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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커

12월 중순, 영하 20도를 근접하는 날씨에 알버타 테이버에서 버거킹용 프렌치 프라이를 가득 실었다. 꼬박 4박 5일을 달려 조지아주의 소도시에 도착해 짐을 내렸을 땐 한 여름 날씨로 탈바꿈되었다. 나도 현지인과 마찬가지로 얇은 바지에 반팔을 입고 돌아다녔다.


다음 짐은 루이지에나 소도시에서 A&W에 납품할 고구마 프라이를 실어야 한다. 이번 트립에서 나의 역할은 탄수화물 전달자다. 추운 곳의 감자를 튀겨 남쪽에 갖다 주고 따뜻한 곳의 고구마를 튀긴 걸 다시 북쪽으로 가져다 준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짐을 가져다 주는게 정확히 5일 전에 내가 감자튀김을 실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조지아 주에서 알라바마와 미시시피를 거쳐 꼬박 하루를 달려 루이지에나의 델리라는 소도시 쉬퍼에 도착했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와중에 짐을 실었다. 짐을 싣고 나니 밤이 어두워져 쉬퍼 야드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비옷을 입고 화장실에 갔다가 트럭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보였다. 파리 한 마리가 윙윙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짜증이 솟구쳤다. 파리가 캡 안에서 날아다니면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 운전할 때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신경 쓰이게 만든다. 쓰고 있던 모자로 때려 잡으려 해도 날렵한 파리를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놈을 잡는 거에 신경 쓰다가 사고를 낼 뻔한 적도 있다. 예전에 네브라스카 주의 스카일러에 있을 땐 한꺼번에 세 마리의 파리가 캡 안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고생한 적도 있다.


비에 젖은 비웃을 단도리 한 후 파리를 때려잡기 위해 모자를 손에 들고 캡 안 중간에 가만히 서서 놈을 수색했다. 녀석은 나의 살기를 느꼈는지 어딘가에 숨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놈을 잡아 죽이는 걸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비가 그쳤다. 처음 출발했던 곳, 테이버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비가 그친 뒤 상쾌한 기분으로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잠시 후 날이 밝았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제 그 파리놈이 내 눈앞을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이 씨~”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욕이 나왔다. 왜 이렇게 파리는 뒷자석에서 날아다니지 않고 내 눈앞에서 붕붕거리는 걸까?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파리들이 이렇게 운전사를 짜증 나게 한다.


놈을 무시하며 달리는데, 자신이 무시당하는게 화가 나는지 놈이 대담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은 내 손등 위에 내려앉은 것이다. 다른 손으로 놈이 앉아 있던 내 왼손바닥을 내려쳤다. 트럭이 크게 흔들렸고 놈은 나를 비웃듯이 날아가 버렸다.


한참 후에 그 녀석은 GPS 화면 위에 앉아 돌아다녔다. 그리곤 가만히 멈춰 두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살그머니 모자를 벗고 녀석을 노려봤다. 그 녀석의 허점을 노려 모자로 gps를 내려쳤다. GPS 흡착판이 떨어졌고 트럭이 또 한번 크게 흔들렸다. 녀석은 나의 되도 않는 시도를 비웃는 듯이 다시 내 눈 주위를 몇 번 빙빙 돈 후 운전석 옆 차창에 자리를 잡았다. 놈을 놀래키지 않으려 조심하며 가만히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보통 이렇게 하면 파리들은 바람에 빨려 밖으로 쫓겨나곤 한다. 그런데 이놈은 그 경우가 아니었다. 창문이 열리기 시작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올라 뒷편 침대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성가시기 짝이 없는 놈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릴 땐 파리가 참 많았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보기가 힘들어진 셈이기는 하다. 특히 캐나다로 이사 와서는 집에서 파리를 접한 기억이 별로 없다. 여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나 가끔 파리를 본다. 근데 지금은 12월 말이다.


여튼, 어릴 때 파리와 관련된 기억이 참 많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디나 파리가 있었다. 대부분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어서 파리를 잡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많았다. 독극물을 밥에 섞어서 접시에 놓아 두면 파리가 먹고 죽었다. 그 접시 주변으로 파리 시체가 즐비했다. 천장에 끈끈이를 쭉 매달아 놓기도 했다. 파리들이 끈끈이에 붙어 잔뜩 죽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파리채가 있었는데 그걸로 파리를 잡으며 노는게 나의 일상이기도 했다.


파리를 이렇게 잡아 대는 건, 이놈이 음식물에 앉으면 알을 까고, 곧 그 음식은 구더기로 뒤덮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상에 올려져 있던 고등어구이에서 뭔가 꿈틀대 자세히 보니 한쪽이 완전히 구더기로 뒤덮여 있는 것도 봤다. 김치와 풀떼기 뿐인 밥상 위에서 유일한 단백질원이었던 고등어구이를 그렇게 못먹게 돼서 무척 화가 났었다.


파리에 대한 두서없는 잡상을 하며 운전을 하고 있는데 이녀석이 또 내 눈앞에서 붕붕거린다. “너 인마 조심해! 나 어릴 때 너 많이 죽였어.” 놈에게 경고했다.


어릴 때 곧잘 파리를 가지고 놀았다. 비닐봉지로 파리를 생포하면 날개를 떼고 다리를 뽑으며 고문했다. 생포한 파리를 모기향 연기에 갖다 대고 죽는지 어떤지 실험하기도 했다. 결국 모기향 연기는 파리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서서히 모기향 불꽃에 놈을 갖다 대고 불고문을 하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파리 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예전처럼 음식물을 바깥에 방치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놈이 나의 안전에 해가 될 확률은 0%에 근접한다.


어릴 때, 파리 흔적은 어디에나 있었다. 화장실에 가면 구더기들이 드글거렸다. 그놈들은 짧은 번데기 과정을 거쳐 파리로 변신할 거였다. 파리들은 음식을 먹은 후 벽에 붙어 다시 게워낸다. 그리고 그걸 다시 빨아 먹는다. 파리가 그 짓을 한 후에는 검은 반점이 남는다. 집안 벽지와 천장과 형광등에 파리가 남긴 검은 반점들이 그득했다.


다음 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북쪽으로 올라가며 날이 선선해져서 살 만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파리놈이 다시 나타났다. “야 인마, 너 빨리 나가야 돼. 위로 올라가면 추워서 너 못 살아.” 놈에게 경고했다.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이놈은 도대체 어떤 인연으로 나와 같이 여행하게 된 걸까? 이놈은 언제 태어났을까? 얘는 어디서 구더기 시절을 보냈을까? 번데기에서 파리로 우화했을 때, 놈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놈과 여러 가지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우리끼리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는게 참으로 안타까워졌다.


“너는 알에서 깨어난 순간을 기억하니? 네가 알에서 나왔을 땐 조그만 귀여운 구더기였겠구나! 번데기에서 파리로 변했을 땐 어떤 기분이었니?”


놈에게 두서없이 질문했다. 대답을 절대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모처럼 시작한 대화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너랑 비슷한 경험이 있어. 몇 년 전에 갑자기 캐나다로 이사 왔어. 알고 있던 모든 사람을 뒤로 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게 된 거지. 완전히 인생이 리셋된 거야. 그러니 네가 갑자기 번데기에서 파리가 됐을 때 기분이 이해될 것도 같다.”


녀석은 내 앞에서 도발을 해도 내가 반응하지 않고 이상한 말들을 해대자 실망했는지 멀찍이 앉아 두 다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놈은 한국에서 보던 파리보단 약간 작은 몸집을 하고 있었다. 대시보드에서 이리로 걷다가, 저리로 걷다가, 가만히 앉아 두 다리를 비비다가, 그 팔로 다시 자기 머리를 쓸어내리기도 했다. 며칠 밥을 못 먹었는지 놈의 배가 홀쭉했다.


갑자기 내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됐다. 파리에게 말을 걸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냥 앞만 보며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상하게 눈동자 안에서 비가 오는 듯 윈드 쉴드 너머 풍경이 흐릿해졌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아내가 싸준 된장찌개를 해동해서 먹었다. 뒷정리를 하고 바닥에 떨어진, 된장찌개에 버무려진 밥알 몇 개를, 마치 못 보고 실수로 빠뜨린 것처럼, 테이블 위에 남겨 놨다. 먹던가 말던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은 점점 추워졌다. 간간히 내리던 비는 눈으로 변한지 오래다. 히터를 틀어 놓은 덕분에 캡 안은 훈훈했다. 덕분에 파리놈은 내 앞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다. “한계점은 넘었다, 인마. 넌 지금 나가면 10분 안에 얼어 죽을거다. 꼴 좋다.” 알아들을 리 없는 말을 놈에게 쏘아 줬다.


