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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질이 더럽냐?


한국인들은 보통 식사 후에 양치질을 한다. 아무 데서나 한다. 공중화장실에서도 한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한다.


그런데 양놈들은 양치질이 더럽다고 생각하나 보다. 뭔가 남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혼자 해야 하는 일처럼 생각하는것 같다. 내가 미처 트럭스탑에 자리를 못 잡고 레스트에리어 공중화장실에서 치카치카를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힐끗힐끗 보는 서양인들이 좀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메이저 브랜드의 트럭스탑에서도 '더럽게 여기서 양치질 하지 마!' 라는 뉘앙스의 경고문을 붙인 곳이 간혹 있다. 두 군데를 경험했는데 모두 캐나다에서였다.


그런 트럭스탑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레스트에리어나 길가에서 보통 생수 한 병을 가지고 밖에서 양치질을 한다. 좀 서글퍼지는 트럭커의 일상이다.


북적북적한 트럭스탑 화장실이 제일 마음에 편하다. 대부분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같은 트럭커이기에 동병상련이다. 오늘 아침에 커다란 트럭스탑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며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좀 추하긴 하다. 입에서 생성된 치약 거품이 뿜어져 나와 줄줄 흘러내린다. 내가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세면대를 보며 양치질을 하는 이유다.


아내는 양치질도 참 이쁘게 한다. 그녀는 치카치카를 하며 방안이나 거실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입에서 전혀 치약 거품이 보이지 않는다. 신기할 따름이다. 겉모습만 이쁜게 아니라 양치질 소리도 귀엽다. 치카치카 치카치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침 8시 약속인데 7시에 체크인하고 1시간 넘게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다. 심심해서 이걸 끄적거린다. 여기는 오하이오의 나폴레옹이라는 조그만 도시다. 캘거리로부터 약 3,000km 떨어져 있다. 아내가 보고 싶다.


호수물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




 아내는 산을 참 좋아한다.


아내가 일본에서 직장생활 할 때, 같은 부서 50 여명이 후지산에 도전했다. 그때 단 세명만이 정상 정복에 성공했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아내였다. 그만큼 몸이 가볍고 산을 참 잘탄다.


한국에서도 많은 산들을 아내와 함께 올랐다. 서울 근교의 산들은 물론, 주말을 이용해서 설악산, 지리산 등도 자주 찾았다. 국립공원의 산장 숙박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박도 불사했다. 아니, 산속에서 자는걸 좋아했다.


영주권이 나온 후 캘거리로 정착지를 정한 것도 산과 관계가 깊다. 토론토는 산이 없고, 밴쿠버는 너무 비싸고, 캘거리가 로키산이 가까우면서 경기가 좋다고 해서 왔는데 오자마자 저유가로 경기가 곤두박질 쳤다. 역시 마이너스의 손!


여튼 한동안 록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미국을 로드트립 할때도 여건만 주어진다면 등산화를 신고 트래킹을 했다. 요세미티 폭포 위로도 올라가고 옐로우스톤 숲속을 방황하기도 했다.


아내가 산에 가서 특히 좋아하는게 있다. 하산길에 계곡물에 발담그고 노는거다. 계곡물만 나오면 등산화와 양말 벗고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적신다. 혼자하면 좋으련만 항상 나에게 같이 하자고 강권해서 곤란하다. 난 신발 벗고 양말 벗고 못생긴 발 적시고 닦고 또 주섬주섬 신는거 귀찮은데 말이다. 대부분 내가 져서 결국은 같이 물놀이 하곤 한다.


한국에 있는 많은 산골짜기 계곡물이 아내의 발을 적셨다. 또, 캐나디언 로키와 아메리칸 로키는 물론이고 미국의 여러 공원의 계곡물도 아내의 발을 스쳐갔다. 심지어 히말라야 몇몇 계곡물도 아내의 발을 담갔다.


많은 북미의 트레킹 목적지가 호수인 경우가 많다. 옐로우스톤 어떤 트레킹 끝에서도 큰 호수를 만났다. 트레킹중엔 물론이고 호수에서도 인적이 전혀 없었다. 큰 호수 하나를 우리가 전세냈다.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맨발로 호수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단이 났다.


이 글은 정보글이다.


절대 호수물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 원인은 모르지만 한동안 아내는 발목 가려움증 때문에 고생했다. 무언가 벌레 때문인지 옐로우스톤 특성의 화산성 화합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위험하다.


다행이 며칠 후 가려움증은 사라졌다. 한국처럼 생각하면 안될것 같다. 고인 물에 대해선 조심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큰 호수라 하더라도…


아, 아내와 같이 또 여행 다니고 싶다.


공산당 만세 5) 자기 거세의 시대(feat. BTS 쩔어)




공산당 만세 - 목차


자본가 계급의 등장

민주주의의 도입

자본주의

자본의 속성

자본주의 침공

재갈물린 자본주의


<...전략…>


한편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기를 잡은 일단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몫을 너무 많이 노동자에게 뺏긴다고 여겨 불만이 많았다. 이에 재갈물린 자본주의에게 자유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 즉 신자유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자기 거세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시작은 영국의 3선 총리 마거릿 대처라고 할 수 있다. 상위 1%만을 위한 경제정책을 편 것으로 유명하며 철의 여인, 우유도둑, 신자유주의의 마녀 등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대처 이전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캐치프레이즈의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나라였다. 대처 이후의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니 능력껏 알아서 사세요' 라는 각자도생의 나라가 되었다.


다음은 신자유주의 정부 하의 대표적인 정책들이다.


세금감면 - 기업과 자본가에게 유리하다.

복지축소 - 노동자 계급이 직접 피해를 받는다.

민영화 - 국민의 기업이 소수의 자본가에게 소유권이 이전됨을 뜻한다.

자유경쟁 - 게임의 룰이 없다. 많은 자본을 가진 자본가가 항상 이기는 게임 이다.

노조권한축소 - 설명 불요

노동시장 유연화 - 설명 불요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굉장했다. 수치상으로 경제는 발전했다. 전체적인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자본가는 천배 만배 더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폭삭 망해 버렸다.


나는 이 글의 2편 자본의 속성에서 자본은 항상 자기증식과 집중의 속성을 갖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본의 증식에 가장 간단한 방법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라고 말했다. 고삐풀린 자본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타난 양상이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에 재갈을 물렸을 때 생겨났던 그 수 많은 중산층들이 모두 무너졌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나타났다.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가장이 혼자서 외벌이로 집을 사고 차를 굴리며 부인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도 충분한 시대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경제는 발전한다는데 이젠 젊은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별로 앞날이 밝지 않은 시대가 됐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커다란 도전이 되어버린 시대다.


노동시장은 전적으로 자본가를 위한 시스템으로 재편됐다.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스펙쌓기를 해야 겨우 무보수 혹은 저임의 '인턴' 직을 구할 수 있으며 자본가는 이런 인턴 중에서 특출나고 복종적인 극소수의 '정직원'을 간택할 수 있고 언제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해고할 수 있는 절대권력을 가지게 됐다. 대다수의 젊은이는 이런 격렬한 경쟁에서 도태되어 저임 노동이나 계약직을 전전하는 현실이다.


작금의 젊은이들은 자꾸 뭔가를 포기한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등장하더니 여기에 인간관계와 내집마련도 포기한 오포세대가 등장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육포나 뜯어야지(feat. BTS 쩔어).


예전엔 상층 계급에서 자녀를 적게 낳고 무식하고 가진것 없는 계층에서 아이들을 쑴풍쑴풍 낳았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너무 똑똑하다. 자신이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자신의 자녀도 장차 흙수저일 것임을 알고 있다. 때문에 자기자신을 거세함으로서 자신의 불운을 후대에 물려주려 하지 않는다. 다른말로, 신자유주의 하의 현대 사회에서 어떠한 희망도 못보고 있다는 거다. 따라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


현재 전 세계의 정치인이나 경제학자 중에서 자신이 신자유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현대 사회가 이모양 이꼴이니까. 누구나 신자유주의가 뭔가 잘못됐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걸 알고 있다. 지금 일부 경제학계와 정치인들은 뭔가 바껴야 한다며 당대의 절대 권력인 자본가 계급에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읍소하는 중이다.


현 상황이 몹시도 만족스러운 자본가 계급은

'어허,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하지 않았느냐.'

며 역정을 내고 있다.


한줌의 자본가들은 내심

'허, 이거 잘못하면 잣 되겠는데?'

라며 약간의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과거와 같이 자본가를 위협할 공산당이나 소련이 없다. 예전처럼 자본가가 자신의 살덩이를 노동자에게 뭉텅뭉텅 내놓는 급격한 변화를 바라기는 힘들거다. 하지만 조용한 변화의 움직임은 나타나기 시작한것 같다만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마거릿 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 국민들은 '드디어 그 쌍년이 죽었다' 며 축제 분위기에 휩쓸렸다. 여기저기 축하파티가 열렸으며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Dong, The witch is dead)' 라는 그녀의 죽음을 상징하는 노래가 음악차트 일위를 차지했다.


