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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최대의 섹스 스캔들,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

 (사진 : 목욕하는 밧세바와 훔쳐보는 다윗)


혹시 제목 때문에 불편하실 분도 있으실텐데, 실제 독실한 기독교 신자분께서 붙이셨던 제목임을 알려드립니다.


꽤 오래전에 어떤 사이트에서 놀던 때의 일입니다.


무척 분위기가 좋아서 저도 이것저것 글을 올리며 댓글을 달아 주시는 분들과 즐겁게 대화하곤 했죠. 뭐 성경에 대한 얘기를 하는 분이 좀 계셨습니다만, 저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저는 무신론자 이지만 성경이야기 좋아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분이 이 글의 제목과 같은 내용으로 다윗과 밧세바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속죄와 회개 그리고 기독교의 용서와 구원 같은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뭐 대충 다윗의 회개와 용서는 이렇게 중차대한 것인데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너무 기독교를 모독한다, 그런 뉘앙스 였죠.


갑자기 뭔 얘기인가 궁금해 하실 분을 위해서 지금부터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를 좀 풀어 보겠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100% 정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윗은 바로 '다윗과 골리앗'에 나오는 그 다윗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이후 승승장구한 다윗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됐죠.


어느날 다윗왕은 우연히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다윗왕은 한눈에 사랑, 아니 육욕에 빠져서, 그 여자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고는 겁탈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다윗의 부하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명령으로 멀리 전쟁터에 나가 있었죠. 자기 부하를 전쟁터로 보내 놓고는 그 아내를 강간한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다윗의 강간으로 인해 그만 아기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를 어쩌나 고민하던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소환합니다. 우리아가 밧세바와 동침하면 뱃속의 아기는 그냥 우리아의 아기가 될 것이니 일종의 완전 범죄를 획책한 겁니다. 이건 뭐 뻐꾸기도 아니고…


하지만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고 자기 부하들과 군영에서 숙식을 해결합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자기만 집에 갈 수 없다는 거였죠. 다윗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다윗은 전쟁터의 총 사령관에게 비밀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아에게 돌격을 시키고 후속 부대를 철수 시켜서 우리아를 전사하게 만들라는 거였죠. 다윗은 이 명령서를 우리아에게 들려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참 잔인하죠.


이 계획은 멋들어지게 성공합니다. 우리아가 죽은 후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중 한명으로 삼습니다.


얼마 후 야훼의 말을 전한다는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 다윗이 한 짓을 비난 하지요. 그리고 이 죄로 인해 야훼가 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잉태된 아기가 죽고, 다윗의 집안에 칼이 들어설 것이요, 다윗의 아내들이 이웃들에게 공개적으로 겁탈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다윗은 그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러자 나단도 즉시 야훼의 말을 전합니다.


'야훼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오. 당신은 죽지 아니할 것이요.'


성경에 흔히 등장하는 패턴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뭐 그런 거죠.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윗의 즉각적인 회개와 나단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점 등등을 거론하며 다윗이 진심으로 회개했다고, 훌륭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야훼도 즉시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겠죠.


재미있는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야훼는 그 즉시 다윗을 용서했지만 죗값은 꾸준히, 빠짐없이 내립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아기가 태어나고 칠일 만에 죽습니다. 다윗의 집안에 칼이 들어옵니다. 아들 중에 한 명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의 아들들을 죽여 버립니다. 잔혹한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인 다윗의 후궁들, 즉 자기 의붓 어머니들을 공개적으로, 백주대낮에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해버립니다. 여차저차해서 다윗은 압살롬까지 죽여야 했습니다. 이 내전의 와중에 죽은 군사만 수만명이 넘습니다.


나단이 예고했던 야훼의 모든 처벌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죠. 야훼의 용서는 뭔가 우리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용서와는 다른 기준인 거 같습니다. 말로는 용서라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복수를 당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회개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야훼께서 죄는 사하실지언정 어떤 방식으로든 그 몇 배나 되는 죄값을 준다는 것이죠. 


이런 글 이후로 많은 분들이 댓글을 쭉 달아주셨습니다. 즉시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느니, 진심으로 회개한 다윗의 훌륭한 점이라느니, 회개의 엄중함 이라느니, 일반인들이 기독교의 회개에 대해서 오해 한다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당시 고문기술자 이근안인가 누군가 흉악범이 회개하고 목사가 되어 시끌시끌 할 때였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신 분들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삐딱한 저는 이 댓글들에 대해서 하나도 동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요? 저는 사랑이 전혀 안 보입니다. 그냥 보통때의 불쾌하고 끔찍한 야훼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 같으면 그냥 슬쩍 나가 버리지만, 그간 댓글을 나누며 좀 친해진 바도 있어서 대화에 끼어들어 무심코 질문을 하나 했죠.


'저, 지나가는 무신론자입니다만 잠깐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런지요. 저는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의 도구로 사용되어진 사람들이 참 불쌍합니다. 세상 구경 못 하고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 느닷없이 죽어버린 다윗의 아들들, 갑자기 능욕당한 다윗의 후궁들은 무슨 벌을 받는 건가요?'


활기차게 일어나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겼습니다. 물론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가 없었죠.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저는 얼마 후 그 사이트를 조용히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대부분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믿고 계시죠. 회개와 용서 그리고 죗값의 표본처럼 일컬어지는 일화입니다. 인터넷에서 다윗과 밧세바를 검색하시면 정말 많은 목사님들로부터의 설교 내용이 있습니다. 주로 즉시 회개를 한 다윗을 구구절절하게 칭찬하는 내용이죠. 하지만 제 의문을 풀어 주는 설교는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에서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진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용기내어 대놓고 물어 보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올린 저 질문에 답변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이***에는 계실까요? 갓 태어난 아기는 왜 칠일 동안 고통속에 울다가 죽어야 했을까요? 다윗의 아들들은 왜 죽은 걸까요? 다윗의 아내들은 왜 의붓 아들에게 강간을 당해야 했을까요?


도대체 저는 왜 이 이야기에서 여러분들 - 기독교 신자 분들 - 처럼 하나님의 사랑이라던가 다윗의 훌륭한 점이라던가 기독교식 회개와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만약 이 사건을 인간의 법으로 처리한다면 다윗은 위력에 의한 강간, 공권력 남용, 살인 교사 등의 혐의로 처벌 받을 겁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회개는 전혀 참작 되지 않습니다. 밧세바는 아마도 처벌불원서를 낼 것이고, 다윗도 부자이니 쉽게 형사 합의를 할 수 있겠죠. 징역 5 년도 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다윗은 얼마간 감옥에 갇히겠죠.


뭔가 한 짓에 비해 처벌이 약한듯 합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태어난 아기도 살고 다윗의 아들들도 살 것입니다. 다윗의 후궁들도 의붓 아들에게 강간 당하는 치욕을 격지 않습니다. 내전 때문에 죽었을 수만명의 군사도 살릴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까요? 지금 현재대로 인간의 법으로 운영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신의 뜻으로 운영되어야 할까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먼저 열반에 드신 큰 선배님이시다. 불법에선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불교 수행자들은 부처님을 따라 열반에 드는 걸 목표로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선 고락이 윤회한다고 한다. 열반은 이 고락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한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 상태, 그게 열반이다. 부처님의 표정이 바로 열반의 미소다.


고란 괴로움이다. 락이란 즐거움 혹은 행복한 상태다. 즉 불교에선 행복한 상태 마저 좋은 것으로 보는게 아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건 타당하다.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르듯, 큰 즐거움에는 곧 큰 괴로움이 뒤따른다.


듣기 좋은 음악을 처음 들으면 즐겁다. 하지만 이 음악이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면 세상 듣기 싫은 소음이 된다.


맛있는 음식도 언젠간 질린다. 보자마자 침이 질질 흐르는, 마블링이 훌륭한 한우 스테이크도 하루 세끼씩 일주일만 먹게 되면 보자마자 구역질이 나온다.


술마시며 늦게까지 즐거운 밤을 보내면 다음 날 숙취 때문에 하루를 망치게 된다. 마약을 하며 강력한 쾌락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순간 중독되어 인생 자체를 망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되면 즐겁지만 어느날 그 사람과 이별할 때 큰 괴로움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즐겁지만 어느날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거나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면 부모는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괴로움에 떨게 된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들은 모든 인연을 끊고 출가한다. 즉 고와 락의 원천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는 물론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출가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경구로 유명한 한국 선불교의 거승, 성철스님도 노모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출가했다. 성철스님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러 절에 찾아왔을 때 성철스님은 노모에게 돌팔매를 던지며 숲으로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부처님과 성철스님은 불교의 창시자 이시고 불교계에 큰 자취를 남기신 이름이기에, 부모 자식을 져버리고 출가한 것이 수행을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일컬어 지지만, 나같은 속세의 소인배가 같은 짓을 한다면 세상 책임감 없는 후레자식이 된다.


