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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 자랑, 뱀꼬리 주의) 담배 3



제 아내는 저만의 치어리더입니다. 뭐든 제가 하려는 일을 응원해 줍니다. 이런식이죠.


'오늘 회사 가기 싫어.'

'그럼 오늘 뭐하고 놀까?'


'나 회사 관두고 싶어.'

'그래야지, 그럼. 같이 쉬자.'


'나 사업할까?'

'재밌겠다. 나랑 같이 하자.'


'이젠 머리쓰며 사는게 싫다. 장사하고 싶어.'

'오! 같이하는 거지?'


'이민갈까?'

'와~ 어디로 갈껀데? 근데 난 미국은 좀 싫타~'


'더 늦기 전에 세계일주 한 번 하고 죽어버릴까?'

'와~ 나는 인도에 먼저 가고싶어!'


이처럼 아내는 제 말을 거부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전생에 지구를 구했나봐요. 아내는 20여년간 제 아내이자, 착한 며느리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그리고 특별하게도 항상 제가 하는 일에 찬성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어 넣어주는 이쁘고 발랄한 치어리더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아내가 제게 원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 하나를 빼고요.


결혼 이후, 근 10여년간 아내가 제게 가끔, 그러나 끊임 없이 요구한 것은 금연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요구한게 아니고 항상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할 뿐이었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건 되도록 말하지 않을라고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내가 도저히 못견디겠어. 제발 방에서는 담배 안피면 안돼?' (딤배 <1> 중에서)


아내가 처음 요구한 사항이 이런식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 글을 쫓아 오신 분들이라면 예상하시듯 저는 착한 사람이 못됩니다. 아내의 요구는 항상 묵살되었고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시작된 금연 시도도 제 욕심에 의해 시작된 것일 뿐이죠.


이제 제 저열한 성격이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전 제 욕심에 의해 금연을 시도하면서 어여쁜 아내의 칭찬과 격려를 기대한 겁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요. 평소에도 아내는 제게 항상 애정이 가득한 표정과 시선과 대화를 선사합니다만 이제 금연을 시작했으니 아내로부터의 보상은 더더욱 크나클 예정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사랑하고 있으니 제게 일어난 변화를 즉시 알아챌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 즈음, 아내는 제가 그날의 마지막 담배를 피운 후 잠자리에 파고들때마다 '아휴~ 담배냄세~' 했었는데요, 저는 금연 첫날을 제정신이 아닌채 보내다가 아내의 놀람과 애정이 서린 표정을 고대하며 옆에 누웠습니다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루종일 담배를 멀리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말이죠.


처음엔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뭐, 그럴수도 있지 하며 저는 그 다음날을 고대했습니다. 아내의 놀람과 기쁨, 그리고 저에 대한 배가된 애정이 담뿍 담긴 표정이 보고싶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칭찬 없는 괴로운 나날이 삼일, 칠일, 이주 등등이 넘어갔습니다. 이 여자는 혹시 제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걸까요?


결국 전 내부적인 자아 분열을 일으키는 지경이 되어 제 자신을 괴롭히고 괴로움을 당하며 스스로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아내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요즘 나 변한거 없어?'

'??? 뭐가???'

'넌 사실 나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는거지? 다 필요 없어~'


결혼 이후 처음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불안한 표정은 며칠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곤 폭발했죠.


'도대체 무슨일이야?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흥~ 담배안핀지 삼주가 다되가는데 알지도 못하고. 나를 사랑한다는건 다 거짓말이지?'


아~ 아아~ 아아아~


지금도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순간 5 초 정도 아내의 표정이 버라이어티 하게 변했습니다. 분노, 의아, 놀람, 당혹, 기쁨? 제가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말 그대로 아내의 표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어~' 였죠. 제 아내는 굉장한 미인인데요, 미인의 얼굴에 이처럼 다양한 표정을 단시간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겐 정말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표정은 미안함과 당혹함 약간에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아내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미녀였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또 한 번 사랑에 빠진듯 했죠.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담배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면 마치 그때 아내의 다양한 표정을 보며 느꼈던 희열이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제 욕심에 의해 시작한 금연 시도였는데 아내의 사랑이 저를 담배로부터 해방시켜준 셈이죠.


이상으로 담배 3부를 마칩니다. <4부에 계속... 될지 어떨지 미정>


담배 2.9375



포기하면 좋습니다.


저의 경우입니다. 어려서 별로 축복받은 환경이 아니었기에 포기하는데 익숙했습니다. 딱히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편이 아닙니다. 어차피 원하는 것을 많은 경우에 얻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의외의 효용이 있습니다.


첫째, 가열찬 노력끝에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환희보다는 지쳐버리는 성격입니다.

둘째, 원하는 목표는 어차피 이뤄지기 힘듭니다. 반 포기 상태에서 목표를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실패했을 때에도 그 데미지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셋째, 간혹 운이 좋아서 설렁설렁 하던게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투입, 즉 노력 대비 성과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더 큰 기쁨과 충만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젊었을때 부터 뭔가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 3 때, 대입 학력고사를 마치고 단체미팅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 때가 모친을 제외하고 처음 이성과 마주친 때입니다. 아주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도 여성분으로부터 경멸에 찬 시선을 몇 번 받고나서 제 자신을 살펴봤습니다. 겨우 160 센치대 중반 미치는 단신, 여드름에 뒤덮인 얼굴, 두꺼운 안경, 곱슬머리, 홀어머니에 외아들... 거울속의 제 자신이 추하더군요. 그럴만 했습니다. 그 때 부터 독신주의를 자처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관심을 끊었습니다. 과의 이성 동료나 후배 여자사람들에게 데면데면하게 굴기 시작했습니다.