갑자기 어릴 때 tv에서 본 찰스 린드버그에 대한 흑백 영화가 생각났다. 그는 최초로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무착륙 단독 비행을 성공시킨 사람이다. 33시간 동안 그는 단 한숨도 못 자며 대서양을 건넜다. 영화는 33시간 동안의 그의 고독을 그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된 그에겐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비행기에 몰래 탑승한 파리 한 마리였다. 그는 파리와 여러 가지 대화를 하며 대서양을 건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영화적인 설정일 뿐이다. 린드버그의 비행기는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창문조차도 없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방한복을 잔뜩 껴입고 추위에 덜덜 떠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런 환경속에 어떻게 파리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린드버그와는 달리 나의 파리는 진짜다. 봐라, 이렇게 내 눈앞에서 붕붕거리고 있지 않는가. 차창 밖으로 세상은 눈으로 뒤덮인 완벽한 겨울 풍경이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있는 겨울 풍경! 특이하면서 운치 있다.


“야 밖에 눈이 보이니? 파리 중에서 죽기 전에 겨울 풍경을 보는 놈이 과연 몇 마리나 될까? 너 임마 참 운 좋은 줄 알아라. 나 때문에 눈 구경도 하고 말이다. 히히!”


내 눈앞의 파리처럼 나도 이레귤러다. 태어난 나라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갑자기 다른 나라로 이사 가서 정착하는, 이른바 이민이라는 것을 하는 삶도 극히 드문 종류의 인생이다. 잘못 탄 트럭에 이끌려 겨울 속으로 끌려온 이 파리처럼, 나도 부지불식간에 삶의 흐름을 따르다 보니 지구 반대편으로 이민을 하게 됐고,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못 했던 트럭 운전을 하며 북미대륙을 누비고 있다.


그날 일을 마치고 며칠 만에 샤워를 하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히터가 잘 켜져 있는지 확인을 한 후 파리가 주변에 없는 것을 꼼꼼히 체크한 다음에 트럭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 다시 한번 파리가 주변에 없는 걸 확인한 후 밖으로 나가서 재빨리 트럭 문을 닫았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조심조심 트럭 안으로 들어왔다. 파리 녀석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밖으로 빨려 나간 것은 아니겠지, 약간의 걱정 속에서 잠 잘 준비를 했다.


다음 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날은 더욱 거칠어졌다. 수은주는 영하 20도를 밑돌았다. 한참을 달리다가 드디어 파리녀석이 기력을 되찾았는지 내 눈앞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안도감이 들었다. “야 이 녀석, 어제 밖에 빨려 나가서 얼어 죽었는 줄 알았다, 인마.” 또다시 주저리 주저리 되도 않는 말들을 파리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장거리 트럭 운전은 외로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트럭 운전사들이 애완동물을 태우고 다닌다. 어떤 트럭 스탑에는 이런 애완견을 위한 Unleashed dog park 까지 있다. 우연하게 히치하이킹을 한 파리 녀석과 대화를 하다 보니 애완견을 태우고 트럭을 모는 운전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트립을 처음 시작했던, 감자튀김을 실었던 바로 그 장소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들려 서류를 건내고 도어를 지정받을 때 같은 회사 운전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이 회사에 입사 지원했을 때 나를 테스트했던 운전사였다. 그때 그는 내 실력을 탐탁치 않아 했는데, 전화 면접을 한 사람의 요청으로 내가 전 직장을 미리 때려친 것을 알고 마지못해 합격시켜 줬었다.


“헤이~ 여기로 배달을 왔어? 흔하지 않은 일이군. 어디서부터 온 거야?”


“루이지애나”


“정말? 먼 데서도 왔네! 네가 거기서부터 올 실력이 되는지 의심스러운 걸?”


“호, 못 믿겠다면 증거를 보여 줄 수도 있어. 거기서부터 따라온 파리 한 마리가 내 트럭 안에 날아다니고 있거든. 한번 볼래?”


주변의 다른 운전사들과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한바탕 웃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12월에 어울리지 않은, 날아다니는 파리라는 그림이 그들을 빵 터뜨렸을 것이다.


배달을 마치고 오코톡스의 회사 야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다. 보통 집에 가기 위해 회사 야드를 향할 땐 무척 즐거운 기분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 파리놈을 어떡하지? 집에 데려가면 제일 좋으련만 이놈이 순순히 잡혀 줄 것인가?


걱정 속에서 회사 야드에 도착했다. 빈 트레일러를 분리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파리 녀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짐을 다 챙기고 나서도 침대에 걸터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시동을 끈 트럭 내부는 점차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포기하고 주차장에 주차된 내 차를 트럭 옆에 세웠다. 트럭 캡에서 짐들을 승용차 트렁크로 옮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캡 안을 살폈다. 주변 풍경과 캡 안의 기온은 더 이상 날아다니는 파리가 어울리지 않은 상황이 됐다. 트럭 문을 쾅 닫았다. 내 마음의 문도 쾅 닫혔다.


예열이 덜 되어 아직도 끼릭거리는 엔진소리가 요란한 오래된 내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나의 중고 승용차처럼 오래된 내 가슴 속의 뭔가도 계속 끼릭거렸다.


야매요리 : 지라시 스시 집에서 만들어 먹기

 가물에 콩나듯이 집에서 요리를 하면 아내가 아주 좋아한다. 가끔은 뭐, 부엌 어지럽힌다고 혼날때도 있지만, 언제나 내가 요리를 하면 환영받는다. 한국에 있을 땐 주로 만만한 파스타나 스테이크를 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 스시가 있다. 아내와 나는 일본 생활 경험이 좀 있다. 아, 사실 아내를 처음 만난게 일본에서였다. 그래서 한국에선 아직 스시라는 음식이 인기를 얻기 전부터, 아내와 나는 일본에서 본토 스시를 자주 경험해 봤다. 때문에 나에게 있어 스시의 질에 대한 요구사항은 허들이 좀 높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고 이제 모든걸 포기한 상태다. 집 근처에 있는 킨조니, 타쿠미 스시에서 파는, 국적불명의 스시에도 타협하는 몸이 돼버렸다. 아내는 더욱 더 퇴보하여 킨조 스시 세트를 맛있게 즐겨 먹는다. 따라서 나도 자주 먹는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일반적인 캘리포니아 롤이니 다이너마이트 롤 같은건 아직도 용납을 못하겠다.


스시의 근본은 니기리 스시다. 일본말로 니기루 - (손으로) 잡다, 쥐다 정도의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밥을 손으로 쥐어서 모양을 만든 후 생선회등을 올린 스시다. 여기서 밥을 쥐지 않고 그냥 그릇에 담은 후 여러가지 생선회를 덮밥처럼 올리면 지라시 스시(일본어 발음법칙상 정확하게는 지라시즈시라고 한다) 가 된다. 일본말 지라스 - 어지르다, 흐뜨러트리다에서 파생됐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 때 회사 근처의 일식집에서 푸짐한 지라시 스시를 팔았다. 아내와 점심때 자주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는 했다.


일반적인 니기리 스시보다 지라시 스시는 직접 만들기가 쉽다. 밥을 손으로 쥐는 기술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손쉽게 집에서 지라시 스시를 만들어보자.

아시안 마트에 가면 이런게 있다. 스시초다. 이걸 뜨거운 밥에 살살 뿌려서 섞어주면 시큼달달한 스시용 밥이 딱 만들어진다. 귀찮게 집에서 식초와 물과 설탕을 섞어서 촛물을 만들 필요 없다.

중국계 T&T 수퍼마켓에선 이런 사시미와 날치알을 판다. 사시미셋트엔 세 가지 사시미가 세 조각씩, 그리고 생새우, 북방대합조개, 다마고가 각 두 조각이 들어있다. 대충 3인분의 지라시 스시를 만들 수 있다.