깨달으신 후 부처님이 고향에 방문하셨을 때, 부처님은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의 머리를 깎이고 출가를 시켜 버렸다. 또한 성철스님도 아기때 헤어졌던 딸이 성장하여 암자로 아버지를 보러 왔을 때, 즉시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를 만들어 버렸다. 깨달으시거나 불법의 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렇게 좋으신가 보다. 그런데 이렇게 다 출가를 해 버리면 소는 누가 키우나? 아마 나 같은 소인배의 몫이겠지!


여튼 불교에서 열반에 이루기 위한 첫 걸음으로 꼽는게 욕심을 버리는거다. 다른 말로 집착을 없애는 거다.


나는 축복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포기에 익숙했다. 즉 집착하지 않는다.


대학 신입생 시절, 통과의례와도 같은 미팅에 여러번 참석했다. 나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에, 가난뱅이에, 못생기고 땅달보다. 여러번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 여자와의 인연을 완전히 포기했다. 더 이상 파트너로 지정된 여성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는게 싫었다.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걸 각오했다. 여학우들과 후배들에게 데면데면 대했다.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자 쪽에서 먼저 나와 사귀기를 청해 오는 경우가 생겨났다. 심지어 두 여자가 나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다. 학창시절 남부럽지 않은 연애 생활을 보냈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오면 오고, 가면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점점 줄어 갔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에, 가난뱅이라는 현실이 여자분들이 다가오기에 주저 되었을 것이리라. 그런데 갑자기 꿈에서나 나올법한 여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가족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에게 시집왔다. 아직까지 그녀는 나와 한솥밥을 먹고 같은 이불을 덮는다. 어? 얘기가 왜 이리로 흘렀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나는 절대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나의 스탠스는 항상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달복달 하지 않는다. 그냥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절대 업무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남들보다는 화려하게 보냈다. 전반적으로 행복한 직장 생활을 했다. 뭐 지금은 트럭 운전을 하고 있지만… 캐나다까지 와서 트럭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집착을 버리라는 이 가르침은 놀랍게도 기독교에도 똑같이 있다. 바로 찬송가 구절,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 구절의 기원은 이렇다.


유럽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800만명 넘게 살육 잔치를 벌이던 때의 일이다. 한 목사가 있었다. 그가 외출했을 때 카톨릭 교도들이 들이닥쳐 그의 집을 불태우고 두 아들을 죽였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가 불에 타 무너진 집과 참혹하게 시신으로 변한 두 아들을 보고 기도했다. 그 기도의 첫 구절이 바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다.


기원이야 어떠하든 이 구절은 찬송가로 불리며 기독교 전반의 설교와 기도의 주요 주제가 됐다.


절대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빌지 않는다. 사업의 성공을, 취업을, 시험 합격을 간절히 빌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하고 다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다. 그러면 불교의 '집착을 탁 놔 버려라.' 와 일맥상통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간절히 원하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더더욱 괴로움에 빠지고 만다. 간절히 원하던게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위에 밝혔다시피 더 큰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뭔가 큰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큰 기대조차도 욕심이고 집착이다. 큰 기대를 가지고 원하는 직장을 구했다 해도 기대와 부합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될 수 있고, 동료나 상사와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기대와 현실이 어긋나서 어렵게 구한 직장을 곧 그만두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집착을 버리면 원하던 직장을 구하지 못해도 괴로움이 없다. 직장을 얻었어도 기대를 하지 않으므로,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보다 훨씬 편안하고 원활하게 직장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간절히 원하지 않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괴로움이 없다. 마치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영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집착을 버리고 그냥 그 장소를 떠나면 그만이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집착을 탁 놔 버려라' 혹은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인생 모토는 지금껏 훌륭하게 작동했다. 집착을 버림으로써 언제나 편안했다. 일종의 고락을 벗어난 행복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런 얘기를 얼굴 뻣뻣이 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역린! 용의 온몸에 덮인 비늘 중 딱 하나 거꾸로 달린 비늘! 용의 유일한 급소! 누구라도 역린을 건드리면 죽는다. 아무리 유순한 용이라도 누군가 역린을 건드리면 미쳐 발광하며 세상 끝까지 쫓아가 그자를 죽인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내가 내 역린이였을 줄이야!


최근 올린 글에 어떤 분이 댓글로 내게 일침을 주셨다. 그걸 계기로 내 내면을 돌아봤다. 내 안에서 역린이 건들여져버려 화가 난 흑염룡이 아직 꿈틀대고 있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 중이다.


올 겨울 처음 ***에 왔을 때, 대통령 선거 후에 난장판이 된 게시판을 둘러보고,


'여기 사람들은 서로 싸우려고 글 쓰네? 왜 이렇게 서로의 화를 돋우려고 하는 글들을 쓰지?'


라고 생각했다. 역린이 더럽혀진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글들을 쓰고 있다. 완전히 흑화 되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예전의 유순했던 나를 되찾기 위해 ***을 떠나야 될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무거워 졌다. 밝게 끝내야지.


요 몇 년간 불교 쪽 자료들을 들척거리며 어리숙한 보살 흉내를 냈었는데 최근 내 수준을 스스로 깨우친 바가 있다. 최근의 사태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아내를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향한 내 집착은 확고하다. 나는 절대 열반에는 이루지 못할듯 하다. 아니, 열반은 커녕, 보살행의 발끝에도 못미친다.


이 행복의 끝에 어떤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두렵기도 하다만 지금은 그저 아내와 함께, 부처님은 잠시 잊어 버리고, 그저 두 마리 무소의 뿔처럼, 아내와 손잡고 둘이서 가야지. 히히…


그런데 이 글의 주제가 도대체 뭐였지?


지옥과 천국에서 영생을 살아보자


 

최근 어떤 독실한 기독교 신자께서 나에게 영생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라 하셨다. 그래서 잠깐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의문이 생긴 걸 그분께 여쭤봤더니 막상 그분은 영생에 대해서 잘 모르신단다. 김이 새버렸다. 그래도 잠깐 생각한게 아까워서 여기에 끄적거려 본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영생이라는게 있다. 영원히 산다는거다. 천년도 아니고 만년도 아니고 45억년도 아니고 138억년도 아닌 무려 '영원' 이다. 여기서부터 난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영생을 하는 장소는 두 군데가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천국과 지옥이다. 나는 당연히 지옥에 갈 것이니 일단 지옥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자.


지옥은 지금까지 살았다가 죽은 사람,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서 갈 곳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하시니, 생전 예수에 대해서 들어 보지도 못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몽땅 지옥에 갔다.


즉 대략 서기 1세기 초부터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오기 전 19세기 말까지 약 1900년간 한반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있다. 뭔가 상당히 불공평한 것 같지만 그들의 교리가 그렇다니 믿어야지 뭐!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자. 이런 불공평한 일이 한반도에만 있었겠는가. 유럽과 중동 일부를 빼고, 대항해시대 이전의 전세계 사람들은 하여튼 몽땅 지옥에 쳐박혔다.


AD 1년부터 AD 1900년 사이에 예수라는 존재를 알 방도가 없었던 인도인, 남아시아인, 중앙아시아인, 동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남아메리카 아즈텍인과 마야인, 아프리카인, 호주와 뉴질랜드 원주민, 폴리네시아인, 이누이트인 등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몽땅 지옥에 가서 바글바글 할거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들에게 이산가족은 없으니 이건 하나의 장점이다. 예수 출현 이후 지금까지 유럽이나 중동인들은 가족이나 연인이 천국과 지옥으로 찢어져서 생이별을 했을 것이다. 불쌍하다.


누가 천국에 갈지 선택하는 것은 기독교 신의 권한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로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그/그녀가 결국 천국에 갈지 안 갈지는 확정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원토록 헤어지고 싶지 않은 연인이 있다면 절대 기독교 근처에는 발도 들여서는 안된다. 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어떠한 역경이라도 헤쳐나갈 작정이라면 역시 기독교 쪽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안그러면 천국과 지옥으로 뿔뿔이 영원토록 생이별을 하게 된다.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황불에 빠져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장소라는 이야기도 있고, 춥고 외롭고 배고픈, 하여튼 불행이 철철 넘쳐 흐르는 암울한 장소이다. 여기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 인간이 만든 형무소에 있는 형기 라든가 가석방, 사면 같은 건 지옥엔 일체 없다. 그저 영원히 불행해져야만 하는 벌을 받는 것이다.


나는 아마 여기 가면 영원히 욕을 큰 소리로 고래고래 지를 것 같다. 어차피 후회하고 참회하고 모범수로 살아도 형기 감면이나 사면 같은 희망이 절대 없다. 그러니 욕이나 할 밖에. 예수 이 나쁜 놈아 나와 봐, 나랑 얘기 좀 하자. 여호와 이 썩어 빠진 놈아, 쌍판떼기 좀 보자. 뭐 이런 거겠지. 아마 나 뿐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지옥 주민들이 이런 악다구니를 쓰고 있을거다.