영국 국민들이 대처의 죽음을 대차게 즐긴지도 이제 내년이면 10년이다. 하지만 영국을 위시한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신음중이다. 세계는 또다른 카를 마르크스를 가지는 행운을 갖지 못했다. 아마도 쁘띠 부르주아 시절의 풍요의 단맛에 취해 소련의 노동자 동지들을 배반한 댓가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저 멀리 동북 아시아에 위치한 남한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더욱 극심히 받은 나라인걸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율의 청년들이 스스로를 거세하고 있는 나라여서 출산율 부동의 꼴찌를 기록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이 나라에서는 이 문제많은 체제가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나라의 탄핵된 전직 여성 대통령은 자신의 롤 모델과 존경하는 정치인으로서 마거릿 대처를 꼽아 인터뷰하던 외신 기자를 갸웃거리게 했으며 2022년 현 대통령 당선자는 열렬한 신자유주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


(계속)


Class 1 면허를 딴 후 트럭커가 되는 방법


트럭 회사들은 운전사를 못구해서 난리다. 대부분의 트레일러 뒤에는 뒤따라오는 운전사를 위한 광고가 붙어 있다. 마일당 얼마를 주느니, 홈 타임을 얼마나 주느니, 사이닝 보너스를 얼마나 주느니 하며 뒤따라오는 운전수를 자기네 회사로 유혹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오늘은 드디어 사이닝 보너스 $7,500 을 준다는 광고를 봤다. 그 회사로 옮기기만 하면 $7,500 를 꽂아 준다는 거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도 레퍼럴 보너스를 2,500불 준다. 내가 누군가를 소개해서 그가 취업 된다면 그 돈을 나한테 주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사에 계속 붙어 있다면 그의 운전거리에 따라 한 달에 105불 ~ 120불을 1년간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건 경력이 있는 트럭 운전사를 위한거다. 이제 막 면허증을 받은 운전자에게는 해당 사항 없다. 아니 오히려 병아리 운전사는 직장을 찾기 너무 너무 너무 힘들다. 왜냐하면 90% 이상의 사람들이 몇 개월 만에 그만둬버리기 때문에 회사는 초짜를 뽑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용 운전 면허를 갖기 위해 많은 돈을 쓰고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일을 시작하고 단 몇 개월만에 이 모든 걸 포기한다.


회사는 갓 면허를 딴 사람을 실제 쓸만한 트럭커로 만들기 위해서 투자해야 하는게 많다. 우선 같은 트럭을 공유하며 트레이닝을 시켜 줄 선배 운전사에게 많은 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또 경험 없는 운전사를 고용하면 보험료도 많이 내야 한다. 사고의 위험도 크다. 까딱 잘못하면 큰 사고를 내는게 바로 이 초보 운전자들이다.


갓 면허를 딴 사람들이 운전을 포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일 수도 있고 외로울 수도 있고 겁이 날 수도 있다. 한마디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국분 두 분도 금새 운전을 포기했다. 한 분은 밤에 운전하는게 너무 겁이 나서 원래 직장으로 돌아갔다. 또 한 분은 멀리 미국에서 캐나다의 자녀분과 통화하다가 '내가 지금 아이를 냅두고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어 다시 원래 직장으로 돌아갔다.


여튼 그래서 갓 면허를 딴 사람의 이력서를 받은 회사는 당연히 금새 그만둘 사람으로 간주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가 좀 있고 블루칼라 직에 종사했던 적이 없었던 사람 같은 경우 직장을 찾기가 참 힘들다. 오로지 현직 트럭커 쟁탈전만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짜는 어떻게 직장을 잡나. 여기 세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는 나와 잠깐 팀 드라이버를 했던 인도인 시크교 청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픈 워크 퍼밋으로 영주권을 위해 트럭 일을 시작했다. 회사는 그 청년의 입장을 철저히 이용했다. 회사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다. 이런 인도 청년들은 오로지 영주권을 위해서 착취당했다. 청년들은 다른 방안이 없어서 그 회사에 계속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나의 트레이너였던 중국인 운전사다. 그는 대학원까지 졸업한 인텔리였다. 이력서 상으로는 그는 전혀 트럭 운전사 일을 지속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러 차례 트럭킹 회사들을 찾아다녔다. 인사담당자를 만나 직접 인사하고 결국은 잡을 잡았다.


세 번째는 나의 경우다. 여러달 동안 계속 이력서를 넣었지만 취직이 되지 않았다. 간혹 전화 인터뷰를 하는 일도 있었으나 후속 운전 테스트로 연결 되는 일은 없었다. 결국 돈을 주고 착취당하기로 작정했다. 어떤 회사에서 운영하는 운전학원에 심화 과정에 등록했다. 물론 과정 후에 운전직을 얻는다는 조건이었다. 몇 주간 다시 유료 운전 교습을 받고 6주간 트레이닝 명목으로 무급으로 운전했다. 두 달여간에 걸쳐 착취당한 후 겨우 급여를 받기 시작했다.


7개월 후 회사와 좀 안좋은 일이 있어 때려치워 버렸다. 또 어떡하나 막막한 심정에 네 군데 이력서를 넣었다. 오전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어떤 회사에서 오후에 전화가 와서 인터뷰를 봤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테스트를 받고 바로 취직 됐다. 새 직장을 잡는데 24시간이 채 안걸렸다. 나머지 세 군데 회사에서도 곧바로 연락들이 왔다. 이미 취직이 됐다고 하니 조건을 더 맞춰 줄 수 있다며 한번 만나 보자고 난리였다. 단 7개월의 경력이 만들어낸 차이는 놀라울 정도였다.


현재 나의 첫번째 회사는 학원과 함께 없어졌다. 코로나 팬더믹 상황에서 파산한 것이다. 그러니 현재 가용한 방법은 중국인의 방법일 것 같다. 트럭 회사의 인사담당자를 찾아내 계속 만나서 꾸준히 일을 할 것임을 강조하는 수밖에… 참 힘들고 지난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경력이 쌓인 이후엔 고용시장에서 확실한 갑이 될 수 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1942년에 설립된 회사다. 업력이 길고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나같은 게으른 트럭커가 일하기에 꽤 괜찮다. 의료 보험 같은 복지도 괜찮고 주휴 수당과 여러가지 보너스도 많다. 아무 말도 안했는데 심심하면 급여를 올려준다. 나를 착취하고 걸핏하면 거짓말을 늘어놓던 첫 번째 회사와는 천양지차다.


하지만 어디든 먼저 경력을 만들 수 있는 곳에 들어가는게 중요할듯 하다. 경력을 먼저 만들고 그 후에 조건이 좋은 회사를 찾는게 순서일듯 하다.


모든 병아리 트럭커의 행운을 빕니다.

세이노의 가르침 9) 룸싸롱과 미인계!

에잇! 룸싸롱에서 이루어지는 작태에 대해 장문의 글을 쓰다가 재미가 없어져서 모두 지워 버렸다. 이게 뭐라고 내가 글을 쓰면서 기분이 나빠져야 하나.


다시 시작!


일반적인 사업영역은 크게 B2C와 B2B로 나눈다. 예를 들어 제과 회사가 과자를 소비자에게 파는 건 B2C 다. 하지만 과자가 초코파이처럼 개별적으로 비닐에 포장되어 있고 박스에 담겨져 유통 된다면 제과 회사는 플라스틱 필름과 박스를 구입해야 한다. 이게 B2B에 해당한다. 한국에선 홍길동 사장이 운영하는 제과 회사에 포장지 납품하는 업체 사장은 동생인 홍길서씨다. 과자의 매출을 유지하거나 신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광고를 해야 하는데 홍길동 사장이 거래 하는 광고 회사 사장 이름은 홍길남씨다. 뭐 대충 사회는 그렇게 굴러 간다.


이 회사가 사업을 잘하여 공장을 증설할 땐 친인척으로 커버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건설과 설비 등등의 납품이 걸리면 계약을 따내기 위해 이른바 '접대' 라는게 일어난다. 사업 규모에 따라서 고급 일식집 식사나 룸싸롱 접대가 일반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골프 접대 등이 수반된다.


B2B 비즈니스 영역에서 의외로 큰 손이 있는데 바로 정부기관이다. 내가 현업이였을 때 공무원이 좋아하는 접대는 룸싸롱이었다. 나 또한 공무원과 엮이면 간혹 룸싸롱에 끌려 가고는 했다.


보통 정부 프로젝트는 먼저 RFP(제안요청서)가 각 업체에 배부된다. 그러면 업체는 나름대로 제안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제안서는 공무원과 외부 전문가들이 평가하여 복수를 선택한다. 제안서가 채택된 업체들은 밀봉된 견적가를 제출한다. 정부는 최저가를 제안한 업체에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뭐 대충 이런 흐름이다.


RFP를 분석하여 고객의 니즈에 맞는 적합한 제안서를 작성하는게 중요하다. 제안서 작성은 회사의 각 부서에서 정예가 모인 TFT가 담당한다. 제안서가 심사에서 탈락하여 견적서를 내 볼 기회조차 못 가지면 큰 불명예다. 그래서 보통 이런 TFT 멤버들은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프로젝트 영업 대표는 알음알음 연줄을 동원해서 핵심 공무원 몇몇을 수배하여 TFT 핵심 멤버 몇 명과 자리를 만들어 준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의 정확한 요구 사항을 확인하고 RFP에 명기되지 않은, 숨어 있는 쟁점들을 찾아낸다.


몇 시간의 회의가 끝나면 영업 대표는 공무원들이 시간을 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 보통 룸싸롱에 간다. 회의하는 동안 공무원과 TFT 멤버가 어느 정도 친해지면 공무원들이 강력하게 우리들도 동행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다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밀폐된 공간에서, 평소 같으면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쭉쭉빵빵 아가씨들이 웃음을 파는 꼴을 보게 된다. 에휴, 어떻게 하겠는가. 공무원들도 이걸 바라고서 자기 시간을 내주고, 미주알고주알 우리에게 내부 정보를 제공한 것일 터였으니…


+++


세이노는 룸싸롱 접대를 너무나도 싫어한다. 그는 룸싸롱 접대를 받는 사람, 혹은 받는 행위에 대해서 장황하게 혐오의 표현을 쏟아낸다. 아래는 룸싸롱 접대를 받는 사람에 대해 그가 욕하는 내용중 일부분이다.