역시 한국 마트, 중국 마트에선 이런 냉동된 장어구이를 발견할 수 있다. 내 경험상 이런 장어는 크면 클수록 부드럽고 맛있다. 싸다고 작은놈을 고르면 실망한다. 이것의 요리는 전자랜지를 사용하거나, 오븐을 사용하거나, 그냥 봉지채로 끓는 물에 집어넣는거다. 전자랜지는 쳐다보지도 말자. 오븐에 가열하면 좀 마르는 느낌이 든다. 그냥 끓는 물에서 가열했을 때 가장 부드럽고 촉촉하고 맛있었다.

참고로, 회를 생략하고 장어만 잔뜩 올리면 바로 장어덮밥이 된다.

초밥을 그릇에 담고 위 재료를 밥 위에 올려준다. 그럴듯한 지라시 스시 완성이다.


아내와 아들에게 칭찬받은 후 나는 지라시 스시를 안주삼에 반주하며 행복한 저녁을 보낸다. 치어스~


이민자들의 삶은 영어가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밀 엄수 및 5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동종업계 활동 금지'


한국에서 마지막 회사를 사임할 때 날인하여야만 했던 각서의 핵심 조항이다. 이후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상당한 재산을 잃는 등 사회의 쓴 맛을 보고야 말았다. 하려던 일도 사기로 틀어지고 원래 했던 일도 각서에 의해 못하게 되었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사나 아내와 손가락을 빨며 고민하고 있을 때, 뉴질랜드에 있는 처형이 연락을 해 왔다.


'얘들아, 이리로 와! 여기 너희 같은 기술 가진 사람들 쉽게 올 수 있어.'


이때 처음으로 이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상의한 후 뉴질랜드는 너무 작을것 같아 그 옆 나라인 호주를 염두에 두었다. 출장으로 몇번 왔다갔다 해서 좀 익숙한 나라이기도 했다.


이민 신청을 위해 아이엘츠 IELTS 영어 시험을 보았다. 전형적인 한국인 성적 - 리딩과 라이팅은 높고 스피킹과 리스닝은 형편없는 - 을 받았다. 스피킹 성적이 호주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미달했다. 그런데 또다른 주요 이민 수용국인 캐나다는 내 점수로 전문인력이민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플랜 B로 캐나다에도 이민 신청을 해 놓고 좀 더 공부해서 아이엘츠 시험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런데 시험 성적이 오르기는 커녕 더 떨어지는 것이었다.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되어 그냥 영어 성적에 맞춰 캐나다로 진로를 바꿨다. 즉 나의 영어 실력이 나를 캐나다로 인도한 것이다.


이렇게 영어라는 언어는 사람이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볼지, 혹은 남십자성을 보고 살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비록 전문인력으로서 캐나다로 건너 왔지만 나는 내 분야의 일자리를 잡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읽고 쓰는 건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프로페셔널한 현장에서 듣고 말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나는 프로젝트를 관리해야 할 입장인데, 나의 영어 실력으로 그런 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벼룩도 낯짝이 있지' 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거였다. 그래서 집착을 버리고 금방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나는 현재 장거리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이 또한 나의 영어 실력이 겨우 허락하는 자리다.


썩 나쁘지 않다. 매일 아침 동틀 무렵, 동녘 하늘에 밝게 빛나는 금성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 발밑에서 도로는 최대 시속 70마일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 처음 트럭커가 된 사람의 90%가 3개월 안에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둔다는데 요행히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풍경이 바뀐다. 하루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을 만날 때도 있다. 12월에 후덥지근한 루이지애나에서 무단승차한 파리 한 마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영하 20도를 밑도는 캘거리까지 3박 4일간 동행하기도 했다. 꼼짝없이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직업. 아직은 나쁘지 않다.


아내 또한 집 근처 리타이어먼트 센터에서 전무후무한 멀티 롤 워커로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하고 있다. 여러 파트가 아내를 원해서 어쩔 수 없이 두 파트에서 번갈아 혹은 동시에 일하며 혹사 당하고 있다. 아내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지만 역시 영어 때문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자리다.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집에서 다음 트립을 위해 옷장을 뒤적이다 보면 예전에 애용하던 수트와 넥타이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것들은 영어 실력이 형편없는 주인을 만난 죄로 조만간 죄다 버려질 운명이다. 쓸데없이 멀리 한국에서부터 가져오는 수고를 했다.


도대체 무슨 헛된 희망을 품었던 거냐?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뉴질랜드로 갔을 걸! 그러면 최소한 아내가 외롭지는 않았을 텐데…


이민자들의 삶은 영어가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 씨, 영어공부좀 할걸!


캐나다에서 담석증으로 응급 수술받은 이야기

 저는 쓸개에 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간혹 아프면 응급실에서 준 진통제를 먹고는 했죠. 캐나다에 살고 있습니다.


월요일 진통제가 다 떨어져서 처방전을 얻으려고 워크인(예약 없이 갈 수 있는 클리닉)을 갔습니다. 거기는 제 패닥(패밀리 닥터)이 있는 곳이었는데요, 제 패닥은 흑인이고 영어발음이 원어민이 아니고 이름이 100% 회교도인 사람입니다. 무슨 모하메드, 알리 이런게 막 들어간 긴 이름이죠.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제 패닥이 무척 한가했나봐요. 예약도 없었는데 단 15분만에 5명의 의사중에서 제 패닥을 바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제 아파서 이 약 먹었음. 지금 점심먹고 또 약간씩 아파지고 있음. 처방전좀 줄래?'

'잠깐 누워봐.' 여기저기 누르고 하더니... '처방전 안줌. 레터 써줄테니 응급실로 바로 가.'

'어, 잠깐! 나 이 주 후에 한국가. 그냥 약 처방전만 주면 안됨?'

'그냥 구멍 두 개 뚫는 수술임. 수술하고 가도 됨. 빨랑 응급실로 가셈.'


그래서 레터에 있는 큰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오후 네 시 쯤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점점 아파지더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는 거였습니다.


응급실에서 피검사, 심전도, 초음파 검사 등을 했고요, 그 다음날 새벽 두시부터 입원해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단식 17시간여가 지난 오후 5시 반 쯤에 수술했고 수술 다음날 오후 네시쯤 퇴원했습니다.


일단, 제 패닥인 알리에게 따져야 할 게 있네요. 제 배엔 구멍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의 구멍이 현재 뚫려 있습니다. 물론 두 개의 구멍은 무척 작은거지만요.


제가 한국에서도 병원과 별로 안친한 사람이라서 한국과의 비교는 잘 못합니다만, 느낀점 들입니다.


내 배는 동네북


많은 의사를 만났습니다. 응급실 의사, 수술 의사들, 회진 의사들... 모두 저를 보면 제 배를 이곳저곳 두들기고 눌러보고 진짜 성심껏 봐주네요. 고마웠습니다. 미드 하우스, ER, 그레이스아나토미 등의 등장인물들이 막 저를 주물거리는것 같더라고요. 나중엔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서 제가 막 의학 미드에 출연중인것만 같았습니다.


설명충들


정말 말 많아요. '네 담당엔 돌이 몇개 있는데... 이래서 저래서 아픈거고 지금 안아픈 이유는 어쩌구 저쩌구... 그렇다고 앞으로도 괜찮다는건 아니고... 이런 수술인데... 수술 과정중엔 과다출혈, 내장 손상, 감염 등의 사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저쩌구 어쩌구...' 이런 설명을 끝간데 없이 합니다.


그런데 이게 1인에게 오는게 아니라요, 전형적인 백인 미녀 의사가 수술모를 쓴 채로 정말로 피곤한 모습으로 목이 확 가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이미 여러번 들었던 말을 또 해주는 겁니다. 시간은 이미 새벽 한 시 였고 전 정말 그 의사를 쉬게 해주고 싶었어요.


'아니, 잠깐, 내가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이미 어떤 여자의사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었거덩?'

'아 그래? 체크해 볼게.' 저 쪽의 단말과 서류를 체크하더니 돌아와선 '나한텐 자료 없네. 그냥 또 들어. 그래서 이런 사고는 5000명 중에 한 번 일어나는데 그런 경우엔 ...'


장황한 설명이 끝난 후 그 의사가 일어났을 때, 아~ 배불뚝이 임산부였습니다. 이거 임산부를 너무 학대하는거 아닙니까?


의사뿐만이 아니라 간호사들도 설명충이었습니다. 아줌마 간호사가 수액과 함께 조그만 약재를 같이 연결하면서


'이 약은 항생제인데 감염 예방 차원에서 놓는거야.'