아마도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욕지거리를 들으며 쾌감에 몸을 떠는 변태 메조키스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천국에 가보자.


나는 천국에 갈 확률이 0% 이니 여기선 가상의 인물을 세워 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평생 낮은 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진짜 천사같은 사람이 천국에 갔다고 치자. 아마도 천국의 인구밀도는 상당히 낮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 그가 평생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천국에 없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이 이타적인 천국 주민은 그가 이승에서 만났던 친구, 동료, 연인, 가족들이 현재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걸 자각했다. 이 천사같이 착한 천국 주민은 과연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혼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 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기독교의 지옥에 대해 법정스님이 했다는 말이다. 아마 위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차라리 지옥에 가서 고통받는 불쌍한 영혼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하지는 않을까?


이런 부작용을 방지할 방법이 있다. 바로 이 선한 천국 주민의 인성을 바꾸거나 기억을 없애 버리는거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 이 사람은 현생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잃고 천국에 와야 한다. 혹은 아예 지옥 같은건 떠올리지 못하게 약간 바보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그래야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거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이타적이고 선하며 남들을 돕고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로지 현재 천국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영원한 행복만을 누리는, 뭐 그냥 배부른 필론의 돼지가 되버렸다.


어차피 상상이니까 좀 더 가보자. 내가 죽어서 기적적으로 천국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난 행복한 상태로 뒤따라올 내 사랑하는 아내를 기다리겠지.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도 아내가 안온다. 아내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고 있다고? 그 순간부터 난 천국에서 지옥을 맛보는 상황이 될게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신은 아마도 아내에 대한 내 기억을 없애야 할거다. 갑자기 벌써부터 엄청나게 슬퍼진다.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 아내가 처음 내게 사귀자 할 때의 기적 같은 순간, 아내와의 첫키스의 추억, 항상 내게 보내주던 아내의 미소, 나를 부르는 감미로운 그녀의 목소리, 대용량 배낭을 메고 함께 지리산, 설악산, 히말라야를 누볐던 추억들, 네팔과 인도를 여행했던 기억들, 캐나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로드트립한 추억이 모두 사라지다니…


나는 온전한 내 기억을 가지고 차라리 지옥으로 갈란다.


결국 천국은 기억을 삭제 당하고서, 무슨 일이 있던 히히헤헤 할 수 있는 저능아들이 수용된 동물원에 불과하다. 이렇게 바보가 된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신은 흐뭇해 하고 있을거다.


완전 텔레토비 동산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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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레이드 러너중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a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난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봐 왔어.

오리온의 어깨에서 불타오르는 강습함들.

탄호이저 기지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C-beam들.

그 모든 기억이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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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이 바로 나다. 천국에 가는 조건이 기억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건 또다른 죽음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천국에 사는 그 물건은 절대로 내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지옥은 신의 피가학적 변태 성욕을 채우기 위한 장치같다. 또 천국은 그냥 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을 풀어놓은 동물원으로 생각된다.


그 애완동물은 신에게 충성스러웠던 인간을 선택해 개조한, 사람을 닮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닌, 항상 바보처럼 헤헤거리며 아무 이유도 없이 마냥 행복해 하는, 뭔가 이상한 존재라고 여겨진다.


생각할수록 이 기독교의 신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악취미를 가졌다.


끔찍한 야훼, 여호와, 알라 그리고 그 맹신도들

 


<주의 : 기독교를 심하게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 광신자들을 본다.


지구 어딘가에 천재지변이 발생 했을 때 목사라는 인간이 이게 바로 신의 천벌이라고 설교한다.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의 빈곤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가족을 잃고 망연자실한 가장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를 보면서 이런 망발을 한다.


정치무대 진출을 꿈꾸는 일부 기독교 광신도들은 집권 이후에 노골적으로 무신론자나 이교도들을 무인도에 가두고 헬리콥터로 컵라면이나 떨어뜨리겠다고 말한다.


사찰 대웅전의 불전을 훔치고 불상 앞에 용변을 보는 파렴치한 기독교인도 있다. 불상 훼손이나 낙서 등은 일상다반사다.


또한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혐오의 말을 쏟아 붓고 검증 되지도 않은 헛소문을 퍼트리는 기독교인들도 많다.


나 또한 자주 기독교인에게 느닷없이 죄인이라고 욕 먹거나 지옥에 간다고 저주를 받는다.


이들이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봤다. 결론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을 닮았다는 거다. 이들이 믿고 있는 야훼, 여호와, 알라가 바로 질투와 증오와 혐오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먼저 십계명을 보자.


10개의 계명 중 처음 세 개가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이다. 이 야훼는 자기밖에 모른다.


일.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이.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마라.

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이 여호와는 첫 계명부터 질투로 시작한다. 그의 추종자들이 떠나갈까봐 겁나나 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우리 일반인이 보기에는 딱히 와 닿지 않는 내용인데 하여튼 자기 형편만 살피기 바쁘다.


나 같으면 첫째 행복해라, 둘째 안심해라. 내가 지켜 주마, 셋째 서로 사랑하라, 뭐 이런 정도로 덕담을 하고 싶은데 말이다. 이처럼 알라는 내부적으로 뭔가 상당히 불안해 보인다.


이러한 야훼의 불안한 면모는 아브라함에게 행한 시험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이 진짜로 자신을 믿고 있는지 불안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하고자 그의 아들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완전 소시오패스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이 물건도 미쳤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까 진짜로 그렇게 한다. 늦둥이 아들 이삭을 불태워 죽이려고 한 것이다. 알라나 아브라함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나 같으면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하며 버팅겼을텐데 말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선조다. 유대교에선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에서는 자기들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세 종교 모두 존속 살인 미수범을 조상으로 모시는거다. 골 때린다.


아브라함은 이들 종교인들에게 따라야 할 모범이다. 따라서 기독교 광신도들은 누군가 귓속말로,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지금부터 신앙심을 시험 하겠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네 아들 - 혹은 딸, 아내, 부모, 형제 등등 - 을 죽여 제물로 바쳐라.'


하면 기쁜 마음으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끔찍할 따름이다.


이 야훼라는 작자가 그가 선택한 민족에게 내린 명령과 그들이 해버린 짓을 보자.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기 20:16~17, 공동번역성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전하였다. "야훼께서 나를 보내시어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소. 그러니 이제 야훼의 말씀을 들으시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무엘기 상 15:1-3, 공동번역성서)'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여호수아 6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이건 뭐 여호와라는 작자가 히틀러보다 더하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도 젖먹이까지 죽여 버린다. 서슴치 않고 태연하게 민족 말살을 해 버린다. 야훼, 여호와, 알라가 증오와 혐오의 화신인 이유다.


그래서 이들 신의 맹신도들은 바로 그 신을 닮아간다. 여호와 명령의 키워드는 '죽여라' 다. 그래서 그 신을 믿는 사람들도 '죽인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를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서로 죽일 대상이 없으면 자기들 끼리도 죽인다. 기독교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이슬람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어 죽이고 죽이고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현재 신을 떠나서 인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끊임없이 죽이라고 말하는 그 신과 대부분의 우리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신의 질투와 증오와 혐오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사랑과 우정과 포용심을 가지고, 약자를 보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살육의 시대가 아니다. 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사회는 많이 성숙해졌고 좀 더 행복해졌다.


그런데 아직 신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화석과도 같은 사람들이 소수 있다. 바로 처음에 언급한 저 잔인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권력을 가지면 사회가 요동을 친다. 사회적 약자에게 증오가 쏟아진다. 핍박받던 성 소수자에게 혐오의 말을 쏟아낸다. 난데없이 아무 상관없는 일반인에게 성경의 권위를 들이댄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성경과 말씀이 아직도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최근 써갈긴 잡글의 댓글에 이런 분 중 한분이 '성경과 말씀' 을 들먹이며 동성애자에게 차마 상상하기조차 힘든 혐오의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여기서 성경 내용을 과도하게 까내린 이유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경이 더럽고 추잡하고 쓰레기 같은 내용이 가득 찬 종이뭉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들이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이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이 불쾌하고 끔찍한 존재일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제발, 그들이 따르는 그 질투와 증오와 혐오는 그들 끼리만 교회에서 나누고, 밖에 나와서는 우리의 사랑과 우정과 포용도 좀 배워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결국 다 그놈이 그놈이다



젊었을 때 읽었던 책의 내용이다. 책 제목이 태백산맥인지 남부군인지 기억도 안난다. 따라서 이 내용의 디테일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한국 전쟁 때 공산군이 전라도 지역을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공산당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국유화 했다. 기존 지주들에게 소출의 5할 이상을 소작으로 수탈당하던 소작농들은 공산당 치하에서 소작료가 크게 줄어들어 아주 기뻐하며 만족했다.