- 인용 시작 -


당신이 죽으면 당신 무덤에 "캭" 하고 가래침을 뱉을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이 개새끼들아, 부끄러운줄 알아라(당신 아버지가 접대를 받느라 바쁘다면 그가 당신 아버지라도 부끄러워 해라). 젊었을때 세상을 더럽다고 욕하고 침 뱉던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 인용 끝 -


갑자기 여기서 그가 도덕 군자로 변하여 나도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룸싸롱 접대 보다 훨씬 더 더러운 짓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B2B 영업에서 미인계를 썼다. 룸싸롱 아가씨를 통해서 접대를 한게 아니라 미모의 여직원을 뽑아서 접대부로 훈련하여 영업을 시킨 것이다.


그의 말처럼 조직에서 결정권을 가진 부장이나 이사직급의 남성들은 굉장히 외로울 수 있다. 부부관계는 서먹해지고 있고 아이들은 사춘기라 더이상 아빠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 그는 이 부분을 파고 든다. 잔인하기 짝이 없다.


보통 사내놈끼리 싸움에선 철칙이 하나 있다. 절대 서로의 사타구니를 공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최소한의 사나이 사이의 신사도다. 세이노의 미인계 일화를 본 나는 갑자기 사타구니를 거하게 걷어 채인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다시 내 입으로 리프레이즈를 하기에도 불쾌하다. 그냥 잠깐 인용해 보자.


- 인용 시작 -


대기업의 의사결정권자는 부장이나 이사이고 나이는 40, 50 대이다. 그 사람들, 무지 외로운 사람들이다. 조직 내부의 파워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한계도 아는 사람들이다. 그 자녀들은 십중팔구 그 세대의 눈으로 볼때는 속을 썩이고 있을 것이고 그 아내들은 십중팔구 전형적인 아줌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자, 그 중년 남자들이 은밀히 꿈꾸는 것이 뭔지 아냐? 아름다운 로맨스다. 여기서 룸살롱 호스티스 같은 영업용 인상을 주면 절대 안된다. 옷은 야하지 않으면서도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야 하므로 약간의 씨쓰루가 좋을 것이고 화장은 연하게 해라. 미니스커트는 안되고 무릎을 살짝 보일 정도로만 입어라. 향수는 진하지 않은 카사렐 같은 것을 사용하고 퍼퓸보다는 오드뚜왈렛 등급을 써라.


상대방에게 주는 명함에 개인 이메일과 개인 휴대폰 전화번호는 없어야 하지만 첫 미팅을 끝낼 때 다시 명함을 건네받아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예쁜 글씨체로 적어 주어라.


상대방이 결정을 질질 끌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해라. 이를테면 "저는 부장님(이사님)이 결정권을 모두 갖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신가 봐요?" 라는 말을 하라는 말이다. 틀림없이 상대방은 자기가 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할 것이다. 그 사람이 집적 거릴 때의 대처방법, 앉을 때의 자세, 바디 랭귀지 쓰는 법 등등…


- 인용 끝 -


이 사람은 완벽하게 자기 여직원을 접대부로 만들었다. 이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거래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든다. 도저히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 스스로 상당히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 인용 시작 -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내가 10 대 20 대에 제일 싫어한 사람들이 40 대 50 대의 꼰대(아저씨)들이었다. 내 눈에는 모두 위선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그 꼰대 계층에 속한다. 나는 내가 젊었을 때 혐오하였던 능글능글한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아왔다. 내가 싫어했던 꼰대 모습이 싫어서 인지 배가 조금만 나와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 인용 끝 -


내가 보기에 가장 위선자 같은 사람이 모든 40, 50대들이 위선자라고 욕을 하고 있다. 부자가 되려면 이러한 자기 모순 정도는 그냥 넘어가야 되는가 보다.


(계속)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나의 치통

석가모니는 생노병사라는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다.


그는 6년간 고행을 통해 수행했다. 육신을 괴롭힘으로써 진짜 자신, 즉 아트만을 찾을 수 있다는 수행법인데 당시의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감각적 욕망은 저열한 육체의 작용이므로 육체를 괴롭히면 모든 욕망에서 해방되어 진실한 자기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고행을 극한으로 몰아붙인게 자이나교다. 반면 고행은 잘못됐고 쓸데없는 짓이다를 알리며, 당시로는 혁명적인 또다른 방법의 열반을 가르친게 불교의 시작이다.


죽음을 각오한 6년간의 고행 끝에 '이건 미친짓이다' 라고 결론내리고 고행을 중단했다. 그리고 어떤 처자에게 우유죽을 얻어먹고 보리수 그늘 아래서 앉아 쉬다가 석가모니는 드디어 깨달았다. 삶의 모든 괴로움에서 초월하여 그는 항상 고요한 평정속에서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롭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나로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경지다.


10여년 전, 캐나다로 오기 전에 어금니 하나가 세로로 금이 가서 크라운을 씌웠다.


6년 전 네팔 히말라야 산속에서 찬물을 마실때나 칫솔질을 할 때 크라운 씌운 어금니가 너무 민감해서 고생 했다. 몇주 후 인도 카주라호로 이동했는데 이 땐 뜨거운 물에 너무 민감해져서 혼났다. 아침 커피를 못마실 정도였고 부드러운 케익조차도 아파서 씹기가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증상이 없어졌다. 치과에서도 X-rays 상에 별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또다시 치통이 시작됐다. 땅콩이나 고깃점을 한쪽으로 씹을려니 참으로 불편했다. 치과를 가자니 3일 연휴여서 여의치 않았다. 이 와중에 카나나스키스 산행을 하고 잔디를 깍는 등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힘이 쭉 빠졌다. 마치 한꺼번에 십년정도 늙은것처럼 축 쳐졌다.


예전처럼 증상은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 일주일 고생하다가 저절로 고통이 사라지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일체유심조가 별거더냐. 이게 그거지, 뭐!


내가 내 몸이고 내 몸이 나다. 내 두뇌는 신경세포 - 뉴런 - 의 집합체이고 시냅스를 통해 온 몸의 또다른 뉴런과 연결되어 있다. 내 어금니에 있는 뉴런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영혼이니 아트만이니 하는건 없는것 같다.


치통에 괴로워하며 석가모니의 고행을 생각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만간 치과에 가서 내 어금니 크라운 아래서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석가모니는 치통에서도 평정하셨으려나? 아마 고행은 쓸데없는 짓이다라는걸 간파하셨으니 즉각 그당시 나름의 방법으로 치료하셨겠지.


자전거 3) 내 첫 자전거의 처참한 최후와 복수 혈전



대학교 신입생 때 노가다 알바를 했다. 2주간 일한 후 약간의 목돈을 쥐었다. 그리고 중고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에 해박한 친구녀석의 단골 자전거포에서 중고로 싸이클을 한대 샀다. 지금도 값이 기억난다. 5만 5천 원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나만의 자전거를 갖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싸이클이라고 하지 않고 로드 바이크라고 한다. 여튼 앞뒤에 기어가 달린 자전거 였고 바퀴가 무척 얇았다. 한동안 이 자전거가 나의 발이 되었다. 통학을 자전거로 했다.


문제는 자전거가 너무 약했다. 포장이 잘 된 트랙용 자전거 였는데 이걸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거나 친구 녀석이 잠깐 타고 나면 포크, 림, 스포크가 금방 휘어 버렸다. 내 용돈의 큰 부분이 자전거 관리 및 수리비로 들어갔다. 그래도 난 그 자전거가 정말 좋았다. 어디를 가든 자전거와 함께였다.


친구들과 시내 모처에서 모이기로 했을 때 친구 녀석들은 버스를 타고 나는 자전거로 움직였다. 내가 친구 녀석들 보다 먼저 도착하는 일이 많았다. 그야말로 그 자전거는 내 두 발이었다.


같은 동네에 친하게 지내던 중학교 동창 녀석이 있었다. 이 녀석은 대학을 안가고 프로 복서가 된다며 체육관을 다녔다. 이 녀석이 프로 테스트를 받을 때 내가 같이 따라갔다. 상대와 스파링을 하는데 무지 쳐맞더라. 코피를 흘리며 피가 잔뜩 섞인 침을 뱉어 대는 녀석에게


'야 인마, 때려 쳐라!'


해 줬다. 녀석은 스파링 후에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내 충고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 복싱을 때려치고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에 취직했다.


어느날 이 녀석이 내 자전거를 빌려갔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안돌려 주는 거였다. 한참 오르막을 올라야만 하는 녀석의 집을 찾아갔다. 나의 소중한 자전거는 그 녀석의 집 마당에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었다. 포크는 잔뜩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고 림은 엿가락처럼 구부러져 있었으며 여러 개의 스포크가 림에서 분리되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할 듯 보였다.


이 쉐키~ 하며 녀석의 방문을 열어제쳤다. 낮잠을 자고 있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 한대 칠까 하다가 그래도 한 때 복싱을 배운 놈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멱살을 놓고 '이 강아지야!' 욕설을 내뱉으며 그냥 뒤돌아 섰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자전거와의 고별이었다. 그래도 내 자전거의 최후를 목격한 셈이니 다행이려나? 왜냐하면 그 후에 내 모든 자전거는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내 첫 자전거를 그 꼴로 만든 그 놈은 그 후 나의 원수가 되었다. 몇 년 후 그 녀석이 녹즙기를 팔러 왔을 때 안 사줬다. 내 자전거의 원수의 물건을 살 수는 없으니까.


'녹즙기 사, 새꺄!'

'안 사, 새꺄! 나 녹즙 안 먹어, 새꺄!'


이렇게 원수를 갚아 줬다.


또 한참이 지난 후 녀석이 뭔가 다단계 사업을 같이 하자며 양복을 말쑥하게 입고 찾아왔다. 난 거절했다. 내 자전거의 원수와 같이 사업을 할 수는 없으니까.


'같이 하자, 새꺄!'

'안 해, 새꺄! 술이나 쳐먹어, 새꺄!'


이렇게 또 원수를 갚아 줬다.