할머니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면서도


'이 주사는 피가 잘 굳게 하지 않는건데 네가 장시간 누워있을 때 다리에서 혈전같은게 생겨서 혈관을 막지 않도록 돕는거야. 이건 조금 아플건데 자, 지금부터 코로 숨쉬고 잎으로 뱉어. 아니아니, 그렇게 빨리하면 과호흡돼. 나 따라서 흐읍~파~흐읍~파~. 옳지 끝났다.'


의심충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제게 뭔가 조치를 취하기 전엔 끊임없이 제게 저에 대한 사항을 물어봤습니다. 이럴 거면 팔목엔 왜 신원확인용 팔찌를 두 개나 끼워놨는 모르겠네요.


'당신 이름은? 생년월일은? 여기 왜 와있지?' 이런거를 물어본후에야 제 손목의 팔찌를 확인하고 피를 뽑거나 검사를 하더군요.


의사들이 물어보는 것은 여기에 더 추가됩니다.


'알러지는? 병력은? 먹고있는 약은?' 등등이요.


압권은 수술실에서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간호사 누구누구고요, 오늘 수술팀중에 한명이에요.'

'헉~ 안녕하세요.'

'영어 잘 하세요? 영어이름 있으세요?'

'아니요. 아니요'

'그럼 한국어로 할게요. 이름이 뭐에요? 생년월일은요? 여기 무슨수술 하러 오셨어요? 여기 서류에 싸인하신게 어디어디에요?'


한국인 간호사가 계셨어요. 뭐, 여러명의 수술팀들과 바쁘셔서 이야기 나눌 틈은 없었습니다만 반가웠습니다.


최신 시설


와~ 그 침대. 병실에서 제가 썼던 그 침대를 집에 가져오고 싶었습니다. 간호사나 의사의 필요에 의해 높낮이가 조절됨은 물론이고 등받이 발높이등이 조절됨은 물론 매트리스의 단단함/푹신함까지 조정이 가능하더군요. 물론 모든 조정은 원터치 전동식이었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제 팔뚝에는 원격 혈압 측정기가, 양 다리엔 발목부터 무릎 아래까지 뭔가가 감싸고 있었는데 주기적으로 안마하듯 꽉 조였다가 풀어주고는 하더군요.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아마 다리 혈액 순환을 돕는 장치였겠죠?


만장일치제 퇴원제도?


사실 전신마취가 풀리고 제 방광이 좀 시원찮았어요. 한동안 소변을 못보다가 겨우 보기 시작한게 10~20분마다 100ml, 200ml 씩 찔끔찔끔 나오더군요. 결국 의사의 지시로 카테터를 삽입하고 소변을 배출했죠. 두 명의 젊은 여성 간호사들이 카테터 처치를 한 건 좀 창피했습니다. 이런건 남자 간호사한테 시키지…


회진 도는 의사가 집에 가도 된다고 해서 룰루랄라 사복으로 갈아입고 최종 퇴원 오더만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간호사가 오더니,


'의사중 한명이 너 방광기능이 확실히 돌아온것이 확인되야 퇴원시켜 주겠단다. 소변 보고 방광스캔 한 후에 집에 갈 수 있다.'


그래서 평상복 차림으로 한숨 잔 후 450ml의 소변을 본 후, bladder scanner로 제 소변이 50ml 미만 잔존한걸 간호사의 축하속에 확인한 후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참 친절하고 신속한 의료서비스였습니다. 어디 한군데 불만을 말할 수가 없네요. 정말 고마운 경험이었습니다.


캐나다에서의 의료 경험담은 항상 이렇게 끝나야 제맛이죠 : 이 모든 비용은 무료였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사항을 하나 빠뜨렸어요. 한국병원 처럼 보호자가 환자와 같이 지내지 못합니다. 보호자용 간이침대 같은 것 없습니다. 라틴계로 보이는 여사님 두 분이 환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셨습니다.


아래 글처럼 보호자는 단호하게 쫓겨납니다.


안돼! 네 남편은 이제 내꺼야. 넌 집에 가!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_17.html


그리고 병실은 유니섹스입니다. 제 기억에 네명 정도가 한 병실에 있었던 것 같아요. 병원은 Foothill medical centre 였습니다.


이 글이 향후 절대 도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항상 건강하시라는 뜻입니다. :)


캐나다에서 복통으로 응급실간 이야기

저는 철근을 잘근잘근 씹어 삼켜도 소화를 시키는 튼튼한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벼운 소화불량은 그간 몇번 겪어봤지만 위궤양이니 속쓰림이니 과민성 증후군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11시 반에 복통에 잠이 깬 후 데구데굴 구르다가 결국 못참고 새벽 1시 반에 차를 몰아 응급실에 달려갔습니다. 이것저것 검사하고 약받고 결국 아침 10시 반쯤에 멀쩡한 모습으로 병원을 나왔습니다. 11시쯤 집에 도착하여 쓰러져서 죽은듯이 자다가 좀 전에 일어나 저녁먹고 지금 이걸 끄적이고 있습니다.


1:40

아내는 911을 부르자고 했습니다만 만류했습니다.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병원과 친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살고 있는 도시에 어떤 병원이 있고 어디에 가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구글을 했습니다. 검색어는 'Calgary Emergency'. 오, 놀라워라, 알버타주 의료서비스 공식 사이트에서 갈 수 있는 응급실과 현재 평균 대기시간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시간이 꽤 짧았던 병원은 집에서 좀 거리가 있기에 그 다음 짧은 대기시간을 가진 집근처의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그 병원의 평균 대기시간에 2시간 20분 정도였습니다.


한적한 분위기의 응급실에 도착하니 역시 커다란 전광판에 대기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확인한 시간과 대동소이했습니다. 처음 만나야 할 사람은 간호사입니다. Triage Nurse라고 합니다. 환자의 상태를 보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간호사 입니다. 대충 상황을 설명합니다.


'배 무척 아픔. 저녁에 프라이드치킨이랑 아이스티 먹었음.'

'언제부터? 어느부위? 날카롭게 혹은 찌르듯이 혹은 타는듯이?'

'지난밤 11시 반. 자다가 아파서 깼음. 상복부가 날카롭게 빼고 아파.'

'아픔이 1에서 10만큼 중에 어느정도 아프니?'

'8에서 9.'

'어지러움? 토함? 설사?'

'아니'

'과거력은? 병력은? 알러지는? 먹고있는 약은? 패밀리닥터는?'

'모두 없음'

'의료보험 카드는?'

'있음'


그리고서 바이탈 계측을 합니다. 혈압이 150 중반대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높은 혈압을 가진 적이 없었기에 제가 좀 놀란 표정을 했습니다.


'너 지금 아파서 그래. 이제 접수로 가면 돼.'


다음에 접수로 갑니다.


'의료보험 카드, 이름, 전화번호, 주소 줘.'

'여기'

'미혼? 동거? 결혼?'

'결혼'

'배우자 이름과 전화번호 줘'

'여기. 얼마나 걸릴까?'

'대략 두 시간 정도. 그런데 급한 환자가 들어오면 늘어날 수 있음.'


2:10

그리곤 아내와 같이 대기실에 죽치고 앉았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저절로 나아지길 희망하며...


2:50

갑자기 제 이름이 크게 호출됩니다. 예상했던것보다 무척 이른 시간입니다. 아내는 대기실에 남고 저만 응급실로 들어갑니다. 응급실 내부는 꽤 큰것 같은데 이리저리 미로처럼 구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정된 침대에 환자복이 놓여있습니다. 근처의 하품하며 모니터를 지켜보던 남자간호사에 물어봤습니다.


'나 이거 입어야함?'

'응. 원한다면 바지는 벗지 마'


환자복은 뒤면이 뻥 터진 원피스입니다. 생소하군요.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기대서 끙끙거리고 있었더니 아까 그 남자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옵니다.


'안녕. 난 앙드레야. 어디가 아프니?'

'배가 무척 아파. 내 배가 나를 죽이고 있어.'

'어떻게 아프니?'

'무딘 칼이 내 배를 찌르는것 같아.'

'어떻게 알았니?'

'저녁먹고 자다가 지난밤 11시반에...'

'아파서 깼구나, 내친구.'

'응.'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내친구.'


다시 바이탈을 체크합니다. 혈압은 159에 이르렀습니다. 제 혈관을 개방합니다. 피를 세 병 뽑고 소변을 받아오게 합니다. 잠시 어떤 여자분이 오더니 심전도 검사를 하고 갑니다. 이제 검사 결과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중간중간 계속 제 바이탈을 잽니다. 통증은 계속됩니다만 혈압은 130 중간대까지 떨어집니다.