벼가 익어가면서 공산당 일꾼들은 소출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일일이 낟알을 세가면서 예상 수확량을 산정했다. 그리고 일종의 납세 예정 통지를 농민에게 알려줬다. 냇가의 삼식이네는 다섯가마, 언덕배기 돌쇠내는 여섯가마, 뭐 그런 식이다.


문제는 쌀이 아니라 콩에서 발생했다. 당시 소작농들은 논가나 논두렁등 자투리땅에 콩을 심었다. 지주들은 높은 소작료를 받는 대신 이 콩은 건드리지 않았다. 즉 콩 수확은 모두가 소작농의 몫이었다. 그런데 공산당 일꾼들은 이것도 납세의 대상으로 삼았다. 농민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공산당 당사로 떼거지로 몰려가 항의했다.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공산당 간부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내가 젊었을 때는 농부들이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이 소설 필자의 논조도 이와 비슷했던걸로 기억된다. 하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 나는 공산당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공산당이 납세의 대상으로 삼은건 단순히 콩이 아니었다. 민초들의 간장과 된장을 느닷없이 뺏어 가려 한 행위였다. 만약 농부들이 콩을 소작으로 낸다면 그들은 몇 달간 간장과 된장 없이 맨밥을 먹어야만 했을 터였다.


세금을 깎아주는 방안은 즉시 시행해도 된다. 하지만 없던 세금을 만드는 새로 만드는 정책은 충분한 예고 기간이 필요하다.


아이, 씨~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이후 연결될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어져 버렸다. 망했다! 괜히 원작에도 없는 간장, 된장 얘기를 했다. 간장된장, 젠장!


여튼, 요지는 인간은 아주 작은 이익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유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이슬람은 자비와 관용의 종교였다. 그들은 점령지의 자치권과 문화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러한 자비와 관용이 바로 들불처럼 이슬람제국이 확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 받던 기독교인, 유대교인, 콥트교인,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슬람 군대를 해방군으로 여겼다. 이슬람의 통치 아래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의 종교생활을 자유로이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이슬람 치하의 이교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집트는 과거 거의 모든 국민이 기독교인이였는데 현재는 90%가 이슬람교인이다.


이슬람 치하에서 타 종교를 믿기 위해서는 단지 10% 의 인두세만 내면 됐다. 즉 무슬림은 매달 주민세 만원을 내는데 내가 알라를 믿지 않는다면 그냥 만 천원만 내면 됐다.


논두렁에 심은 콩을 온전히 차지하고자 하는 작은 욕심이 점차 종교의 신념을 넘어섰다. 내가 왜 옆집 무스타파 보다 천원을 더 내야 하는가. 그냥 알라를 영접하기만 하면 일 년에 쌀국수 한 그릇을 더 사 먹을 수 있는데... 이슬람 치하의 기독교인, 유대교인, 콥트교인,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무더기로 무슬림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개종으로 세수가 줄게 된 무슬림 정권은 한때 이교도들의 이슬람 개종을 금지 하기까지 했다. 즉 세금 때문에 새 신도를 받지 않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종교보다는 돈이 먼저였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진짜다.


'한손엔 칼, 한손엔 꾸란' 이라고? 다 들불처럼 번지는 이슬람교의 확장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꾸며낸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헛소리를 처음 말했다고 전해진다.


자발적인 이슬람 개종의 비밀은 단 10%의 인두세에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을 위한 또 하나의 이유.


최근까지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 미사는 오로지 라틴어로만 수행되었다. 현지 언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의결한 1960년대 중반 이후다.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들은 그저 의무적으로 교회에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미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무지렁이 농민들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잘 몰랐다. 아니, 오히려 이슬람 교리를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에서는 갑자기 사람이 신이 되고, 예수가 아들이 됐다가 아버지가 됐다가 신이 됐다가 다중이 놀이를 한다. 그들에게 Incarnation 과 Trinity 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실패 이후 등장해서 대성공을 거둔 무함마드가 대중에겐 더욱 매력적이었다. 사회 소요죄로 초라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와, 군대를 조직하여 자신이 쫓겨나온 메카를 다시 정복해 버린 무함마드! 이건 뭐 비교가 안된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종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창조주가 있고 메시아가 있고 최후의 심판이 있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 누가 보더라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라면 세금을 덜 내는 쪽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기독교도들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결론적으로 생각하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


주말마다 교회 가서 눈물을 흘리며 통성기도를 하는 독실한 크리스천 철수씨가 저쪽에서 태어났다면, 하루 다섯번씩 메카를 향해 절하며 기도하는 신실한 무슬림 핫산씨였을거다.


엄숙한 표정으로 동성애자들의 죄악을 가르치는 존경스러운 이슬람 지도자 이맘이 이쪽에 태어났다면, 역시 신망이 깊은 목사가 되어 동성애자들이 지옥에 처박히리라고 신도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길거리에서 확성기를 사용하여 '예수천국 불신지옥' 을 열불나게 외치는 저 기독교 광신도도 저쪽에서 태어났다면, 아프간 카불 시내에서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고 여자들에게 매질을 하는 바로 그 탈레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다 그놈이 그놈이다.


내가 기독교 광신도들을 잠재적인 살인마를 보듯 두려워 하는 이유





사진 1 : 호메이니 이슬람혁명 이전 이란 여성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

사진 2 : 1970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촬영된 여성들의 모습

사진 3 : 현재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모습


현재 대부분의 근대화된 나라에서는 종교가 일상과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된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언제든 종교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깊이 간섭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많은 종교 광신도들이 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의 일상생활에의 침투라는 퇴행은 최근들어 구체화되고 있다.


탈레반 치하에서 여성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여성 의사의 배출은 불가능하다. 역시 이슬람 원리주의 치하에서, 여성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몸을 보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여성은 병에 걸려도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냥 앓다가 고통 속에 죽어야만 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탈레반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거다.


재작년 6월 미국에선 여성의 낙태권이 사라졌다. 이제 미국 여성들은 인신매매에 의해서든, 근친상간에 의해서든, 강간에 의해서든 상관없이 임신을 했다면 출산 이외에 선택지가 없다. 50년 전 과거로의 회귀다. 트럼프가 임명한 보수적인 대법관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투철한 기독교 광신도들이다.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강제로 윤간을 당해 임신을 해도 이는 '하느님의 선물' 이니 낳아 기르라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겁탈당한 딸이 임신해도 이는 '하나님의 선물' 이니 낳아야만 한다.


광신도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일반인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들의 다음 타겟은 동성애자들로 예상된다.


한국에는 (사)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라는 기독교 산하 단체가 있다. 또한 정부부처 곳곳에 기독교 광신도들이 있다. 이들이 연합하여 10여년 전에 국제적으로 망신스러운 사건을 만들었다. 바로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서 시조새와 말의 진화에 관한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서울대와 한림원을 비롯한 여러 과학 관련 단체에서 항의했지만 당시 이명박 소망교회 장로 치하의 정부는 이들 과학자들의 말을 무시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적인 학술지인 네이처지에 대서특필 됐다.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

https://www.nature.com/articles/486014a


한국 과학자의 논문이 네이처지에 게재되면 곧 노벨상이라도 수상하게 될 듯 국내 미디어에 크게 소개된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건에 대해서는 조용했다. 네이처를 인용한 조롱에 찬 기사가 세계각국 미디어 여기저기에 게재되기 시작하면서 국내 미디어에서도 주목을 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 내부의 기독교 광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도 벼룩의 낯짝 정도는 있었나 보다.


한편으론 기독교 광신도들의 정치 무대 진입 시도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이들중 일부는 정권을 잡은 후 무신론자나 이교도들을 수감하거나 무인도에 수용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난 솔직히 겁난다.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나는 어느날 신성모독죄로 모가지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위 사진을 다시 보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예를 보자.


미국의 대법관이 꼴통 기독교도일 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자.


소망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독교 광신도들이 교과서에 저지른 뻘짓거리를 보자.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언제든 종교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기독교 광신도들은 끊임없이 나 같은 사람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해치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특징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자체가 화날때마다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그래서 기독교 광신도들과 이슬람 광신도들은 언제든 잔인무도해질 준비가 돼 있다.


기독교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서로를 약 천만명 단위로 잡아 죽였다(30년 전쟁). 이슬람도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를 잡아 죽이고 있다. 기독교의 이단으로 출발한 이슬람도 기독교와 티키타카 서로 살육전을 벌인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렇게 종교라는 물건은 평범한 사람을 눈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로 만든다.


착한 사람이 악행을 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선한 사람들도 광신도가 되면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죽여댄다. 이는 무구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내가 기독교 광신도들을 잠재적인 살인마를 보듯 두려워 하는 이유다.


동영상 : 기독자유당의 원내진출을 위한 통성기도 모습

K-POP, K-드라마, 그리고 진격의 K-기독교

동영상 : 통성기도의 예

(1분 40초 무렵부터 성령에 충만한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의 특징 중에 통성기도 라는게 있다.