이런 잡글을 쓰고 있노라니 그 놈이 참 보고 싶어지네! 그 녀석의 집도, 내가 그 당시 살던 집도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그 동네 자체가 삼성 래미안인가 뭔가 하는 고오급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이제 녀석을 찾을 방도가 없다. 어떻게 변했을려나? 진짜 한번 보고 싶네!


아차차! 자전거, 자전거!


그러고 보니 내 첫 자전거 외에도 도둑 맞지 않은 자전거가 또 한 대 있었구나. 캐나다에 오기 전, 두 대의 자전거가 있었다. 하나는 MTB 였고 또 하나는 다혼-like 한 접이식 미니벨로였다. 두 자전거 모두 아끼던 거였다. MTB는 형님 - 아내의 오라버니 - 께 드리고 미니벨로는 캐나다까지 이삿짐으로 가지고 왔다.


한동안 집 근처 노즈힐 공원까지 미니벨로로 낑낑대며 올라가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자전거 도둑은 전 세계에 존재한다. 아끼던 미니벨로도 결국은 도둑맞고 말았다. 한국에서부터 캐나다까지 가져온 거였는데 참으로 허무할 따름이었다.


최근에 아내가 레스토랑에서 밥 먹는 동안 밖에다 묶어 놨던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캐나다에서 세 번째 도난이다. 자전거라는게 그렇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자전거는 내 자전거가 아니다. 굳이 비싼 자전거를 사지 않고 쓸만한 것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을 찾는 이유다. 어차피 언젠간 또 도둑맞을 걸, 뭐~


(계속)


타이어가 터졌다



표준 트랙터-트레일러는 18개의 바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대형 트럭의 다른 이름이 에잇틴휠러 Eighteen Wheeler 다.


먼저 앞에 두 개의 스티어링 타이어. 이거는 무척 중요하다. 달리다가 이게 터지면 큰 사고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 타이어는 이상이 생기면 절대 수리하지 않고 새걸로 교체한다.


한번은 운전석 밑에 스티어링 타이어가 약간 바람이 빠진적이 있다. 회사에 알리고 트럭스탑에서 에어를 보충한 후 다시 달리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당장 안전한 곳에 세우고 수리 트럭을 기다리라는 지시였다. 여기 시골 구석이라서 출장비 엄청 나올텐데?


한 세시간 넘게 걸려서 수리 트럭이 오더니 새 타이어를 장착해줬다. 그런데 또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많은 시간을 낭비한 후 우여곡절 끝에 수리점에서 발견한 것은 휠에 발생한 미세한 크랙이었다. 이것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수천불 깨졌을거다. 여튼 회사는 의심스러운 스티어링 타이어로 운행하는걸 싫어한다.


그리고 트레일러에 달린 8개의 타이어. 이거는 가장 흔하게 문제가 발생하는 타이어들이다. 또 가장 싸기도 하다. 한두개 터진다고 당장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뭐, 바람이 빠지면 그냥 근처 수리점 가서 스페어타이어로 변경하거나 새로 사서 끼우면 된다.


일반 운전자들이 조심해야 할게 있다. 가끔 이거 폭발한다. 나도 두 번 경험했다. 트레일러 타이어가 폭발할 때 바로 뒤에 승용차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일반 승용차 타이어 압력이 통상 30psi 인데 세미 트럭의 타이어 압력은 100psi 전후다. 그러니 트럭하고는 특히 안전거리를 잘 유지하도록 하자.


몇년전 사스카추완에서 트레일러 타이어 두 개를 바꾼적 있는데 한 2천불 약간 안되게 지불한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랙터에 달린 8개의 드라이브 타이어. 실제 엔진으로부터의 힘을 받아서 지면을 박차고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타이어다. 트레일러 타이어보다 훨씬 견고하고 고급진 타이어다.


지금까지 드라이브 타이어에 문제를 경험한적이 없었는데 이번 일요일 된통 당했다.


일요일 새벽, 몬타나주 뷰트에서 운행 전 체크중에 드라이브 타이어 하나가 완전히 림에서 분리된걸 발견했다. 회사에 연락했더니 일요일에 처리할 수 있는데를 못찾겠다고 월요일까지 기다리란다.


망했다. 하루를 종쳤다. 아내도 옆에 없고 나혼자 아는이 없는 몬타나 시골 소도시에서 서른 몇시간의 인생을 낭비한거다.


이제 트랙터-트레일러의 모든 종류의 타이어 문제와 조우했다. 일종의 그랜드슬램이다.


요즘 이런저런 메카니컬 문제때문에 시간낭비가 많다. 불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굿이라도 해야할까?


공산당 만세 4) 재갈물린 자본주의


공산당 만세 - 목차


자본가 계급의 등장

민주주의의 도입

자본주의

자본의 속성

자본주의 침공


재갈물린 자본주의


한편 이러한 자본주의의 횡행을 목도한 한 현자가 자본론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탁월한 저술에 매료된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자본가라는 절대 권력에서 벗어나서 노동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위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다.


서구의 자본가들은 즉시 이 시도가 장차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임을 깨닫고 소련 주변에 이른바 '철의 장막'을 둘러쌓았다. 소련에서 실행되는 실험이 자국의 노동자에게 알려지는걸 막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점차 이상한 소문들이 노동자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소련의 노동자는 주거가 무료로 제공된단다,

병원비가 공짜라더라,

아이들이 공장대신 학교를 돈 안내고 다닐 수 있는데 대학생은 오히려 수당을 받는단다,

아이를 낳으면 일을 안해도 18개월간 급여가 지급된다더라,

일년에 이주간 나라에서 만든 휴양소에서 급여를 받으며 휴가를 즐길 수 있다더라,


등등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본래 소련은 자신들의 체제가 알려지면 서구에서 노동자가 단결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자본가가 더 빨랐다.


자본가는 즉시 위험을 간파하고 선수를 쳤다. 자본에 재갈을 물리고 노동자에게서 그 이빨을 거둬들인 것이다.


갑자기 서구의 여러 나라가 이른바 '복지 국가' 임을 표방했다. 아동 노동이 금지되고 노동자 위주의 노동법이 제정되었다. 소련을 따라하기 급급한 주제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노동자 계급에게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가 소위 '낙수효과' 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던 시기였다. 쁘띠 부르주아, 즉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성되고 확대됐다.


노동자 가장이 외벌이로 집을 사고 차를 굴릴 수 있었으며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 양육을 전담하던 시대였다. 서구의 노동자 계급은 풍요로워졌다. 중산층의 확대와 그들의 충분한 소비 여력으로 서구는 경제적인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와같이 부르주아는 노동자를 쁘띠 부르주아로 만들어 자기편으로 포섭함으로써 혁명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소련의 예상은 빗나가고 서구의 자본가가 이겼다. 자본가 입장에선 살을 주고 뼈를 취한 셈이다.


당신이 근로기준법 하에서 노동하고 있다면 공산당에 감사하라. 당신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았다면 빨갱이에게 감사하라. 당신이 어릴때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의무교육을 받았다면 마르크스에게 고마워하라. 당신이 출산휴가를 받았다면 역시 공산당에게 부채의식을 가져라. 당신이 늙어서 노인 수당이나 대중교통 무료 이용등의 복지혜택을 받고 있다면 그 혜택은 공산당으로부터 유래했음을 깨달아라.


저 멀리 극빈국 남한의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아직 자본가 계급이 군인들의 권력하에 기생중이었다. 이 때 뜬금없이 직장인 한정 의료보험의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위 북조선이 전국민 무상 의료였기 때문이다. 뭐, 당시 전국민 대상이 아니었지만, 일단 한국인이 자랑스러워 하는 현재의 의료보험은 김일성 때문에 박정희가 시작한게 맞다. 한국의 의료보험이 자랑스럽다면 김일성에게 약간의 고마운 마음을 갖도록 하자.


한편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기를 잡은 일단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몫을 너무 많이 노동자에게 뺏긴다고 여겨 불만이 많았다. 이에 재갈물린 자본주의에게 자유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 즉 신자유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계속)


우와아~ 소방관들 지인짜 멋찌드라아~


지금으로부터 10년전 11월 영주확인서를 들고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캐나다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일반 여행자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바로 자원봉사자에게 픽업되어 별도의 방으로 이끌려가 랜딩절차를 밟고 이민자를 위한 여러가지 안내 브로셔를 받은 후 캘거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캘거리에 도착하니 사방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는 겨울 왕국이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인생이 리셋되듯 계절마저 온화한 가을에서 단 두 시간만에 매서운 한겨울로 리셋되어 있었다.

 

거주할 곳을 잡고 여러가지 생활에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이민자를 위한 무료 영어 교육 LINC를 등록하기 위해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너는 읽기와 쓰기는 LINC에서 가르칠 레벨이 아니야. 듣기와 말하기만 들을 수 있는데 이 경우는 파트타임 강좌를 들어야 해. 파트타임 클래스는 야간에만 있어.'

'응, 야간 파트타임 듣기 말하기 좋아.'

'근데 읽기 쓰기를 이렇게 잘하는데 듣기 말하기는 왜 이모양이니?'

'어, 나 한국말도 듣기 말하기 잘 못해.'

'정말?'

'정말!'

'ㅋ'

'ㅋㅋ'

'ㅋㅋㅋㅋ'

 

해서 리스닝, 스피킹 야간 파트타임 클래스를 다니게 되었다. 이민 오자마자 만나는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몰려든 같은 이민자였던 것이다.

 

클래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처럼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이민자부터 벌써 1년동안 LINC를 다니고 있는 사람까지 망라되었다. 의사인 남편을 따라온 저널리스트 출신의 글래머의 베네수엘라 여성분, 불어가 네이티브라 퀘벡으로 랜딩했다가 일자리가 없어서 캘거리로 다시 이사온 세네갈 출신의 석유 엔지니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캐나다군 통역 군무원으로 일하다가 캐나다군의 철수로 함께 캐나다로 건너온 수다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인, 어?