5:00

의사가 옵니다. 또 같은 내용을 물어봅니다. 어떻게 언제부터 아프냐 등등... 그리고...


'일단 진통제를 줄건데 주사와 입으로 먹는것중에 뭘로 할래?'

'약으로...'

'??? 그래 약을 줄건데 주사가 좋아 입으로 먹는게 좋아?'

'아, 입으로'

'니가 아픈 이유는 췌장 아니면 담낭같아. 초음파 검사를 할꺼야.'

'아, 나 담낭결석있어.'

'그건 어떻게 알았니?'

'한국에서 초음파한적 있어.'

'언제?'

'올해 봄에.'

'알았어. 근데 초음파 검사실은 7시부터 시작해. 너는 집에 갔다 오거나 여기서 계속 기다릴수 있어. 어떻해 할래?'

'기다릴게'


좀 있다가 앙드레가 파란 알약 두 알과 물을 가져다 줍니다. 약을 먹자 거짓말같이 통증이 사라집니다. 잠시후에 바이탈 사인을 재니 혈압이 정확히 120/80이 나옵니다.


'이야, 정확이 텍스트북에 나오는 수치다. 내 옛날 선생이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 하하하'


앙드레가 너스레를 떨고 갑니다.


7:50

이제 아침입니다. 앙드레는 집에 가고 젊은 여자 간호사가 이제 저의 바이탈을 재며 케어해 줍니다. 밤시간대의 비교적 젊은 의사들은 사라지고 이제 희끗희끗한 의사들이 이곳저곳 바쁘게 움직입니다.

갑자기 스텝 한분이 휠체어를 가져와선 제 이름을 부릅니다. 휠체어에 실려서 응급실을 벗어나 복도를 지나지나서 초음파실에 도착합니다. 초음파 검사를 합니다.


8:20

다시 응급실로 실려옵니다. 복통도 가시고 충분히 걸을 수 있는데 못걷게 합니다.


10:00

키다리 의사가 옵니다.

'안녕. 내이름은 ... 야. 검사 결과, 비록 담낭결석이 관을 막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너의 담낭은 붓지 안았어. 담낭관도 괜찮아. 또 통증이 오는걸 대비해서 약을 좀 줄게. 아프면 먹어. 프라이드치킨같은건 이젠 피해. 술도 마시지 마. 만약에 아프면서 동시에 열이 난다면 오늘 새벽처럼 응급실로 급히 와야해. 너는 패밀리닥터를 지정해야해. 너의 패밀리닥터를 위해서 오늘 검사 결과를 복사해 줄게. 추가 약처방 등 이후의 경과는 패밀리닥터와 상담해야해. 그럼 안녕.'


그리고 잠시 기다린 후 제 혈관에 꼽아놓은 주사바늘을 제거한 후 저의 응급실 생활을 끝났습니다.


최종적으로 제 손엔 아편성 진통제 8개와 그 약에 대한 주의사항 3페이지, 그리고 미래의 패밀리닥터를 위한 제 검사결과지가 들려졌습니다. 결과지 결론은 통증이 담낭에서 비롯된것 같지는 않다. 췌장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꽤 부어있는것 같으니 CT scan이 고려된다... 라는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 새벽 1:40 부터 아침 10:00 까지 있었던 일입니다. 총 비용은 24시간 주차비 $14.?? 였습니다.


소감


1. 이래저래 말 많은 캐나다의 의료시스템이지만 죽을것 같을때 그냥 죽게 내버려둘것 같지는 않다.

2. 검사 결과는 췌장 CT를 하라는것 같은데 의사는 아무 말이 없네? 패밀리 닥터랑 얘기해야 하나?

3. 어휴, 아픈것 진짜 싫으다. 또 아프면 어쩌지?

4. 이걸 의료인 친목사이트인 ***에 올리면 통증의 근원적 제거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2015.11.4


환상적인 캐나다의 의료시스템(feat 거지같은 한국의 병원체계)

흔히들 캐나다 의료시스템이 후졌고 한국 의료보험과 병원 시스템이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그 반대 상황을 말합니다.


캐나다에 이민오자마자 한쪽 눈이 심하게 충혈됐습니다. 워크인 클리닉에 가서 2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만났습니다. 한참 보더니 모르겠다며 전문의를 추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열흘도 안 돼서 안과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안과로 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냥 아무 이상 없고 충혈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 의사의 말대로였습니다.


이 진료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갑자기 심한 복통이 와서 응급실에 갔습니다. 2시간을 기다려 응급실로 들어갔고 피검사, 뇌전도, 복부 초음파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담낭에 돌이 있다고 했습니다. 췌장이 약간 부은 것 같으나 아직 쓸개가 붓지는 않았으니 일단 마약성 진통제와 패밀리 닥터를 지정하라는 지시를 받고 나왔습니다.


이 진료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아내와 같이 집 근처 클리닉에 가서 패밀리 닥터를 지정했습니다. 접수에서 아무나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흑인이며 이슬람교인 사람이 담당의가 됐습니다. 그 패닥의 주선으로 열흘 정도 후에 CT촬영을 했습니다. 다행이 췌장은 이상이 없으니 담낭 절제 수술을 추천 받았습니다. 무서워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이 진료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수개월간 간간이 복통이 오면 응급실에서 준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습니다. 그런데 진통제가 떨어졌고 또 아팠습니다. 진통제를 처방받기 위해 페닥을 찾아갔습니다. 패닥은 진통제 처방을 거부하며 레터를 써주고서 바로 응급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툴툴거리며 응급실에 갔더니 바로 입원당했습니다. 그리고 24시간 후에 수술 받았습니다. 쓸개빠진 놈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 : 아내가 보호자로서 저와 함께 병원에서 밤을 지내길 원했습니다만 간호사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한국과는 달리 보호자나 간병인이 환자와 24시간 붙어 있는게 아닙니다. "병원 서비스에 간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진료와 수술과 입원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수술 이후 패닥의 주도하에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패닥은 제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고 했습니다. 그게 담낭에서 뭉쳐 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스타틴을 처방했습니다. 평생 먹으랍니다. 드디어 성인병을 얻었습니다. 저도 이제 어른입니다. 으하하하…


이 일련의 검사와 진료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단, 100일치 약값은 제가 내야 했습니다. 회사 보험이 적용되어 한 6불 몇 십센트 정도 냅니다. 하루에 6.5 센트 꼴이네요. 아까워라!


아내가 역류성 위염이 심하게 왔습니다. 페닥은 '너 한국인이니까 이 검사 한번 해 보자' 하며 헬리코박터균 검사를 했습니다. 과연 아내에게서 헬리코박터균이 나왔습니다. 한 달 정도 약을 먹고 또 검사를 했습니다. 짠! 치료됐습니다.


이 진료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헬리코박터균을 죽이는 약에 들어간 비용은 냈는지 어쨌는지 기억도 안납니다.


장인 어르신이 대장암 수술 경험이 있으십니다. 패닥은 가족 이력이 있으니 아내에게 대장 내시경 처방을 내렸습니다. 커다란 용종이 발견되어 제거했습니다. 조직 검사를 했습니다만 다행히 악성이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장 상태가 무척 호전됐습니다.


이 일련의 검사와 진료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캐나다나 한국이나 평균 수명이 비슷합니다. 한국이 약간 더 오래 사는데 의미를 둘만큼 크게 차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건강합니까?' 라는 설문 항목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캐나다인은 75% 정도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하는데 반해 한국인은 그 3분의 1도 안 되는 수치입니다(오래전 읽은 걸 기억에 의존해서 씀으로 수치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국 의사가 캐나다 병원에서 신부전 환자를 위한 브로셔를 읽었습니다. 신부전 환자의 옵션 중에 투석을 받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는 걸 보고, 한국인 의사는 캐나다 의료 시스템이 형편없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것을 보고 그 의사는 충격을 받습니다.