연단에서 목사가 '주여- 주여-' 몇 번 큰 목소리로 선창 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열광적인 신도들은 두 손을 높이 올리거나 흔들어대며 각자 경쟁하듯이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어떤이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어떤이는 펄쩍펄쩍 뛰고 어떤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어떤이는 엉엉 큰 울음을 터트린다.


이 의식은 외부인에게는 참으로 기괴해 보이지만 신도들에게는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나도 처음에 이 광경을 목격했을땐 뜨악~ 했지만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 개신교의 저력임을 깨달았다. 집단 신내림, 즉 집단으로 성령이 충만함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양손을 뻗고 온 힘을 다해 단체로 하나님께 큰 소리로 기도를 하면 그들의 뇌 속에서 도파민과 엔돌핀이 용솟음친다. 바로 신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신도들이 간절히 원하는 천국을 문틈으로 잠깐 들여다 본 것과 마찬가지다.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신도들은 크나큰 카타르시스를 느낀 후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일주일 후, 재차 그 열락 상태를 만끽하고자 감사헌금을 가슴에 품고 다시 교회로 모여든다.


이 통성기도를 처음 정규 예배에 정착시킨 것은 순복음교회다. 통성기도를 무기로 순복음교회는 급성장을 하여 마침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를 여의도에 세웠다. 총 1만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꽉 채운 신도들이 동시에 통성기도를 올린다. 장관일 따름이다.


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한때 그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신도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주장하여 기존 한국 교단에서 이단으로 몰렸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이 발언을 취소했다. 이에 순복음교회는 이단 논란에서 벗어났다.


순복음교회의 눈부신 성장을 목격한 기존 교회들도 이를 벤치마킹 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 교회에서 통성기도는 거의 상수가 되었다. 교회들은 급성장을 하기 시작하여 대형 교회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 여의도 순복음교회 규모는 전 세계 3위 정도 된다. 아쉬워 할 것 없다. 세계 1위와 2위 교회 건물 모두 한국에 있다. 전 세계 50개의 초대형 교회 건물중 반절 정도가 한국에 있다. 가히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외국에서도 한국의 이런 기도 문화를 신기하게 주목하고 있다. 한국식 기도 - Korean prayer - 혹은 아예 한국 발음에서 유래한 Tongsung Kido 라는 복합어가 고유명사화 되고 있다.


한국의 이런 현실과는 다르게 유럽은 기독교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유서 깊은 교회나 성당 건물들이 디스코 클럽이나 레스토랑, 심지어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신 되고 있다. 이에 한국 교회는 유럽을 새로운 선교 사역지로 보고 있다.


한국 전도사와 목사들이 유럽에 개척교회를 세울 때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이 Tongsung Kido 다. 영국에서 한국 선교사의 도움 하에 서양인 목사가 한국어로(!) '주여- 주여-' 를 외치면 다양한 인종의 신도들이 양손을 치켜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언어만 다를 뿐 한국 교회에서의 통성기도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들도 한국의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함을 온몸으로 체험한 후 신실한 기독교 신자가 될 터이다.


K-POP, K-드라마에 이어 K-기독교가 유럽에 진출하는 중이다. 자랑스러운 Tongsung Kido 를 앞세운 K-기독교가 유럽을 위시한 전 세계에서 향후 어떠한 성취를 이룰지 귀추가 주목된다.


동영상 : K-기독교의 꿈나무들

오미크론과 바라나시 갠지스강의 추억




작년 초에 백신 주사 맞기 싫어하는 트럭 운전사들이 국경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을 때, 나는 오미크론에 걸려 골골대면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부스터샷까지 맞았는데 오미크론에는 장사 없더라.


2주가 지나서 업무에 복귀했는데 간이 항원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달 동안 목이 간질간질하고 갑작스런 재채기와 마른 기침 때문에 꽤 고생했다. 나중에 보니 롱 코비드라고 해서 드물지 않은 증상이었다.


간질간질 거리는 목과 마른 기침에 고생하면서 여러해 전 아내와 같이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를 거닐던 때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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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강은 힌두교인에게 신 그 자체다. 특히 가장 인기 많은 파괴의 신, 시바신이 바로 갠지스강이다. 어떤 말썽꾸러기 신이 인간들을 괴롭히려고 홍수를 일으켰는데 시바신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홍수를 멈췄다고 한다. 갠지스강이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그 위치에 바라나시가 있다. 바로 시바신이 인간을 위해 홍수라는 대재앙을 막아낸걸 상징한다고 한다.


죽음이 두려웠던 인도인들은 윤회라는 신박한 개념을 생각해 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육체와 분리된 불멸의 영혼이라는게 있어서 죽은 후 천국에 간다고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개인적으로는 힌두교의 윤회 개념이 더욱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힌두교도들은 현생의 모습이 전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현재 자기가 낮은 카스트를 가지고 비참하게 살고 있다면 전생에 지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음 생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현생에서 덕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소위 카르마 - 업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의 거지들은 뻔뻔하다. 동냥을 받으면서도 상대가 좋은 업을 쌓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여겨 당당하다.


누구나 후회를 하며 살아간다. 삶은 후회의 연속이다. 결국 사람은 살면서 나쁜 업을 쌓을수 밖에 없다. 죽기 전에 이 나쁜 업을 싹 없애 버리는 묘수가 있다. 바로 바라나시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고 거기서 화장하여 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바라나시 갠지스강은 힌두교인의 성지다.


오래전부터 난다긴다 하는 권력자와 부자들이 바라나시에 와서 죽음을 기다렸다. 그들은 강가에 큰 저택들을 지어 놓고 호의호식하며 죽음을 기다렸다. 그 건물들은 지금 호텔이나 여관 등이 되었다. 강가에서 좀 떨어진 뒷골목에는 싸구려 숙소들이 들어서 있다. 지금도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이 묵고 있다.


이런 시설들 양 끝에는 화장터가 있다. 계속해서 시체를 태우는 연기들이 피어오른다. 시체는 보통 천에 감싸여 꽃장식과 함께 화장터에 도착한다. 소각되고 남은 시체 일부는 강물에 버려진다.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버려진 꽃장식을 먹어 치운다. 떠돌이 개들 또한 타다 남은 시체를 찾아 돌아다닌다. 인도 전국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이 화장터 근처 강물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신다. 공기는 매캐하다.


바라나시에서 제법 괜찮은 호텔방을 얻었다. 창 밖으로 갠지스강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끔 원숭이가 창가 난간을 붙잡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천정에는 귀여운 도마뱀 몇마리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호텔 방에서도 화장터의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계속 목이 간질간질 했고 마른 기침이 나왔다.


+++


부처님이 갠지스강 순례에 대해서 한 말씀 하신 적이 있다.


'성스러운 강물로 목욕한다고 심신이 깨끗해지고 천상에 오른다면, 갠지스강의 물고기들이 제일 먼저 천상에 올랐겠습니다?'


인정!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그깟 동성애 하나를 못견뎌 하며 지옥 운운하고 자빠졌다

나는 사실 예수님을 그 어떠한 기독교 신자 보다도 더 철저히 믿는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직전에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셨다.


예수님 승천 이후에 종교지도자들은 모여서 성육신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냈다. 즉 예수는 우리처럼 밥 먹고 똥 싸고 방귀 뀌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신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우리를 창조한 신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셈이다.


성육신 개념과 더불어서 지도자들은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수립했다. 사실 예수는 하느님이면서 아버지이면서 아들이라는 것이다. 성육신 개념과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다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삼위일체 교리를 따른다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너희들을 용서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신을 잡아다가 죽였다. 하지만 신은 우리를 용서했다. 자, 이제 어떤게 용서받지 못할 죄인가. 신을 죽인 죄 보다 더 큰 죄가 무엇인가. 그런건 없다. 이것은 신이 더 이상 미천한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는 2천년 전에 이미 구원 받은 것이다. 신은 우리끼리 살아가도록 우리를 해방한 것이다.


그런데 괜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떠벌린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부정하는 것인가? 바로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불신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크나큰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했다. 원죄 따위는 이제 없다. 지옥도 없다. 에덴 동산에서 따먹은 선악과를 통해 깨우친 지혜로 우리는 사법 시스템을 만들었다. 우리 스스로 범죄자들을 단죄하며 꽤 근사하게 평화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아니 하나님은 선악과에 의해 얻어진 지혜로 우리 스스로 번성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잡아죽인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그깟 동성애 하나를 못견뎌 하며 지옥 운운하고 자빠졌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빙자해 종교사업을 하는 장사치들이다.


나는 비록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진실로 예수를 믿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 하셨다. 우리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속세에서 떠나셨다. 나는 선악과로 깨우친 지혜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죄짓지 않고 질서를 지키며,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바로 예수님이 바라신 그대로 말이다.