 

아니, 통역병이 왜 영어를 배워? 통역병이 같은 클래스에 있다. 수업 시작 전에 여기저기 여러가지 잡담으로 왁자지껄 했다. 내가 보기엔 모두 원어민 수준으로 거침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게 틀림없다.

 

갑자기 들어온 땅딸막한 아시아인이 궁금했는지 여러 사람이 나에게 뭐라뭐라 질문했지만 나는 단지 what? sorry? pardon? 을 연발할 뿐이었다. 아 씨, 도대체 뭘 알아들어 먹을수가 있어야지…

 

재미가 없었는지 더이상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손쉽게 왕따가 되었다.

 

수업중엔 한달에 한번정도 10~15분간 주제를 정해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도 있었다. 오, 이런건 내 전문이지. 그간 얼마나 많은 제안서를 써제꼈으며 얼마나 많은 프리젠테이션 자리에서 구라를 쳐댔었던가. PT 자료를 구성하고 여기저기 펀치라인을 집어넣은 스크립트를 써서 딸딸 외워서 출전했다.

 

강사와 클래스메이트들의 배꼽을 빼놓으며 뒤집어놨다. 이렇게 프리젠테이션을 마치니 또 사람들이 내게 뭐라뭐라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또다시 what? sorry? pardon? 을 연발할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세번 정도 PT를 하니 이제 LINC를 하산하란다. 아니 이보슈 나는 아직 what? sorry? pardon? 수준인데 날더러 나가란 말이오? 여튼 이렇게 LINC를 쫓겨났다.

 

한편 아내는 정규 LINC 코스를 다니고 있었다. 밤에 하는 파트타임 LINC와는 다르게 정규 코스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과외활동이 많았다. 다 같이 글렌보우 박물관도 가고, 은행에서 사람이 와서 집사는 방법도 알려주고, 경찰서에서 경찰관이 와서 여러가지 안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다채로운듯 했다.

 

어느날 아내는 캘거리 소방서를 다녀온 이야기를 해줬다. 아내는 아주 환한 얼굴로 두 눈에 하트가 뿅뿅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우와아~ 소방관들 지인짜 멋찌드라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 했다. 서구의 소방관들은 섹시맨의 상징이 아니던가. 미드를 보니까 911을 콜하고선 아픈 남편을 팽개치고 곧 닥칠 소방관을 맞이하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는 아내가 다 있더라. 그만큼 구미의 소방관은 모든 여성이 선망하는 알파메일의 상징이 아니더냐. 내가 그들을 어떻게 이기냐고요…

 

나는 그저 장화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선 아내를 바라보며 선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으으~ 아내의 눈에는 지금 내가 얼마나 오징어로 보일까. 여튼,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캐나다로 이민온걸 후회한 날이다.

 

기우와는 다르게 아직 아내는 나와 살을 맞대고 살고 있다. 아내와 손잡고 산책할때 어떤 할머니가 'You guys make such an adorable couple.' 해준적도 있다. 하하. 나는 지지않아.

 

소방관! 인정한다. 멋진 사람들이다. 섹시하다. 당신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진정한 영웅이다. 나의 연적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나도 영웅인적이 있었다. 봐라. 이렇게 증거도 있다.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_18.html

 

자, 영웅대 영웅으로서 겨뤄보자. 난 절대 지지 않는다. 아니, 난 승리하고 있다. 아내는 내것이다.


세이노의 가르침 8) 퍼스트클래스의 땅콩!



일본으로 짧은 출장을 갔다가 올 때의 일이다.

1박 2일 일정이라서 손가방에 속옷과 서류 정도만 챙긴 간소한 출장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 출장 결과에 골몰하면서 보딩 패스를 끊기 위해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묘령의 여직원이 내가 내민 티켓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머리를 들어 사인을 보니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를 위한 창구였다. '어머 미안!' 하고 사과하며 긴 줄이 형성된 이코노미 클래스 창구에 줄섰다.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니 아까 그 여직원이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서로 어색한 웃음을 주고 받은 후 그녀에게서 보딩 패스를 받아 들었다.


출국 심사 후에 면세점을 지나쳐 보딩 대기 장소에 도착했다. 보딩 패스를 보니, 어라? 비즈니스 클래스 패스였다. '아이쿠, 이거 뭔가 크게 잘못됐구나!' 생각하며 보딩 입구에 서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마침 내게 보딩 패스를 끊어준 그 여직원이 무전기를 들고 그곳에 서 있었다.


'아노, 데스네, 뭔가 착오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저는 이코노미 클래스인데 비즈니스 클래스 패스를 주셨어요.'

'하이, 소-데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만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이쿠, 마음에 안들기는요. 혼마니 도모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네!'


이런 행운이 있나. 나는 널찍하고 편안한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웰컴 드링크를 마시며 진짜 도자기 식기에서 맛있는 기내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남들보다 빠르게 보딩을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진짜 유리로 된 잔으로 서빙된 음료를 즐기고 있는데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이 내 자리를 지나 뒤쪽 자리로 줄줄이 지나갔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과의 불평등은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나 노골적이라니, 새삼 자본주의의 잔인성을 깨닫게 됐다.


솔직히 비행 내내 편하지 않았다.


나는 과도한 친절을 싫어한다. 고깃집에서 종업원이 고기를 구울 때 뭐라도 거들어야 될 것 같고 식당에서 이모님이 서빙할 때 나도 반찬 옮기는 걸 돕고는 한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젊은 여직원이 무릎 꿇듯 쪼그리고 앉아 테이블 밑에서 올려다 보며 주문받는 걸 극혐한다(요즘도 그러나?). 해서 항상 3등칸에 익숙하던 놈이 비즈니스 클래스에 적응을 못 했던 듯 싶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아마 내가 어릴 때 갑질을 한번 부린적이 있는데 대실패로 끝나고 모친께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매질을 당한 후 트라우마가 생겼나 보다.


+++


우리집 초창기 문간방 세입자 중에 같은 또래가 있었다. 그 애도 편모 슬하에 할머니와 같이 세식구가 살고 있었다. 같은 국민학교 꼬맹이들이니 손쉽게 친해졌다.


하지만 애들이 항상 사이가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어느날 문간방에서 그 애와 같이 놀고 있다가 갑자기 뭔가로 투닥투닥 다투게 되었고 그 애가 나에게


'씨~ 너랑 안 놀아. 너 나가!'


했다. 약이 바짝 오른 나는 차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 우리집이야. 니가 나가!'


구석에서 홀로 화투패를 띄고 있던 그 애의 할머니 손이 딱 멈췄다. 어린 마음에도 큰 실수를 해 버린 걸 깨닫고서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애를 버려 두고 방을 나왔다.


며칠 후 이 일은 모친의 귀에도 들어가고 나는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너 왜 그랬어, 엉?'

'훌쩍 걔가 먼저, 훌쩍…'

'그게 아니고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네가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그런건 이제 필요없어. 니가 제일 나빠!'


이런 식으로 혼나고 또 두들겨 맞았다.


모친은 평소에도 '애비없는 후레자식' 소리 안 나오도록 처신을 잘 하라고 내게 당부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모친이 내게 하는 잔소리가 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해 주셨지만 골자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다.


'세상에 너보다 못난 사람 없다.'

'위만 보면 너는 항상 가난뱅이다. 아래를 보면 네가 제일 부자다.'

'꿈을 꿀 때만 위를 봐라. 삶을 살아갈 때는 오로지 밑을 보아라. 현실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항상 윗사람처럼 대해라.'

'세상에 40억명의 인간이 있으면 40억개의 인생이 있는거다. 그러니 남들 따라하려고 애쓰지 말고 간섭하지도 말아라.'


모친의 이런 밥상머리 교육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삶의 결과로 볼 때 썩 나쁘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병적으로 타인에게 반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 됐다.

나는 지금껏 꽤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에게 쌍욕을 하거나 욕을 얻어 먹은 경험이 없다.


아, 생각해보니 내가 남에게 욕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그 대상은 삼성그룹의 이재용이다.


어느 날 업체를 방문하기 위해서 어떤 빌딩에 들어갔는데 양복 차림의 떡대들이 나를 제지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이재용이 수행원들과 같이 내 앞을 지나갔다.


'신발새끼. 지까짓게 뭐라고…'


나는 내 스스로가 상당히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는데 또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반항적이다. 특히 누군가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갑질을 하는 걸 극히 싫어한다. 내 피에 빨갱이 기질이 좀 흐르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 내가 일정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가 총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위의 밝혔지만, 갑질을 못 하게 됐다. 부록으로 갑질하는 자들을 혐오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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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노는 스스로 갑질에 뛰어나다고 자평하고 있다. 직원들에 대한 갑질은 물론 타인에 대한 갑질 능력 또한 탁월하다. 심지어 공공기관에게도 갑질을 시도한다.


그는 매월 많은 돈을 의료보험으로 내고 있는데 그에 대한 혜택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한다. 의료비 할인도 없고 그가 병원에 갔다 왔을 때 공단에서 위로 문자 하나 없다고 불만이 대단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편법을 동원하여 의료보험료를 절반 이하로 스스로 깎아 버렸다고 자랑한다.


세이노는 비행기를 탈 때 주로 퍼스트클래스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받아야 할 서비스의 명확한 표준이 있다. 그의 신경은 그가 받는 모든 서비스가 완벽하고 철저한지 감시하고 평가하기 위해 바짝 곤두선다.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사무장에게 따로 인사를 받는가 보다(부담스러워라). 그냥 건성건성 인사하는 사무장을 못마땅해 한다. 그가 다리를 풀기 위해서 일어나 서성거리면 승무원은 뭔가 대나무 지압대를 가져와 제공해야 하는가 보다. 승무원이 빤히 바라만 보고 있으면 그는 속으로 '나 같으면 잘라 버린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그냥 요청하면 안 되나?).