실제 신장이식 수술의 빈도가 한국보다 캐나다가 훨씬 높았던 겁니다. 즉 당신이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한 신부전 환자라면, 한국보다 캐나다에서 태어나는게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보더라도, 그리고 여러 가지 통계를 보더라도 저는 캐나다 의료 시스템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아래 글은 제가 예전에 어떤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내용입니다. 이 글에는 50여 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의사 여러분과 병원 관계자의 댓글이 많았습니다. 사실 본문보다는 댓글이 더 읽을 만합니다. 하지만 댓글은 제 것이 아니기에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본문만이라도 한번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


여기저기서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우수성을 이야기합니다. 싸고 빠르다는 거죠. 의료계분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상누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저도 여기저기 눈팅한 결과, OECD 대비 한국 정부의 의료비 재정 담당 비중이 하위권이고 의료인들의 희생에 의해서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다는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1년여간 중증 환자의 보호자로서 의료 소비자였었는데요, 개인적으론 과연 한국의 의료체계가 정상적인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참고로 환자는 반신불수의 뇌졸중이 갑자기 발병하였고 재활치료중에 말기 폐암이 발견되어 재활과 항암을 오가며 투병하다가 1년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문제점 1. 막대한 비용


치료비가 아닙니다. 재활 병원에서 매 달 수백만원의 비용을 부담했어야 했는데 그 비용은 바로 간병비였습니다. 모든 병원에서 간병인 고용 또는 환자 가족중 1인이 24시간 환자를 간병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병상에서 여유가 되는 가족은 24시간 간병인을, 처지가 어려운 분들은 12시간제로 간병인을 쓰고 가족중 1인이 밤을 환자와 지세운 후 아침에 다시 직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였고, 그럴 형편조차 안되는 가족은 가족중 1인이 24시간 환자와 함께 장기간 병원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재활병원뿐 아니라 항암 치료와 합병증으로 인한 폐렴이나 폐수 치료를 위해 큰 병원에 전원했을 때조차 환자의 모든 수발을 위해 가족 1인이 환자와 함께 하며 대소변을 처리하여야 했습니다.


즉, 한국에서 거동이 불편한 중증 환자가 생기면 막대한 간병비를 부담하거나 환자 보호자 1인의 인생이 환자와 함께 병원에 감금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점 2. 메뚜기 환자들


뇌졸중이나 교통사고로 인해 재활 치료가 필요하면 환자는 메뚜기 생활을 해야 합니다. 큰 병원은 몇 주, 중소 재활 병원은 통상 3개월 이내만 입원이 가능합니다. 뭔가 의료보험상의 시스템에 의해서 한 환자는 그 이상 입원이 불가하답니다. 그래서 재활 환자의 가족의 큰 일 중 하나가 한 병원에 입원 후에 다음에 입원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서 헤메는 겁니다. 저 또한 이곳저곳 평판이 좋다는 병원을 찾아서 서울, 경기 곳곳을 헤맸습니다만 도데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물론 겨우 익숙해진 환경을 떠나 또다시 생경한 병실에서 낯선 사람들과 익숙해져야만 하는 환자의 부담보다는 작은 불편입니다만...


문제점 3. 또다른 착취


전문 간병인은 소수의 한국인과 대다수의 중국 동포입니다. 그들은 또한 간병인 파견 회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병원은 간병인 파견회사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환자가 A 병원에서 만난 간병인이 마음에 들어서 B 병원으로 옮길때 데려가고 싶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환자는 그 병원이 지정한 회사의 간병인만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부조리가 발생합니다. 강남의 모 병원에서 그들의 주 업무는 간병은 물론이고 병실 청소와 정리정돈입니다. 병원은 청소와 정리를 위한 인력을 고용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당연하다는듯이 병원 관계자는 간병과 관련없는 여러가지 일들을 간병인에게 시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한국의 뛰어난 의료보험 체계하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과연 외국은 어떠할까 하고요.


저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입니다. 한국음식 중에선...

 ... 보신탕 빼고는 다 잘먹습니다.



담배를 끊은 후 나름 식도락 취미에 약간 발목을 담가서 이민오기 전에는 집에서 맥주랑 전통주도 빚어먹고 참치(혼마구로) 대뱃살(오도로)같은것도 주문해서 직접 해동해 먹곤 했지요. 그리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선 주는대로, 있는대로 먹습니다. 아내와 떨어져 기러기 생활할 때는 몇달간 김치없이 지냈습니다. 저는 김치 없어도 평생 잘 살수 있습니다. 암요...


운이 좋아서 직장일로 세계 곳곳을 출장다닌일이 많았는데요, 제가 싫어하는 일중 하나가 외국 나가서 한국 음식점 가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사람이 움직이는 출장길에 저 혼자 행동하기가 쉽진 않았습니다. 특히 사회 초년병땐 말이죠.


한번은 부서장과 같이 도꾜로 출장을 갔습니다. 이양반이 일본 주재원 생활을 꽤 오래 한 사람이라 여기저기 저보다 훨씬 빠삭하더군요. 호텔에 짐을 푼 당일, 일정이 없기에 이양반이 주재원 시절 자기가 자주 가던 식당이 있다면서 긴자로 가자고 하더군요. 전 드디어 오랜만에 사시미라던가 스시라던가를 긴자의 고급 식당에서 먹는가보다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긴자 번화가의 뒷골목 허름한 건물 지하의 전라도식 추어탕집이었습니다. 도대체 일본까지 가서 왜 남원추어탕을 먹어야 하나요.


미국 워싱턴에 같은 사람과 출장을 갔습니다. 오랜 비행시간에 지쳐있는 와중에 이양반이, "모처럼 미국에 왔으니 고기먹으러 가자. 근처에 고깃집 알아놨다" 하더군요. 전 속으로, '와 드디어 미국식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어보나보다' 하고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한국식당이고 먹은 음식은 들척지근 양념 범벅의 특이할 것 없는 한국식 갈비...


또 한번은 전시회 및 컨퍼런스 참가차 싱가폴에 갔는데 거진 막판에 관광 분위기였습니다. 현지의 여행사 가이드가 일단의 참가자들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며칠간은 정말 현지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습다. 스팀보트며 피시볼 누들이며 호강하는 와중에 가이드가 '오늘 저녁은 어디서 드실래요? 한국식당? 현지식당?'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을 꺼네기도 전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한국식당이요.', '맞아, 며칠 김치를 못먹었더니 속이 느글느글 하네...' 하며 웅성웅성 하더군요. 식사비는 이미 전시회 참가비에 포함되어 있기에 어쩔수 없이 싱가폴에서 맛없는 된장찌개를 먹는 저는 속으로만 불만을 삭혀야만 했습니다. 누군가 김치찌게를 뜨며 말하길 "역시 한국놈은 김치를 먹어여 해~". 전 속으로 '난 한국놈 아니고 지구인이거든. 넌 편식하는 인간일 뿐이지, 흥' 하며 궁시렁 거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거하게 음식을 즐긴 출장도 꽤 됩니다. 특히 중국 상해로 일주일간 출장갔을땐 호텔 조식을 제외하고 하루 두 끼을 매일매일 중국 현지의 식장에서 코스로 즐겼는데요, 물론 메뉴는 못고르니 주는대로 먹었습니다만, 모두 중국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사천식이니 북경식이니 징기스칸이니 오리구이니 하며 지루하지 않게 즐겼습니다. 나중엔 일은 뒷전이고 식사시간만 기다려 지더군요.


중국에선 각 지역별 중국음식을 즐겼다면 호주에 약 한달간 출장땐 그야말로 하루에 두 나라씩 가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이민의 나라답게 세계 각국의 음식이 있었는데요, 점심은 말레이시아, 저녁은 미국, 다음날 점심은 베트남, 저녁은 태국, 다음날 점심엔 중국에서 딤섬을 먹고 저녁엔 그리스에서 지중해식 만찬을 즐기는 식이였습니다.


세상은 넓고 먹을건 많더군요.


전 캐나다 오면 호주에서와 비슷한 식생활을 누릴 줄 았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의 착각이였습니다. 스시를 먹어도 맛이 없고 중국집의 오렌지 치킨은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딱딱하고 에도니 테리야끼니 하는 식당에서 일본음식이라며 파는 국적 불명의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울 수단일 뿐입니다.


제가 처음만난 주변의 이민자와 공통점을 찾는 주제중 하나가 캐나다 음식 흉보기입니다. 이런식이죠...


걔 : "캐나다 오니깐 어때?"