아멘!


기독교 광신도들과 예수님의 꿀밤

나는 공포영화를 못본다. 특히 도끼나 정글도 혹은 전기톱으로 사람을 썰고 다니는 고어 슬래셔 계열은 쥐약이다. 나는 이런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냥 독특한 취향을 가지셨구나, 하고 넘어간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과 영화는 함께 못보지만 다른 일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같이 일도 하고 족구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나에게 동성애는 바로 이런 공포영화와 같다. 절대 나의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거나 죄악시 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죄악인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지키며 사는 법전에 동성애 처벌 조항이 없다. 따라서 합법이다. 그쪽 취향인 분들은 거리낌 없이 서로 사랑할 권리가 있다. 캐나다에서는 법적으로 동성간 결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근거는 성경에 그렇게 써 있단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같은 사람들에겐 성경은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보다 효용가치가 없는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이들이 일반 사회에서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외치는 것은 동아리 회칙을 들고와 흔들어대며 헌법을 뜯어고쳐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민들의 총의로 만들어진 법전보다 자기네들이 믿고 있는 경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시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나는 동성애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가끔 동성애 퍼레이드가 벌어진다는건 알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억눌려 왔으면 저럴까 이해하는 편이다. 다시, 관심이 없으므로 퍼레이드의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교회분들이 말씀하시길 남자들이 똥꼬 팬티를 입고 채찍을 들고 돌아다닌단다. 나는 관심도 없는데 이분들은 참 해박하게도 잘 알고 계신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왜 이렇게 남의 잔치를 들여다보고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며 관심이 많으실까? 초대를 못받아서 화가 나셨나?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들을 보며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시며 그들을 용서하셨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예수님의 등짝에 채찍을 날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을 박아댔던 막시무스라는 이름의 로마 병사가, 지금 현재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살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우리 법에서도 죄악시 하지 않는 동성애자들을 지옥에 못보내서 안달이다. 도대체 영국 록그룹 퀸의 보컬이자 동성애자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예수님을 죽인 막시무스보다 무슨 더 큰 죄를 지었다고 지옥에 가야한다는 말인가. 예수를 못박아 죽였지만 막시무스는 이성애자라서 천국에 가고, 프레디 머큐리는 훌륭한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건가? 도대체 말이 안 되잖아!


일부 이슬람국가에서 동성애자들의 머리를 뎅강뎅강 자르는데 이들도 자신들의 믿음 아래서 그런 사회를 만들기를 원하나 보다. 중세의 제정일치 시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사고방식이다.


이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발언권을 얻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시민사회가 끊임없이 감시와 견제를 해야할 것이다. 이에 실패한다면 기독교의 이슬람화(오해하지 마시길!  여성의 지위가 인간과 가축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걸 당연시하는 탈레반같은 단체나 국가를 말함)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나같은 사람은 첫빠따로 종교재판을 받고 신성모독죄로 모가지가 떨어지겠지.


이들 광신도들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이 사람들 조차도 예수님에게 용서를 받을 거란 사실이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자들도 용서받았는데 용서받지 못할 자가 누구랴.


다만 나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예수님이 이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을 만나셨을 때,


'예끼 이놈들! 감히 나를 그렇게 옹졸한 신으로 만들다니!!!'


하시며 꿀밤 한대씩은 때려주셨으면 좋겠다.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동영상 : 법륜 스님이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은 현재 기독교 문화권에 있으며 그 문화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도 이것저것 성경에 대해 줏어들은 바가 있다. 어린 시절 성경 에피소드나 구약에 기초한 영화 - 십계,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것 - 를 볼 때마다 뭔가 불편한 마음이 참 많이 들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국 화가 잔뜩 난 신의 무차별적인 대량학살 활극이다.


도대체 왜 이 신이라는 존재는 이다지도 증오에 차 있고 걸핏하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죽여 대는가.


인용 시작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천진무구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기독교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 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인용 끝 :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저


아따, 그 양반 참 맛깔나게도 깐다! 리처드 도킨스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잘 표현해 줬다.


예수님이 출현하신 후 이 구약의 신은 완전히 변신한다. 증오와 질투의 신에서 사랑의 신으로 거듭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처자에게 물을 얻어 드시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단지 유대인만의 메시아로 태어난 것임이 아님을 드러냈다. 예수님은 기존 유대교회 안의 시장판을 뒤집어 엎어 새로운 질서가 필요함을 예고했다. 예수님에 의해 기독교의 신은 단지 한 부족의 수호신에서 벗어나서 보편적인 인류의 신이 되었다.


예수 승천 이후에 종교지도자들은 모여서 성육신이라는 개념과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정립했다. 이로써 과거의 잔인한 살인마 신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아들이면서 아버지이자 기독교의 신 그 자체가 되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걸 믿는다. 또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걸 믿는다. 먼 훗날 아마겟돈이 왔을 때 메시아로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실걸 믿는다.


주위에 기독교인들이 참 많이 계신다. 간혹 복음 전파에 너무 충실하셔서 아내와 나를 곤란하게 만드실 때도 있다. 집 안에 성경이 몇 권 돌아다니는데 전부 지인들께 선물 받은거다.


사랑의 예수님 이후에도 기독교에 선뜻 마음이 안가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원죄. 인간은 모두 죄를 짓고 태어난다. 이 죄는 예수님에 의해서만 씻어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 개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순진무구한 갓난아이를 죄인 취급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인간도 오래전에 폐지한 연좌제를 신이 지금껏 연연할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지옥. 기독교에선 흔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영원히 사람을 고통 속에 고문하는 장소라고 한다. 나는 사랑의 신이 이런 흉물스러운 장소를 만들고 사람을 고문해 댄다는걸 믿을 수 없다.


여튼 아내와 나는 기독교인과 더불어 살고 있다. 아내의 지인들은 '아이고 어쩌려고 그래~ 빨리 교회 다녀야지~' 라는 말을 하며 아내를 동정한다. 나 또한 '그러다 죽어서 지옥 간다' 라는 저주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뭐 그런 세상이다.

아, 우리집 패밀리닥터가 무슬림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상징물을 몸에 지니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십자가 목걸이나 묵주 같은 것들이다. 혹은 차나 집안 벽에 십자가 라든가 성경 구절을 걸어놓고는 한다.


어떤 종교는 아예 옷차림이 그 사람의 종교를 확연히 드러낸다. 시크교도 남자들은 터번을 쓰고 이슬람교 여자들은 히잡이나 부르카를 착용한다.


또한 특정 종교 의식을 행할 때 그 사람의 종교가 드러나기도 한다. 가톨릭 교도들은 식사 전에 수줍은듯이 성호를 긋는다. 무슬림들은 특정 시간이 되면 사람 눈에 안 띄는 구석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높이 들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한다.


내게 가장 생경한 종교의식은 한국 개신교인들이 하는 통성 기도와 방언이다. 크게 몸을 앞뒤로 흔들며 손을 하늘로 뻗고 '하느님 아버지' 혹은 ' 오 주여' 등등의 말을 하며 울부짖는다. 때로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눈물을 줄줄 흘린다. 하도 이질적인 의식이라서 서양인들은 이를 한국식 기도 - Korean prayer 라고 한다.


개신교인과 카톨릭, 그리고 시크교도들은 내 주위에 많은데 이상하게도 무슬림과는 별로 접촉이 없다. 물론 초창기에 영어 교육을 받을 때 여러 무슬림들과 가벼운 교류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무하다.


아, 우리집 패밀리닥터가 무슬림이다.


그는 흑인이고 영어가 네이티브가 아니다. 그냥 집 근처 아무 병원이나 가서 '패밀리 닥터를 정하러 왔습니다' 하고서 인연이 맺어졌다. 그 후 약 10년간 그가 아내와 나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몇 년 전에 그가 병원을 옮겼다. 우리 집과 꽤 떨어진 곳인데 우리는 그 닥터가 너무 좋아서 우리도 병원을 옮겨버렸다. 꽤 멀어서 가끔 그를 방문하는게 귀찮긴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명의를 보는 값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갑자기 찾아온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고생할 때,


'너 한국인니까 헬리코박터 검사 한번 해 보자.'


하고선 원인을 한 번에 잡아냈다. 과연 검사 결과 아내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있었고 이를 치료한 후 역류성 식도염도 드라마틱하게 완화됐다.


또 아내의 가족력에 따라 대장 내시경 검사를 선제적으로 진행했는데 여기서 큰 폴립을 발견하여 제거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집안에 우환이 생겨 아내와 떨어져 살았던 적이 있다. 아내는 한국에서, 나는 캐나다에서 홀로 지냈다. 그때 가벼운 우울증에 빠져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그래 넌 술 마시면서 뭐 하니?'


'뭐 그냥 음악 들어!'


'무슨 음악?'