이 외에도 그는 커피를 따르는 방법, 라면을 끓여다 주는 방식 등등에 집착한다. 그는 명시적으로 일등석 손님은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표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승무원들은 그의 하인과 다름없다.


그는 만족스러웠던 일등석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먼저 탑승하면서 탑 언니가 자기 휘하의 승무원들을 엄청나게 꾸중하는 걸 목격했다. 그걸 보고 그는 만족스러웠다. 탑 언니가 지랄을 할수록 승무원들의 서비스가 빠릿빠릿 하기 때문이다. 평소 그의 지론과 일치한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 어떻게 파악했는지 모르겠다만 - 사비를 들여 생화를 사와서 장식되어 있었단다. 엄청난 부자이지만 승무원들이 자기 돈을 써서 꽃을 사와 일등석 승객을 기쁘게 하면 그도 매우 흡족한가 보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의 주역 조현아 부사장을 두둔한다. 물론 비행기를 회항시킨것은 잘못이지만 조현아의 승무원들에 대한 갑질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귀족이신 일등석 손님이 땅콩 껍질을 손에 들고 있게 만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현아의 개지랄은 그녀의 지위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세이노는 모든 일등석 승객들은 자신처럼 서비스에 민감하고 갑질에 능하다고 한다. 글쎄,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상상이 안간다만, 여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참 피곤하게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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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키 땅콩 회항 사건 중 -


2007년 이후에는 봉지를 들고 가서 보여주고 취식 여부를 물어본 뒤 먹겠다고 하면 까서 접시에 담아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승무원은 이 지침을 완벽하게 준수했다. 공식 매뉴얼에 나온다. 대한항공 사내 커뮤니티에서는 승무원의 대응이 제대로 된 대응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 대한항공이 제작한 홍보 영상에 마카다미아를 봉지에 담은 채 주는 모습이 나와 있다.


결국 서비스는 전혀 잘못되지 않았는데, 부사장이 퍼스트 클래스 서비스 지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엉터리 질책을 한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서비스 지침을 다시 전자로 바꾸는 것은 부사장의 권한이므로 가능하겠지만, 탑승시점에서 승무원은 지극히 정상적인 서비스를 했는데, 이를 질책했다는 것이다. 즉, 임원이라는 사람이 자기 회사 규정도 몰랐던 것.


(계속)


어? 이거 완전 은하철도 999다



 한때 장애인 올림픽은 자신의 불운한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과 같이 스포츠를 즐기는데만 의의가 있었다. 지금은 의족을 착용한 육상선수들이 정상인 선수들을 압도하려는 시점이다. 정상인 선수들은 고탄력 탄소 섬유를 사용한 의족을 가진 장애인 스프린터와 멀리뛰기 선수에게 볼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암벽등반을 즐기는 MIT 대학 교수는 절벽에서 추락하여 두 다리를 잃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암벽등반에 최적화된 의족을 개발하여 여전히 암벽등반을 즐기고 있다. 그는 자신처럼 완벽한 다리를 가지지 못한 일반인을 오히려 불쌍하다고까지 말한다.


일론 머스크는 뉴럴링크라는 회사를 가지고 있다. 두개골을 열고 뇌에 전극을 삽입해 뇌와 외부기기의 직접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려는 회사다. 실제로 최근 원숭이 뇌에 전극을 삽입하고 생각만으로 간단한 비디오게임을 하게 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향후 컴퓨터나 로봇 등등의 기기를 생각만으로 조종하는것은 물론, 조만간 인간을 능가할 것으로 생각되는 강인공지능과 인간 두뇌의 결합을 목표로 한다.


장애극복을 위한 부속장치들이 인간의 오리지널 장치를 뛰어넘고 있다. 인간의 두뇌조차 뭔가를 집어넣어 지금까지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하려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외모를 위해 얼굴에 칼을 댄다. 좀 더 좋은 시력을 위해 수정체를 깍아댄다. 안정성이 확보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팔다리와 장기를 버리고 더 훌륭한 대체재를 선택할 것이다. 좀 더 편리한 인터페이스와 효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뇌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을 것이다.


100배 줌인아웃과 나이트비전 기능이 있고 두뇌 인터페이스에 의해 24시간 내내 보고 듣는걸 녹화할 수 있는 기계눈이 있다면 매력적일 것이다. 햇빛에 타지 않고 화장이 필요 없으며 늙지 않고 불필요한 피하지방 연소 기능이 있는 인공 피부는 어떤가. 누구나가 원할것이다.


사실 이런 근미래의 모습은 유발 하라리나 레이 커즈와일에 의해서 일찍부터 예견되어 왔었다. 이제 그들의 예언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어떤 세상이 오려는지 궁금하다. 오래 살아남아서 이런 변화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다.


처음엔 이런 시도들은 무척 비쌀 것이다. 인간 모르모트에 의해 안정성이 입증되면 먼저 부자들이 점차 자신의 열등한 부품을 버리고 최첨단 기계몸과 두뇌 인터페이스를 가지게 될거다. 이들은 이로 인해 얻어진 경쟁력으로 더 부자가 될거다. 나같은 가난뱅이는 멍청한 원숭이마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조차도 못하겠지. 그저 최첨단 기계몸을 가진 그들을 부러워만 하겠지. 그냥 빨리 죽는게 나을듯 하다.


어? 이거 완전 은하철도 999다. 가난뱅이 철이는 기계몸을 얻기 위해 신비한 여인 메텔과 함께 공짜로 기계몸을 준다는 머나먼 행성을 향해 여행한다. 오, 갑자기 오래살고 싶어진다. 늙은 철이가 되어 메텔처럼 매력적인 아내와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떠나는 우주여행이라면 절대 포기할 수 없지!


자전거 2) 내 자전거가 생겼다



매일 저녁 무렵 카카오톡 음성으로 아내와 통화한다. 서로 별일 없었냐며 안부를 묻고 통화를 끝낸다. 전화상으로는 서로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기에 통화는 보통 5분을 넘기지 않는다. 대화의 시작은 보통 '별일 없었어?' 다.


'미안해! 별일 있어.'


며칠 전 아내가 불쑥 말했다. 별 일이 있다니, 별 일도 다 있다!


***


아내의 직장은 집에서 가깝다. 바삐 걸으면 10분, 천천히 걸으면 15분 정도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내는 집에서 굴러다니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스포첵에서 떨이하던 접이식 미니벨로였는데 튜브 고무가 경화되어 앞뒤 모두 순차적으로 빵꾸가 나고 말았다. 유튜브에서 튜브 바꿔 끼는 걸 공부한 후 월마트에서 튜브를 사서 바꿔줬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아내의 출퇴근은 즐거운 자전거 라이딩이기도 했다.


어느날 아내가 지인을 만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갔다. 식사를 하기 위해 자전거를 외부에 묶어놨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체인을 끊고 훔쳐가 버렸다. 튜브를 바꿔준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말이다.


그래서 별 일 없던 일상에 별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어차피 겨울도 다가와서 내년 봄에 새로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아내의 직장과 스포첵이 제휴하여 최대 70%까지 할인이 가능한 쿠폰이 나왔다. 아내는 이 쿠폰으로 자전거를 사기를 원했다. 알맞은 자전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포첵에 가봤다. 별로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아내에게 미니벨로를 사 주고 싶었다. 그런데 단거리 출퇴근을 위해 샤방샤방 타기에는 너무 거창한 자전거들 뿐이었다.


아내가 자전거를 당장 원하는 것 같아서 다른 매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캐나디안타이어에서 560불 정도 하는 접이식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존에서도 800불 대의 자전거를 390불 정도에 세일 하고 있었다.



아마존에 주문을 했더니 이틀 만에 왔다. 공장에서 막 보내 준게 맞다. 하나도 세팅이 안 되어 있었다. 브레이크를 조정하고 타이어의 중앙을 맞추는 작업등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냈다. 허리가 끊어질듯 아팠다. 초보자의 세팅이라 크게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시운전을 해보니 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내가 퇴근해서 자전거를 보더니,


'싸구려네!'


했다. 상처 받았다.


사실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뒷 기어는 시마노 7단이지만 앞 크랭크가 너무 작아서 전혀 속도가 안날것 같다. 즉 최고속도에 크게 제한이 있다. 단거리 출퇴근 이외의 레저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도 걸어 다니다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아내가 만족해 한다.


며칠 후 아마존과 캐나디안 타이어 사이트를 보니 가격이 변동되어 있었다. 아내의 자전거는 500불대로 가격이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캐나디언타이어 자전거는 320불대로 떨이 중이었다.




아내에게 이걸 말하니 당장 그걸 내 자전거로 사자면서 캐나디안타이어로 가자며 일어났다. 매장에서 직접 본 자전거는 예상 밖으로 꽤 고급져 보였다. 아내가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역시 아내는 반짝반짝 광나는 소재 보다 무광택의 물건을 더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도 블랙 무광택 프레임이 더 고급져 보인다. 나는 탈 시간도 별로 없어서 사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의 강권에 의해 결국은 사고야 말았다.


이모저모 뜯어 보니 아마존에서 산 것 보다는 몇 등급 위다. 뒷 기어 뿐만 아니라 스프라켓과 변속 레버도 시마노 부품이였다. 앞 크랭크도 꽤 커서 속도도 잘 나올 것 같았다.


무척 오랜만에 내 미니벨로가 생겼다. 신난다.


다음날 아내가 출근한 사이, 혼자서 새 자전거를 타고 보우강까지 내려가 강변을 달리다가 올라왔다. 집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을 낑낑거리다가 결국은 끌바를 하고야 말았다. 내가 소싯적에는 절대 업힐에서 포기하지 않는 사나이였는데, 늙어버리고 말았다. 노즈힐 언덕을 한 번도 안쉬고 올라가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래도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니 너무 좋다. 한국에서 가져온 다혼-like 한 미니벨로를 잃어버리고 한동안 안타다가 아내 때문에 또 자전거를 타게 됐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행복을 다시 찾았다.