나 : "응, 좋아, 음식 빼고..."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걔는 눈이 똥그래지면서 맞짱구를 쳐주며 함께 캐나다 음식을 흉보면서 breaking ice를 하게 되는 식이죠. 중국사람이던 콜롬비안이던 상관 없이 말이죠. 단, 영국에서 이민온사람에겐 피해야할 방식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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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맛있게 처음 경험한 음식중에 하나가 인도음식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커리 소스가 상 가운데 서빙되고 이를 안남미로 지은 밥이나 난이라는 화덕에 구은 넓적한 밀가루 전병과 먹는 음식이었는데요, 참 인상깊고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지나서 서울 동대문 근처와 종로에 인도인이 만든 인도식, 파키스탄식 식당이 몇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서의 생각이 나서 아내와 함께 그 식당들중 하나에 가서 음식을 즐겼는데요, 아내도 참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자주 동대문과 종로의 인도식당을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지금 살고있는 집 근처에 샤프란이라는 무지 장사가 잘 되는 테이크아웃 전문 인도식당이 있습니다. 인도음식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그 음식을 테이크아웃 해서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잠시 음식을 오물거리던 아내가 한 말은...


"... 여기서 다시 사먹을 일은 없겠다 ..."


저도 동감입니다.


사방에 일본식당, 인도식당, 중국식당이 많지만 모두 캐나다인 입맛에 맞춰져 변형된 형태고, 그리고 이사람들 입맛은 틀림없이 영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ps

1. 며칠 전에 끄적인 글에 캐나다 맛집에 대한 요청글이 있어서 약 1년 전에 캐나다 이민자 모임 카페에 올린 글을 약간 수정하여 올립니다. 사실 캐나다 음식이 그렇게 심하진 않을꺼에요. 예전에 외국에서 접대 비슷한걸 받은 거고 지금은 생활이니까...


2. 저와 다른 식성을 가지신 분이 기분나쁘시라는 글이 전혀 아닙니다.


2015.7.5


캐나다 영주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며칠 전에 캐나다에서 한국인 영주권자가 타국에서 온 이민자보다 이득을 보고 있다는 글을 썼었는데 거기서 많은 분들이 기술이민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자유게시판이 참 맛있는데요, 갑자게 제가 거기에 재뿌리는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경고


여기에 있는 정보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법이 바뀌었고 많은 부분에서 변경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민법은 생물과 같으며 변덕스럽습니다. 취업 후 영주권 전단계인 LMO(현재는 LMIA) 라던가 취업 비자 승인/연장 등의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습니다. 가장 최신 정보는 캐나다 이민성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다른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 이 글을 포함하여 - 이미 과거의 이야기거나 이민 사기를 위한 허위일 수 있습니다.


영주권의 정의


캐나다 영주권이란 캐나다에 쭉 살 수 있는 비자를 뜻합니다. 캐나다 법은 영주권자를 내국인으로 분류합니다. 단지 선거권/피선거권이 없고 군대 지원 불가를 제외하면 모든 권리와 의무가 시민권자와 동일합니다. 심지어 캐나다 공무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 6년간 4년동안 캐나다에 살았다면 시민권 신청이 가능하며 심사를 통과하면 캐나다 시민이 됩니다. 캐나다에서 영주권자란 예비 캐나다인으로 취급되는것 같습니다. 단, 최근 5년간 2년 이상 캐나다에 거주하지 않으면 영주권이 취소됩니다. 영주권자가 금고 6개월 이상의 형을 받으면 형 만료 후 추방됩니다. 시민권자는 캐나다 바깥에 있어도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영주권자는 캐나다에서 출국하는 순간 그냥 외국인이 됩니다.


영주권의 종류


영주권은 모두 똑같습니다. 단, 영주권을 취득하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캐다나 영주권자/시민권자와 결혼을 하거나 부모나 자식이 초청을 하거나 투자나 사업을 하거나 난민신청을 하는 등등 다양합니다. 연방 정부 이외에 오지 지역에선 해당 지역의 대학을 졸업만 하면 영주권을 주는 프로그램도 과거엔 있었다고 합니다. 캐나다는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뤄져 있는데 각 주별로도 여러가지 이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 주별 프로그램은 해당 지역에 의무 거주하여야 하는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술이민이란?


캐나다 기술이민의 정식 명칭은 연방독립기술이민입니다. 이 이민 방법의 A to Z 은 캐나다 이민부 사이트 http://www.cic.gc.ca/english/index.asp 에 다 있습니다. 타국도 동일할 겁니다. 모든 정확한 정보는 해당국의 이민부 혹은 이민성 사이트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부족한 전문직/기술직들의 수요를 조사한 후 전 세계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만큼 필요하니 영주권 신청해 주세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캐나다 가고 싶은 해당 직군의 사람이 영주권 신청을 하면 심사 후에 영주권을 발급하는 겁니다.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은 damianhwang 님의 글인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53950 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기술이민의 장점은 가장 리스크가 작고(저처럼 캐나다에 한번도 안간 상태에서도 획득이 가능합니다), 가장 싸고(이주업체에 맡겨도 수수료가 250만 ~ 300만원이면 떡을 칩니다), 또 한번 가장 싸고(4인 가족 기준 약 $25,000 정도의 재산만 증명하면 됩니다), 가장 제약이 없고(사업을 안해도 되고 그 직장에 안다녀도 되고 아무데서나 살아도 됩니다), 가장 신속합니다(현지에 몇년간의 학업이나 취업이 전제되는게 아닙니다).


그럼 끝.









이러면 재미가 별로 없네요. 다시 시작합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부족한 전문직/기술직들의 수요를 조사한 후 전 세계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만큼 필요하니 영주권 신청해 주세요' 라는게 기술이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러이러한 사항은 경력, 영어, 신원, 건강 입니다. 기술이민을 하려는 사람들이 넘어야할 실제 허들입니다.


경력


실제로 캐나다에서 원하고 있는 직군의 사람이라는걸 증명해야 합니다. 해당 업체에서의 납세 기록과 직무 내역서 그리고 경력 증명서 등이 필요합니다. 간혹 프리랜서로 몇년간 경험이 있으신데 그간 현금결재만 하셔서 세금낸 흔적이 없다면 이 증명이 힘들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업무를 하기 위해서 교육받은 학위증, 면허증, 자격증 등이 첨부되어야 합니다.


영어


영어성적을 제출하여야 합니다. IELTS General module 시험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가장 넘기 힘든 허들이었습니다. 나이먹고 공부하려니 원, 복장이 터져서리...


신원


나이가 많지 않아야 합니다. 또 전과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음주운전 전과가 있었다면 5~10 년 정도가 지났어야 하고 캐나다 정부의 복권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외국에서 6개월 이상 체재하였다면 체재했던 모든 나라에서 Police report를 발급하여 제출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폭력사건으로 두 건 이상 경찰 조사를 받은 사항이 있다면 영주권은 힘들다고 합니다. 이민을 추진하시려는 분들은 모든 가족의 경찰서 신원조회서(실효형 포함)를 먼저 발급하여 보시고 미리 상황에 대처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간호사 이민을 추진하시던 분이 남편의 까마득한 과거의 조그마한 경찰기록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경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건강


모든 서류검토가 끝나면 전 가족이 건강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 몇군데 지정병원에서만 합니다. 건강검진 요청은 무척 시급하게 온 기억이 납니다. "일주일 안에 받을 것. 예외 없음" 이라는 식으로 기억됩니다. 건강검진에서 에이즈 같은 전염병이 있으면 안됩니다. 가족 구성원중 한명이 지속적으로 많은 복지비용을 유발하는 질병(자폐증 등)이 있으면 안됩니다. 실제 캐나다 초급학교엔 단 한 명의 장애인을 위해서 전담 보조교사가 선임된다고 합니다. 비용은 정부부담입니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결핵입니다. 과거 결핵환자였던 분들은 X-Ray 촬영 후 다시 객담검사라는걸 해야 한답니다.


기타


모든 허들을 넘기면 이제 COPR(Confimation Of Permanent Residence) 이라는 영주승인서가 옵니다. 이제 드디어 집을 팔고 이삿짐을 붙인 후 이 서류를 들고 캐나다에 입국합니다. 그러면 해당 공항에서 별도의 방으로 붙들려가서 자원봉사자에게 여러가지 신규 이민자를 위한 여러가지 안내와 브로셔를 얻은 후, 다시 심사를 받고(너 COPR 받은 후에 감옥에 간 적 있냐? 이런거 물어봐요) 영주권자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통상 COPR의 유효기간은 건강검진일로부터 딱 1년입니다.