'이것저것. 레드 제플린이라든가 퀸 같은거. 나 젊을 때 듣던 것들.'


'한국에서도 그런거 들어?'


'오, 예! 한국이 아마 캐나다보다 더 서구화 돼 있는 나라일걸?'


의사는 나를 정신과에 리퍼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듯 했다.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써 놓고 보니, 난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이 글의 주제는 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게 다 시간이 널널하게 남아도는 일정 때문이다. 끝.


종교의 탄생 - 카고 컬트





남태평양에는 수천개의 섬이 있다. 세계 2차대전 즈음에는 여러 섬에 석기시대 수준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이 원주민들은 천지개벽할 만한 기적을 목격한다.


갑자기 미군, 호주군들이 들이닥치고, 비행장이 여기저기 건설되고, 커다란 강철로 만들어진 새들이 날아다니고, 그 새 뱃속에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가지가지 물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쟁을 위한 군수 기지가 이곳저곳 섬에 건설된 것이다.


원주민들은 군인들이 나눠주는 신기한 음식을 맛봤다. 처음 먹어본 초콜릿, 도넛, 고기통조림과 밀가루 음식은 천상의 맛이었다. 군인들이 나눠준 알약을 먹으니 마법처럼 열이 내리고 아픈게 없어졌다. 군인들은 아무런 일도 안하는데 풍요로웠다. 그저 커다란 강철로 된 새들이 군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물자를 내려 주는 것이었다. 이 마법과도 같은 일은 원주민들의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썰물처럼 군인들은 사라졌다. 더불어 원주민들이 잠깐동안 누렸던 풍요도 끝장났다. 그들은 절망에 빠졌다.


원주민들은 강철로 만든 새들을 다시 불러 오기 위해 떠나간 군인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버려진 활주로를 정비하고 철거된 관제탑을 나무와 지푸라기를 이용해 복구했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어렵게 구해와 매일 아침 내걸었다. 소총 대신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제식훈련을 흉내냈다.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로 헤드폰과 무전기를 만들고 백인 군인들이 한것처럼 통신을 하는 흉내를 냈다. 또한 조종사의 고글과 헤드셋을 만들어 차고다녔다. 호주군이 주둔한 곳에서는 영국에서 유래한 오후 티타임을 모방하기도 했다. 이른바 카고 컬트 - 화물 종교 - 의 탄생이다. 이 의식들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한 섬에서는 존 프럼이라는 인물이 신격화 되고 있다. 어느날 원주민 마을에 나타난 이 인물은 섬을 조사한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과연 얼마 후 그는 많은 군인들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예의 비행장 건설과 강철의 새들이 날아다니는 기적이 시작됐다. 전쟁이 끝난 후 존 프럼은 마을 사람들에게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동료 군인들과 함께 섬을 떠났다. 섬의 원주민들은 존 프럼을 숭배하며 아직도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이후에 섬을 방문한 백인들이 존 프럼은 더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도 원주민들은 믿지 않았다. 벌써 수십년이 지나 그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도 원주민들은 완강하게 그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원주민 장로는 자신들의 신앙을 시험하는 백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도 예수라는 사람을 이천년 동안 기다리고 있지 않소. 우리도 당신들처럼 존 프럼님을 기다릴 뿐이요. 우리를 내버려 두시오.'


지금도 그 섬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을 계속되는 궁핍과 힘겨운 노동으로부터 구해줄 구세주, 존 프럼을 기다리고 있다.


캐나다 이민국의 블랙 리스트에 오른것 같다

 지난 2월 중순께 새 PR 카드를 신청했는데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거주 의무 일수를 못채워서 여러가지 보충 서류와 함께 제출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캐나다 이민국의 블랙 리스트에 오른것 같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올 때마다 트럭을 주차하고 멀찍이 떨어진 출입국 사무소까지 걸어 가서 따로 심사를 받고서 한참 시간을 허비한 이후에야 겨우 풀려난다. '너 어디 캐나다 이외의 곳에서 산 적 있느냐?' 같은 질문을 받고 내 여권을 꼼꼼히 조사한 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보내 준다.


땡볕을 맞으며, 혹은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출입국 사무소와 주차장 사이 꽤 먼 거리를 왔다갔다 시간을 낭비하니 화가 나고 짜증이 솟구친다.


아니, 사실은 전혀 화가 안난다. 짜증이 나지 않는다.


현대 심리학은 너무 화를 참지 말라고 한다. 적당히 분노한 감정을 드러내야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와 자이나교에서는 다른 소리를 한다. 화를 내는 신자는 적정 수준에 이루지 못한 수행자로 본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화낼 만한 일이란 건 없다는 견지인것 같다. 일체유심조니 제행무상이니 색즉시공이니 하는게 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어느 신자가 법륜스님께 물었다.


'인공 지능 AI 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법륜 스님이 답했다.


'물론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봐라. 아무리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의 말을 무시해도 절대 화내지 않는다. 이는 바로 부처의 경지다.'


최근 불교에 관심이 가고 있다. 요즘 어설픈 보살 흉내를 내면서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화내고 짜증 내는 일도 줄었다.


앞에 위험하게 끼어든 자동차를 보면서도 '뭐 바쁜 일이 있으신가 보다' 하고 화를 안낸다. 트럭스탑에서 주유를 마친 후 내 앞에서 꾸물럭거리는 운전사를 보면서도 조급해 하지 않는다. 캐나다에 들어올 때마다 시간을 허비하지만 화나지 않는다. 짜증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 부족한 운동을 강제로 시켜 주는 고마운 기회라고 여긴다.


부처님 고마워요.


2022.6.28


트럭 운전을 하면서 많은 생명을 죽인다

 


자이나교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로 가는 침대 기차칸이었다.


같은 구역에 전형적인 인도 가족과 영어를 잘하는 프로페셔널 여행가 프랑스 아저씨, 그리고 우리 부부가 있었다. 인도인 아줌마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줬는데 나는 마침 인도 여행 안내서에서 낯선이가 주는 음식을 받아 먹지 말라는 항목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아 씨,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단다, 모르겠다 하고 받아 먹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인도인 아저씨가 명함을 줬는데 프랑스 아저씨가 성을 보더니 아, 자이나교시군요? 그랬다. 그게 생전 처음으로 자이나교라는걸 들은 때이다.


마침 카주라호 외곽에 자이나교 사원이 있어서 스쿠터를 빌려 방문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불교와 아주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작이 불교와 동시대다. 브라만교의 수행 방법인 고행을 끝까지 밀어붙여 깨달은 이가 자이나교의 창시자다. 또한 고행이 깨달음의 방법이 아니라는걸 자각한 후 중용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른 이가 석가모니다.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극단적인 금욕과 고행을 한다.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해치려하지 않는다. 옷 조차 가지지 않고 빨가벗은 채 수행하며 살생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극히 드물게 소유가 허락된 것 중에 하나가 작은 빗자루다. 자리에 앉을 때 혹시 벌레 같은 미물이 있어서 깔고 앉아 죽일까봐 쓸어내는 용도다.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나쁜 카르마인데 현생에서 어떠한 나쁜 카르마도 만들지 않아야 해탈에 이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혹시 수확 과정에서 많은 생물이 죽었을까봐 고구마 같은 뿌리 식물들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의 최고의 열반 방법 중 하나는 모든 곡기를 끊고 굶어 죽는 것이다. 나로선 참으로 상상도 안되는 수행이다.


이런 극단적인 무살생과 수행 태도 때문에 자이나교 교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살생이 수반되는 농축산업이 아닌 상업에 주로 종사한다. 그래서 부자가 많다. 자이나교인은 인도 전체 인구 중에 1% 미만이지만 20% 이상의 세금을 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참으로 나쁜 놈이다. 고기를 좋아하며 직업상 끊임없이 생명을 죽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주로 가는데가 도살장이다. 주로 캐나다에서 소고기를 싣고 미국으로 가서 돼지고기를 싣고 캐나다로 온다.


이외에도 트럭 운전을 하면서 많은 생명을 죽인다. 그간 두 마리의 사슴을 치어 죽였다. 최근에는 도로에서 일광욕 하고 있던 프레리독을 깔아 죽였다. 캐나디언 구스나 이름 모를 새들과 충돌 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날이 더워지면서 하루에 수천수만마리 이상의 날벌레들을 쳐죽이고 있다. 자이나교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매일매일 엄청나게 나쁜 카르마를 쌓고 있는 중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자이나교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지.


아우랑가바드에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의 유적들이 혼재되어 있다. 석굴암 보다 훨씬 규모가 큰 불교 석굴 유적들이 좍 늘어서 있고 입이 쩍 벌어지는 힌두교 사원들이 사람의 기를 빨아들인다. 아그라의 타지마할 보다 아우랑가바드의 이런 유적들이 나에겐 더욱 인상깊었다.