***


아마존의 그 자전거는 지금은 또 499 불이 돼 있네. 왜 가격이 자꾸 바뀌지? 그런데 이거 사실 바에야 캐나디안 타이어의 320불대 자전거가 훨씬 더 좋습니다. 참고하세요.


나는 시크교도가 될거다



인도에는 세상의 온갖 종교가 다 있다.


대다수 인도인이 믿는 힌두교, 오랜 기간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의 이슬람교, 제국주의 시대에 전파된 신교와 구교의 기독교가 있고 불교와 자이나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의 친근한 이웃인 푼자비들의 종교, 시크교도 인도의 푼잡 지역에서 유래했다. 그야말로 종교의 잡탕밥이다.


힌두교도 북인도와 남인도가 좀 분위기가 다르다. 하지만 모든 힌디들의 성지, 바라나시 갠지스강 순례는 남북이 공유한다. 해서, 돋떼기 시장같은 바라나시의 시장길을 걸을라치면 세상 재미진다. 오토바이와 뚝뚝이와 릭샤와 승용차와 소와 떠돌이 개들이 난장판으로 뒤엉킨 속에서 북방 힌두교인, 머리를 빡빡 민 남방 힌두교인, 온 몸을 검은 차도르로 둘러싼 이슬람교 여인네들이 물결을 이루며 지나간다. 그야말로 이세계다. 루크 스카이워커가 한솔로와 함께 사막 행성에서 무법자 외계인들이 모여드는 선술집에 들어서서 생전 처음보는 이세계인을 구경하는 심정이 아마 이럴 거다.


남부 동해안의 폰디체리는 한때 프랑스 점령지여서 성당이 많다. 성당 거리를 걷노라면 마치 몬트리올에 있는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선 힌두사원이 나타나고 커다란 코끼리가 지나다니는 사람들 머리를 코로 툭툭 치며 축복을 내려주기도 하여 이곳이 인크레더블 인도임을 웅변한다.


힌두교는 참 재밌다. 그런데 좀 들여다 보면 잔인한 종교이기도 하다. 바로 카스트제도 때문이다. 사람을 출신 성분으로 차별하는게 교리에 들어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심한 차별의 문화가 있다. 남편이 죽어서 화장을 할 때, 아내가 그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하는게 커다란 미덕으로 전해내려왔다. 옛날엔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바로 죽은 목숨이었다. 과부에게 환각제 등을 먹여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게 비일비재했다. 사티라고 한다. 1987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사티가 금지됐다.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도 힌두교 만큼은 아니지만 여성차별이 심하다. 일단 이브의 구성성분이 아담의 갈비뼈다. 또한 아담을 꾀어 선악과를 먹게한 죄인 취급을 받는다. 월경을 하는 여성은 불결하게 여겨져 신전 출입이 금지됐다.


어렸을때 조부모에게 위탁된적이 있다. 전기도 없는 시골마을이었는데 조부모가 성당에 다녔다. 나도 일요일날 한시간 가량 시골길을 걸어서 처음 성당에 가게 됐다. 남녀가 분리되어 앉아서 예배를 봤다. 특이하게 여자들은 모두 하얀 천대기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미사보라고 한다. 여자들은 죄를 지어서 미사보를 써야 한다나?


유대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들도 이슬람교 만만치 않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목, 팔, 다리를 노출하면 안된다. 그리고 성경의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는 가르침에 따라 피임을 죄악시한다. 하레디 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7.5 명이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높은 출산율에 일조를 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의 여성 차별은 뭐 워낙에 악명이 높아서…


인도의 푼잡 지역은 곡창이라고 한다. 드넓은 평야에서 아주 많은 농작물이 산출된다고 한다. 푼잡이라는 말이 다섯개의 강이라는 뜻이다. 캘거리에 Five Rivers 라는 인도식당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푼잡지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다.


푼잡에서 기적의 종교 시크교가 태동됐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짬뽕해서 만들었는데 아주 혁명적이게도, 두 종교의 공통된 악습을 없애버렸다. 시크교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카스트제도도 없다. 여성 차별도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남녀도 평등하다.


인도의 유서깊은 카스트제도는 여러가지 일상생활에 뿌리내렸는데 사람들의 성씨에도 스며들어 있다. 인도인들은 상대방의 성을 보면 대충 상대의 카스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해서, 서로 처음 만난 인도인들은 상대의 성씨를 물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고 한다.


시크교는 이런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카스트제도를 극도로 혐오하여 모든 시크교도의 성을 통일해 버렸다. 시크교도의 남자 성은 '싱 Singh' 이다. 여자는 '카우르 Kaur' 다.


시크교도 남자는 면도를 하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터번을 쓴다. 이제 당신은 캘거리에서 아주 쉽게 인도에서 온 싱서방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시크교 사원에서 공짜로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고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종교, 인종, 성별에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사원에 들어갈 수 있다. 단, 맨발이어야 하고 간이 터번을 써야 한다.


뉴델리의 시크교 사원인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을 방문한적이 있다. 더운 날씨에 지친 참이었는데 인공 호수변 그늘막엔 천정에서 선풍기도 돌며 선선한 바람을 만들어줘서 간만에 오아시스같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벽에 기대어 두 다리를 쭉 뻗고 앞을 보니 바로 앞에 호수였고 건너편이 바로 사원이었다.


그때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쭉 뻗은 내 발을 손가락질하며 뭔가 기분나쁜 뉘앙스로 말했다. 아차 싶었다. 더러운 발을 이들의 성전을 향해 뻗고 있는 무엄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다리를 오므리고 사과했다.


그런데 수염이 덮수룩한 청년이 끼어들었다. 갑자기 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였다. 아마도 멀리서 오신 손님에게 너무 무례하지 않느냐 하고 청년이 따지는듯 싶었다. 언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성분이 기분이 상해서 물러갔고 청년도 내게 가볍게 목례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고, 괜히 무신론자가 시크교도의 성소에서 분란을 만들었다.


여튼, 시크교는 차별과 여혐의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융합하여 좋은것을 취하고 나쁜것을 모두 버린 기적과도 같은 종교다. 만약 무신론이 불법이 되고 의무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가져야만 하는 세상이 온다면 나는 시크교도가 될거다.


아내를 뺏겼다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다. 짧게는 일주일, 길 땐 5주 정도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와서 며칠 쉰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노닥거리는게 나의 최대 행복이다.


올 초에 아내가 취직했다. 집 근처에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리타이어먼트 센터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했다. 두 주에 30여시간 일한단다.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두세시 정도에 퇴근한다고 했다. 업무는 레지던트 아침 및 점심식사 서빙과 그 뒷처리란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내는 한 주에 6일동안 일했다. 그런데 7일째 또 나와달라는 메시지가 메니저로부터 왔다. 내가 못가게 했다. 파트타임이라며… 뭔 파트타임이 일주일에 칠일을 출근한다냐?


어떤 날은 아침에 나가고 또 어떤 날은 점심 이후에 나가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 돌아온다. 집에서는 액셀로 뭔가 서류작업을 하고 있다. 뭐하냐 물어보니,


'어, 직원 교육자료. 매니저가 달래. 그리고 내가 신입 한명 내일부터 가르쳐야 해.'

'??? 거기 일 시작한지 한달됐잖아. 근데 뭔 교육을 시켜? 그리고 교육자료를 왜 자기가 만들어???'

'그렇게 됐어.'


아내와 식사를 하며 혹은 아내가 내 머리를 깍아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막을 알게 되었다.


서구인들의 아침식사는 참 복잡하다. 빵은 화이트 혹은 브라운, 빵을 구을지 말지, 음료는 오렌지 주스 혹은 애플 주스 혹은 밀크, 계란은 삶을건지 후라이할건지, 후라이는 서니사이드업인지 이지오번지, 또 잼은 어떤걸 할건지, 베이컨은 몇개나 먹을지 조합이 무지 많다.


아내는 아침에 수십명의 레지던트로 부터 이런 주문을 받아서 메모하여 주방의 쿡에게 전달하고 조리가 되면 음식을 서빙해야 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아내가 꾀를 냈다. 각 개개인별로 선호하는 아침 스타일의 변화가 별로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간을 대폭 절약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집에 와서 개개인의 이름 하에 아침 주문을 미리 프린트하여 출근한 것이다. 그래서 주문받는데 잡아먹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개발새발 휘갈겨진 주문지를 상대하던 쿡들이 최첨단 프린트아웃된 아내의 주문지를 받아들고 뒤집어졌다. 아내는 서류작업을 통해 레지던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샐리, 오늘도 어제랑 같은거?'

'매리, 오늘은 어쩐일로 우유대신 사과주스를 원하니?'


이렇게 응대하니 레지던트들이 아내만 보면 하하호호 좋아한단다.


아내는 이렇게 절약된 시간에 놀고있진 않을 거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 몫까지 일할 거다. 틀림없다. 나는 아내와 사내연애했고 사내결혼했고 결혼후에도 대부분의 기간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일했었다. 그래서 잘 안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 자기 일이 끝났다고 손놓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도 사랑받고 있겠지.


아내가 엑셀로 만든 시스템이 내부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아직 교육을 받고 있을 상태의 아내가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맙소사…


언젠가 하루는 저녁 스텝이 빵꾸나서 아내가 대타를 처음으로 뛰었다. 이 때는 서빙이 아니고 일종의 주방 보조였다. 다음날 서빙될 디저트 푸딩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푸딩 플라워에 우유를 9L 부어 잘 저은 후 어쩌구 저쩌구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아내는 두 개의 4L 짜리 우유통을 플라워에 냅다 들이부었다. 쿡을 포함한 주방 스텝들이 깜짝 놀랐다.