주의사항 1 : 이주업체 선정


저는 좀 귀차니즘이라 그냥 이주업체에 모든 서류 작업을 위임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민이 말씀드렸던 것처럼 쌉니다. 이주업체의 목적은 우리의 영주권 획득을 돕는게 아니라 돈을 버는 겁니다. '선생님 같은 경우는 이 주에서 사업 이민을 신청하시면 백프롭니다...' 라는 식으로 수수료가 훨씬 비싼 프로그램으로 유도하더군요. 이민부 사이트에서 본인에게 적합한 프로그램을 찾았다면 밀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주의사항 2 : 과거의 기록


이 글은 제가 3~4년 전에 있었던 일을 끄적인 겁니다. 그동안 이민 방법이 3~4번 바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 있는 내용은 100% 올바른게 아닙니다. 위에 링크해 드린 damianhwang 님의 글 또한 과거의 것입니다. 현재는 Express Entry 라는 거라는데 자세한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아마 이런 내용들을 파고들어 이해하는게 기술이민이든 뭐든 영주권 획득의 첫번째 허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상, 괜히 글 하나 올렸다가 많은 분들이 요청하신 숙제를 마칩니다. 휴~ 힘들었다.


2015.7.10


도대체 믿을 놈이 없네(feat 캐나다에서 한국인 이민자가 받는 큰 혜택)

안녕하세요. 외노자입니다. 이전에는 Sims 그리고 심심해 였습니다.


처음 *** 왔을 때는 '와, 여기 사람들 되게 까칠하다. 와, 서로 막 싸우네!'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여기서 흑화돼서 난생 처음 싸워 보기도 하고 새삼 제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 사이트 게시판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본 것은 그 전에 상상도 못 해 보던 것이었어요.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저를 싫어하시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여기 붙어 있으면서 글을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놀았던 곳과  ***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 사이트들은 하하호호, 화기애애한 사랑방 분위기였다면 이곳은 마치 장바닥과 같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가끔 마음에 안 들면 까칠해지더라고요. 저도 난생 처음 '이런 거는 왜 올리냐?' 혹은 '자랑질 하지 마라!' 라는 지적질도 당했습니다. 무서워라! 올라오는 글들도 주로 회원 모집이나 사이트 소개나 여행의 동행을 구하는 글이 주를 이루죠. 저는 여기서 이레귤러입니다.


그래서 전에 제가 쓰는 글들은 주로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는 대화체의 가벼운 글이었다면 요즘은 '이랬다, 저랬다' 하며 저 혼자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예전 사이트에선 글 올리면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고 대화를 나누며 즐겼는데 ***에서는 글을 쓰는 저만 즐거운것 같습니다. 덕분에 구독자의 눈치를 안 보고 마음껏 제 취향대로 끼적거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랑방 사이트에선 절대 쓸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솔직히 즐겁습니다.


요즘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해서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데요, '아, 이건 좀 공공게시판엔 도저히 올릴 수 없겠다' 하는 정도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수년 동안 방치한 제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몇 년 만에 제 블로그를 방문했는데, 그 블로그가 없어진 겁니다. 작은 회사도 아니고, 다음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서비스였는데, 이미 다음의 블로그 서비스가 종료된 것이었습니다. 털썩-


아아… 제가 오랫동안 써 왔던 산행기, 잡담, 일기, 사진, 등산 장비 리뷰 그리고 텃밭 재배 일지들이 몽땅 사라진 겁니다. 참 황당하네요.


허한 마음에 제가 그동안 글을 올렸던 카페들을 돌아다녀 봤는데요, 대부분 문을 닫았더군요. 뭐 써제꼈던 글들을 그닥 보존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괜히 가슴 한켠이 헛헛합니다. 아마 가장 많은 글이 보관되어 있던 블로그가 폭파된 탓이겠죠.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이트에서 옛날에 제가 썼던 글들을 몇 개 읽었습니다. 재밌더군요. 갑자기 옛날 생각도 나고 써제꼈던 글들을 내팽개쳐 둔 후회도 일어났습니다.


많은 부분이 유실됐지만 모아 모아서 다시 한번 복수의 블로그에 올려야겠습니다. 그런 김에 이곳에도 몇 개 올려 볼까 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변함없는 까칠함과 무관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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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한국인 이민자가 받는 큰 혜택


 


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습니다. 이민왔습니다.


영주권을 받는 방법은 수백가지로 알려져 있는데요, 지형학적으로는 두 가지입니다. 영주권을 가지고 왔느냐, 아니면 해당국에서 취득했느냐... 입니다. 전자는 이민하려는 나라에 대해서 무지한 체 무작정 사는 나라를 옮긴 경우고 후자는 해당 나라에서 사업이든 취업이든 학업이든 여러 해 경험을 해본 후 계속 쭉 살기로 작정하고 이민을 추진한 경우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기술이민으로서 한국내에서 모든 서류절차를 거쳐서 영주권을 획득한 경우입니다. 실제 제 가족이 처음 이민자로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가 첫 캐나다 입국이었습니다. 완전히 인생이 리셋되는 경우입니다.


이민자가 처음 이민 대상국, 제 경우는 캐나다, 에 이민자로서 도착하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 중에 제일 큰 것 중에 하나가 무료 영어교육입니다.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릅니다만 제가 있는 지역에선 LINC(Language Instructions for Newcomers to Canada)라고 합니다. 이민자 지원센터에 가서 LINC를 수강하려면 레벨테스트를 받고 집 근처의 LINC 교육기관에 할당되는 방식입니다. 교육기관은 사설 영어학원일수도 있고 대학 부설 영어학원일수도 있습니다. 규모가 되는 곳은 학부모인 피교육자를 위해 무료 탁아소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즉, 그래서, LINC를 수강하는 이민자가 처음 맞닥뜨리는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막 도착한 뜨끈뜨끈한 같은 이민자들입니다. 이게 참 재밌습니다. 제가 언제 불어를 쓰는 석유 엔지니어 세네갈 사람과 안면을 트고 베네수엘라에서 의사인 남편과 함께 온 글래머의 여성 전직 컬럼니스트와 말을 트겠습니까.


여튼, 세계 곳곳에서 온 이민자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 보면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부러워하는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인은 캐나다에 무비자로 6개월까지 체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캐나다는 입국심사가 좀 깐깐한걸로 악명이 있습니다. 특히 제 3세계 사람이 입국하려면 복잡한 비자 취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무비자라고 하면 놀라움과 동시에 부러움을 표시합니다. 한국 이민자의 형제자매나 부모가 캐나다를 방문하려면 그냥 여권챙기고 비행기표만 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본국의 가족을 한번 볼려면 그 가족이 방문비자 취득이라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답니다.


둘째, 운전면허증입니다. 동네의 레지스트리(한국의 동사무소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사설입니다.)에서 한국 운전면허증을 주면 간단한 시력검사 후에 캐나다 면허증으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일본, 한국 그리고 유럽 몇 개국 포함 전세계 10개국 뿐입니다. 캐나다의 운전면허 취득은 상당히 복잡하며 혼자 단독으로 운전, 혹인 2인 이상 동승인을 태울 수 있는 자격을 얻을 때 까지 최장 3년까지도 걸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본국에서 15년 이상 트럭을 몰았다는 인도인 이민자가 캐나다에 이민오면 필기시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선망의 시선이 한국에서 온 저같은 이민자에게 쏟아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국에서 온 이민자는 왜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된걸까요?


한국에 있는 월성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가압 중수로형 원자로이며 최근 수명연장때문에 시끄러웠던 그 물건입니다. 이 원자로의 정식 명칭은 CANDU 입니다. CANada Deuterium Uranium의 약자입니다. 캐나다의 물건인 겁니다. 당시 한국은 프랑스와 캐나다의 기술을 저울질 하다가 최종적으로 캐나다의 것을 낙점했는데요, 부가 조건으로서 양국의 무비자 6개월 방문과 양국 운전면허 상호 인증을 거래했던 것입니다.


국제 거래간의 부가사항들이 때로는 저같은 이민자의 삶에는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같은 처지의 타국 이민자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을 받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7월 1일은 캐나다 데이입니다. 일종의 건국기념일입죠. 대부분의 캐나다 휴일은 몇월 몇째주의 월요일... 이라는 식인데 오늘은 갑자기 수요일에 휴일이 생겨버리니 한 주 전체가 널널해지는 기분이네요.


이거 어떻게 끝내야 하나요? 음... 안녕히 계세요



201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