너무 유적이 많고 규모가 커서 아내가 탈진해 버렸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자이나교 유적은 미처 둘러보지 못했다. 뭐 나와 인연이 없는가 보다.


여튼 요즘 윈드실드에 끊임없이 부딪혀 터져버리는 날벌레들을 보면서 자이나교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진다.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나의 치통

석가모니는 생노병사라는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다.


그는 6년간 고행을 통해 수행했다. 육신을 괴롭힘으로써 진짜 자신, 즉 아트만을 찾을 수 있다는 수행법인데 당시의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감각적 욕망은 저열한 육체의 작용이므로 육체를 괴롭히면 모든 욕망에서 해방되어 진실한 자기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고행을 극한으로 몰아붙인게 자이나교다. 반면 고행은 잘못됐고 쓸데없는 짓이다를 알리며, 당시로는 혁명적인 또다른 방법의 열반을 가르친게 불교의 시작이다.


죽음을 각오한 6년간의 고행 끝에 '이건 미친짓이다' 라고 결론내리고 고행을 중단했다. 그리고 어떤 처자에게 우유죽을 얻어먹고 보리수 그늘 아래서 앉아 쉬다가 석가모니는 드디어 깨달았다. 삶의 모든 괴로움에서 초월하여 그는 항상 고요한 평정속에서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롭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나로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경지다.


10여년 전, 캐나다로 오기 전에 어금니 하나가 세로로 금이 가서 크라운을 씌웠다.


6년 전 네팔 히말라야 산속에서 찬물을 마실때나 칫솔질을 할 때 크라운 씌운 어금니가 너무 민감해서 고생 했다. 몇주 후 인도 카주라호로 이동했는데 이 땐 뜨거운 물에 너무 민감해져서 혼났다. 아침 커피를 못마실 정도였고 부드러운 케익조차도 아파서 씹기가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증상이 없어졌다. 치과에서도 X-rays 상에 별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또다시 치통이 시작됐다. 땅콩이나 고깃점을 한쪽으로 씹을려니 참으로 불편했다. 치과를 가자니 3일 연휴여서 여의치 않았다. 이 와중에 카나나스키스 산행을 하고 잔디를 깍는 등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힘이 쭉 빠졌다. 마치 한꺼번에 십년정도 늙은것처럼 축 쳐졌다.


예전처럼 증상은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 일주일 고생하다가 저절로 고통이 사라지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일체유심조가 별거더냐. 이게 그거지, 뭐!


내가 내 몸이고 내 몸이 나다. 내 두뇌는 신경세포 - 뉴런 - 의 집합체이고 시냅스를 통해 온 몸의 또다른 뉴런과 연결되어 있다. 내 어금니에 있는 뉴런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영혼이니 아트만이니 하는건 없는것 같다.


치통에 괴로워하며 석가모니의 고행을 생각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만간 치과에 가서 내 어금니 크라운 아래서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석가모니는 치통에서도 평정하셨으려나? 아마 고행은 쓸데없는 짓이다라는걸 간파하셨으니 즉각 그당시 나름의 방법으로 치료하셨겠지.


나는 시크교도가 될거다



인도에는 세상의 온갖 종교가 다 있다.


대다수 인도인이 믿는 힌두교, 오랜 기간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의 이슬람교, 제국주의 시대에 전파된 신교와 구교의 기독교가 있고 불교와 자이나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의 친근한 이웃인 푼자비들의 종교, 시크교도 인도의 푼잡 지역에서 유래했다. 그야말로 종교의 잡탕밥이다.


힌두교도 북인도와 남인도가 좀 분위기가 다르다. 하지만 모든 힌디들의 성지, 바라나시 갠지스강 순례는 남북이 공유한다. 해서, 돋떼기 시장같은 바라나시의 시장길을 걸을라치면 세상 재미진다. 오토바이와 뚝뚝이와 릭샤와 승용차와 소와 떠돌이 개들이 난장판으로 뒤엉킨 속에서 북방 힌두교인, 머리를 빡빡 민 남방 힌두교인, 온 몸을 검은 차도르로 둘러싼 이슬람교 여인네들이 물결을 이루며 지나간다. 그야말로 이세계다. 루크 스카이워커가 한솔로와 함께 사막 행성에서 무법자 외계인들이 모여드는 선술집에 들어서서 생전 처음보는 이세계인을 구경하는 심정이 아마 이럴 거다.


남부 동해안의 폰디체리는 한때 프랑스 점령지여서 성당이 많다. 성당 거리를 걷노라면 마치 몬트리올에 있는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선 힌두사원이 나타나고 커다란 코끼리가 지나다니는 사람들 머리를 코로 툭툭 치며 축복을 내려주기도 하여 이곳이 인크레더블 인도임을 웅변한다.


힌두교는 참 재밌다. 그런데 좀 들여다 보면 잔인한 종교이기도 하다. 바로 카스트제도 때문이다. 사람을 출신 성분으로 차별하는게 교리에 들어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심한 차별의 문화가 있다. 남편이 죽어서 화장을 할 때, 아내가 그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하는게 커다란 미덕으로 전해내려왔다. 옛날엔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바로 죽은 목숨이었다. 과부에게 환각제 등을 먹여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게 비일비재했다. 사티라고 한다. 1987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사티가 금지됐다.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도 힌두교 만큼은 아니지만 여성차별이 심하다. 일단 이브의 구성성분이 아담의 갈비뼈다. 또한 아담을 꾀어 선악과를 먹게한 죄인 취급을 받는다. 월경을 하는 여성은 불결하게 여겨져 신전 출입이 금지됐다.


어렸을때 조부모에게 위탁된적이 있다. 전기도 없는 시골마을이었는데 조부모가 성당에 다녔다. 나도 일요일날 한시간 가량 시골길을 걸어서 처음 성당에 가게 됐다. 남녀가 분리되어 앉아서 예배를 봤다. 특이하게 여자들은 모두 하얀 천대기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미사보라고 한다. 여자들은 죄를 지어서 미사보를 써야 한다나?


유대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들도 이슬람교 만만치 않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목, 팔, 다리를 노출하면 안된다. 그리고 성경의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는 가르침에 따라 피임을 죄악시한다. 하레디 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7.5 명이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높은 출산율에 일조를 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의 여성 차별은 뭐 워낙에 악명이 높아서…


인도의 푼잡 지역은 곡창이라고 한다. 드넓은 평야에서 아주 많은 농작물이 산출된다고 한다. 푼잡이라는 말이 다섯개의 강이라는 뜻이다. 캘거리에 Five Rivers 라는 인도식당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푼잡지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다.


푼잡에서 기적의 종교 시크교가 태동됐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짬뽕해서 만들었는데 아주 혁명적이게도, 두 종교의 공통된 악습을 없애버렸다. 시크교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카스트제도도 없다. 여성 차별도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남녀도 평등하다.


인도의 유서깊은 카스트제도는 여러가지 일상생활에 뿌리내렸는데 사람들의 성씨에도 스며들어 있다. 인도인들은 상대방의 성을 보면 대충 상대의 카스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해서, 서로 처음 만난 인도인들은 상대의 성씨를 물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고 한다.


시크교는 이런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카스트제도를 극도로 혐오하여 모든 시크교도의 성을 통일해 버렸다. 시크교도의 남자 성은 '싱 Singh' 이다. 여자는 '카우르 Kaur' 다.


시크교도 남자는 면도를 하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터번을 쓴다. 이제 당신은 캘거리에서 아주 쉽게 인도에서 온 싱서방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시크교 사원에서 공짜로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고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종교, 인종, 성별에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사원에 들어갈 수 있다. 단, 맨발이어야 하고 간이 터번을 써야 한다.


뉴델리의 시크교 사원인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을 방문한적이 있다. 더운 날씨에 지친 참이었는데 인공 호수변 그늘막엔 천정에서 선풍기도 돌며 선선한 바람을 만들어줘서 간만에 오아시스같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벽에 기대어 두 다리를 쭉 뻗고 앞을 보니 바로 앞에 호수였고 건너편이 바로 사원이었다.


그때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쭉 뻗은 내 발을 손가락질하며 뭔가 기분나쁜 뉘앙스로 말했다. 아차 싶었다. 더러운 발을 이들의 성전을 향해 뻗고 있는 무엄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다리를 오므리고 사과했다.


그런데 수염이 덮수룩한 청년이 끼어들었다. 갑자기 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였다. 아마도 멀리서 오신 손님에게 너무 무례하지 않느냐 하고 청년이 따지는듯 싶었다. 언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성분이 기분이 상해서 물러갔고 청년도 내게 가볍게 목례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고, 괜히 무신론자가 시크교도의 성소에서 분란을 만들었다.


여튼, 시크교는 차별과 여혐의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융합하여 좋은것을 취하고 나쁜것을 모두 버린 기적과도 같은 종교다. 만약 무신론이 불법이 되고 의무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가져야만 하는 세상이 온다면 나는 시크교도가 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