'계량컵 써야지 그러면 어떡해!'


아내는 수학과 나온 여자다. 내심 황당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해줬다.


'이거 4L 통 두 개. 8L 들어갔고 1L만 계량컵 써서 넣으면 되잖아.'


쿡과 스텝들의 눈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땡그래졌다.


이틀 후 출근한 아내는 뒤집어진 매니저와 쿡과 주방 스텝을 상대해야 했다. 매니저가 입이 귀에 걸린채 물어봤다.


'너 도대체 푸딩에 무슨짓을 한거니? 레지던트들이 맛있다고 또 해달라고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였어.'


이거 나조차도 믿어야 할지 의심이 되는 일화였다. 해서 나도 아내에게 물어봤다.


'그래서 그 푸딩에 무슨짓을 한건데?'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 잠깐…'


아내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며 번뜩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내생각에 그 낡은 계량컵이 뭔가 수상쩍어.'


여튼 그래서 아내는 이주일에 30여시간 일하기로 한 오전 파트타임 일을 잡았는데 오전 서빙팀은 물론, 오후 주방팀에서도 에이스가 되어서 일주일에 심하면 칠일을 아침저녁으로 불려다니며 혹사당하고 있다. 난 집에 와도 이제 같이 놀 사람이 없다.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다. 짧게는 일주일, 길 땐 5주 정도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와서 며칠 쉰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노닥거리는게 나의 최대 행복이다.


그런데 아내를 뺏겼다. 심심하다.


공산당 만세 3) 자본주의 침공



자본가 계급의 등장

민주주의의 도입

자본주의

자본의 속성


자본주의 침공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회구조변화는 혁명적이었다. 도시화로 인구가 몰려들고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기술의 발전과 전문 분업화로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졌다. 증기기관, 방적기, 전신기등의 발달로 생산기반이 고도화되는 가운데 아동, 여성 등이 하루 14-16시간의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도시에 밀집된 빈민가와 고아원, 보육원 등에서 값싼 노동력이 계속 공급됐다.


프롤레타리아는 항구적으로 가난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근로로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없었으며 이는 소비 침체로 이어졌다. 결국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산품을 소비해줄 시장이 부족해졌다.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브루주아는 시장의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들은 아직 봉건전제군주제에 머물러 있는 제3세계에 눈을 돌렸다. 저곳에 가면 자기들의 생산품을 사줄 시장이 있을 것이었다. 또한 보다 값싼 원료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브루주아는 식민지가 필요했다.


법인 또는 회사라는 조직은 브루주아의 욕망을 수행하는 전위조직이다. 브루주아 단독 혹은 여러 브루주아가 합동으로 회사를 조직할 수 있다. 개인회사, 합자회사, 주식회사등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 조직은 오로지 자본증식만을 목적으로 여러가지 활동을 수행한다. 회사는 브루주아의 브루주아에 의한 부르주아를 위한 조직이다. 식민지 개척을 위한 회사들이 만들어졌다.


영국의 브루주아들은 인도를 식민화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를 이용했다. 브루주아의 영향력하에 있는 정부조직을 움직여 동인도 회사에 징집권과 교전권을 부여했다. 군대를 소유한 회사가 인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여러개의 봉건전제왕조로 이루어진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군대조직을 가진 효율적인 민간회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아대륙이 일개 브루주아 회사에 의해 통일되었다. 인도는 값싼 원료의 공급처이자 생산 과다상태의 영국산 소비재의 소비시장이 되었다. 무력을 가진 회사조직과 자본의 속성으로 인도는 철저히 착취당했다.


물론 모든 인도인이 손놓고 당하고만 있었던건 아니다. 브루주아의 목적과 본성을 꿰뚫어본 마하트마 간디는 동인도 회사의 이익 추구를 분쇄할 목적으로 직접 물레를 돌리며 영국산 직물의 불매 운동을 벌였다. 효과는 미약했고 결국 양 차에 걸친 세계대전(각국의 브루주아간의 식민지 이해관계가 충돌한 큰 전쟁. 전쟁중에도 브루주아는 큰 이익을 봤다. 패전국의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은 전범으로서 처벌받았다. 그러나 패전국의 브루주아는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이는 또다른 큰 이야기이므로 여기에선 생략하고 넘어간다) 이후, 브루주아가 더이상 이익을 보기 힘들어 자발적으로 물러난 이후에야 인도는 독립될 수 있었다.


한편 저 멀리 조선 반도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일본계 회사가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인들도 이에 대항하여 물산장려운동이라는 불매운동으로 저항하곤 했다. 알고보면 NO JAPAN 운동의 역사는 유구하다.


이처럼 브루주아는 자국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데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인민들을 착취하였다. 이들은 더이상 식민지에서 이익을 거둘 수 없어졌을 때에야 겨우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는 황폐화된 신생 독립국들이 남았을 뿐이다. 대부분의 이런 나라들은 아직도 극빈국으로 남아있다.


대부분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식민화했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자본주의 나라에 살고있는 자본가들의 회사가 철저히 자본 증식을 목적으로 타 지역을 침공한 것이다.


(계속)


트럭커의 슬기로운 커피생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 파는 곳을 알고 있다. 몬타나주의 그레이트폴스에 있는 트럭스탑의 커피인데 하도 경이적으로 맛이 없어서 이게 정상적인건지 실수인건지 확인하려고 그 후로 세 번이나 더 사마셨다. 계속 한모금 마시고 버렸다. 진짜 꾸준히 형편없더라.


스타벅스나 팀호튼 같은 커피는 트럭커에게 사치다. 트럭이 파킹할만한 곳에 그런 커피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트럭스탑에서 파는 커피가 유일한 옵션이다.


문제는 이게 맛이 균일하지 않다는 거다. 트럭스탑마다 맛이 틀리다. 또 시간대에 따라서도 풍미가 천차만별이다. 아침 바쁜 시간대엔 제법 훌륭한 커피를 얻을 수도 있지만 간혹 새벽에는 뽑은지 꽤 지나서 실망스러운 맛을 견뎌야 할 때도 많다. 특정 시간대에 특정 스탑의 커피가 좋았다고 항상 좋다는 보장도 없다.


해서 매일아침의 커피는 그날의 첫 운세를 가늠하는 복불복이다. 트럭을 출발시키고 들이킨 첫모금이 좋았다면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다. 첫모금의 커피가 웩~ 소리를 나게 한다면 하루의 시작 몇시간 정도가 별로가 된다.


자, 오늘의 커피는 맛있을까 맛없을까 진할까 흐릴까 텁텁할까 산뜻할까 하루하루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뭐, 지금까지는 말이다.


마이조라는 수동 커피머신을 사용한 이후는 항상 균일하고 만족스러운 커피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이게 큐리그 커피캡슐을 사용하는거라 맛의 선택범위가 넓고 항상 신선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또 설거지등의 뒷처리가 필요 없어서 나에게 딱이다. 매일 아침 물을 끓여 이걸로 커피를 내리는게 나의 하루 시작의 의식으로 정착된지 여러달째다.


아침식사로 빵과 주스박스 하나를 먹고 물을 끓여 텀블러에 커피를 내리고 샤워를 하고 온다. 그리고 인스펙션 후에 트럭을 출발시킨다. 아직 세상은 어둠에 잠겨있다. 동쪽을 향해 달린다면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밝게 빛나는 금성을 쉽게 볼 수 있다.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다. 약 삼십분간은 경쾌하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어김없이 첫 졸음이 찾아온다. 왜 항상 출발하고 30분쯤 후에 큰 졸음이 엄습하는지 수수께끼다. 아직은 커피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아껴야 한다.


아내는 항상 나를 위해 얇게 썰어서 말린 사과를 넣어준다. 손을 뻗어 말린 사과를 집어들고 씹기 시작한다. 산뜻한 산미와 함께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감돌고 첫 졸음이 물러난다. 말린 사과가 남아있다는 것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시기가 아직 꽤 멀었다는걸 의미하기도 한다. 말린 사과를 씹으며 30여분간 더 달릴 수 있다.


ELD 장치에 표시된 운전시간이 드디어 한시간을 넘었다. 이제 커피는 딱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됐을거다. 손을 뻗어 텀블러를 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입에 갖다댄다. 쌉싸름 하면서 향기로우며 따듯한 블랙 커피가 입안에 쏟아지며 미각세포를 폭발시킨다. 황홀경속에서 커피를 음미하자 눈앞에 끼여있던 희뿌연 안개같은것이 겉혀지며 눈이 맑아진다. 아, 세상은 아름답다.


한 세네 모금 정도를 마시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30분 정도 주행한다. 그러면 다시 약간의 졸음이 몰려온다. 준비한 오늘치의 말린 사과는 이미 동이 났다. 사과 밑에 깔려있던 견과류가 손에 닿는다. 아내가 여러가지 섞어서 준비해 준 견과류다. 때로는 말린 블루베리, 플럼, 건포도 같은게 손에 잡힌다. 나머진 캐슈, 아몬드, 피칸, 브라질넛, 마카다미아 같은것들이다. 이들을 씹으며 부족한 아침을 보충하고 틈틈이 커피를 들이킨다. 고소한 견과류 후에 향긋쌉살한 커피는 기분좋은 미각적 쾌락을 안겨준다.


운전시간이 두 시간 반 정도가 지나면 커피가 다 떨어진다. 이제 카페인이 몸에 돌고 별로 졸립지 않다. 날은 이미  밝아졌다. 커피의 수분과 카페인의 이뇨작용으로 오줌보가 빵빵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운전시간 세시간을 넘겼다. 가장 빨리 나오는 레스트에리어나 트럭스탑에 정차하고 화장실로 달려간다.


휴~ 오늘 하루 작업량 33% 정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