.


아이가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참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뒤를 잡아 줄 새도 없이 아이는 두 세 번 만의 시도 끝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무런 일도 아닌 듯 지나가 버렸다. 나는 사흘이나 걸렸는데 아이는 10분도 안 걸렸다. 시련도 없고 감동도 없다. 이 순간을 혼자서 기다려온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기사 어릴 때부터 보행기니, 세발자전거니, 킥보드니, 롤러블레이드니 바퀴 달린 장난감과 친했던 아이니 자전거도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흥! 쳇! 모든 일이 이렇게 쉬워 버리면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이 안 만들어 지잖아!


그나저나 아내는 자전거를 어떻게 배웠을려나? 장인어르신이 뒤를 잡아주셨을려나? 처형이나 형님이 가르쳐 주셨을려나? 집에 가면 물어봐야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