뭔가를 포기하니 그 뭔가가 제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교 학창시절에 연애 경험이 꽤 됩니다. 갑자기 친구의 여친이 제게 고백했습니다. 후배가 손수 조끼를 떠서 제게 선물했고 저는 그 후배를 피해서 도망다녀야만 했습니다. 두 여자가 저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점점 책임질 일이 늘어갈 때 비슷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몇 개월간 공들인 프로젝트가 허사가 되었을때 참 허탈했습니다. 불쑥 찾아온 일본인에게 프로젝터도 아닌 A4 출력물로 건성건성 솔루션을 설명하고 헤어졌는데 4 년간 최고의 고객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큰 기대를 안하고 건들건들, 되던 말던, 건성건성, 그냥 면피 정도만의 노력을 하는게 제 삶의 지혜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될건 되고 안될건 안되더군요. 예상외로 되면 더 기쁘고, 역시 안되면 그럴줄 알았다~ 하며 소주 한잔에 금방 잊을 수 있고...


그래서 추석 연휴 첫날에 담배를 끊기로 했을 때, 사실 그리 심각하게 생각한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금방 금연을 포기할 예정이었으니까요. 제가 잘 될리가 없죠, 뭐. 그래서 아무에게도 제가 담배를 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저를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저는 궁지에 빠졌고 결국 금연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부에 계속)


혐 주의) 담배 2.875


제 아내는 굉장한 미인입니다.


처음에 그녀가 제가 좋다며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제 자신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요즘말로 진짜 흙수저에 단신에 곱슬머리에 B 형에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대부분의 여자들이 피하고자 하는 조건을 여럿 가진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헉~ 소리 나게 아름다운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와 인연되어질 거라는 상상을 단 1g 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직장 동료로서 그녀와의 대화가 항상 즐겁고 그녀 또한 저와의 잡담을 즐기고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여자분과 저의 대화는 보통 이런 식이었습니다.


'기차 레일 밑에 왜 자갈들이 있는지 알아요?'

'(뭐래?) 몰라요.'

'레일 위에 있으면 기차가 못다니잖아요. 그래서...'

'그렇군요.'

침묵....

'날씨 좋네요.'

'지금 비오는데요?'

침묵...


혹은


'바늘로 코끼리를 죽이는 방법 세 가지 알아요?'

'아, 제가 좀 바빠서... (자리를 뜬다)'


그런데 그녀와의 대화는 이랬습니다.


'산토끼의 반대말이 뭐게요?'

'음~ 집토끼는 아니겠고... 죽은토끼?'

'아뇨. 바다토끼.'

'꺄르륵~ 죽은토끼나 알칼리토끼도 답이 될 수 있겠네요. 그럼 이젠 산낚지의 반대말에 대해서 얘기해봐요.'


이런식으로 대화가 꼬리를 물고 몇 시간이나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죠.


하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게 재밌다고 저를 사랑하며 결혼하길 원한다는건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저와의 결혼을 쟁취했죠. 제 인생에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정말로 사랑합니다.


아내와 결혼한지 2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저를 사랑합니다. 저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 저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 제게 소곤대는 아내의 목소리, 제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며 저를 그윽히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저에 대한 정말 큰 사랑을 느낍니다.


하지만 왜 일까요?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좋아?

'사랑하니까.'

'같은말 아냐? 그러니까 왜 사랑해?'

'변하지 않으니까, 결혼 전이나 후나 한결같아서.'


뭔가 계속 쳇바퀴 돌면서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답입니다. 물어볼 때마다 사실은 그녀가 저를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만들것 같아서 더 깊이 물어보진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저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유력한 가설이 하나 있습니다.


하드코어 무신론자인 저와는 달리 아내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는 많은 신도를 거느린게 아닌 그녀만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토착 종교 10% 쯤과 불교 50% 그리고 인도의 힌두이즘이 40% 쯤 섞인 요상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윤회의 고리에 갇혀 있고 현세의 업 KARMA 에 따라서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것이죠.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이 윤회의 고리에서 탈출하는 것이고요.


연애할 때 그녀가 '오늘밤 우리집에 아무도 없어. 놀러 와.' 를 시전했을 때 그녀 방의 책꽂이에 요가 수련법이니 무슨 요기니 구루니 명상법이니 하는 책들을 봤으니 그녀만의 이러한 세계관은 꽤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요즘도 그녀의 소원중 하나는 이미 작고한 인도의 어떤 정신수련 지도자가 남서부 인도에 세운 공동체 마을에서 수련하며 생활해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업을 쌓는 간단한 방법중 하나로써 방생이라는게 있습니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는 이와 유사한 업을 쌓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다.


큰 호수를 낀 어떤 마을은 마을사람 전체가 호수의 메기떼에게 먹을것을 주며 업을 쌓고 있습니다.

쥐를 숭배하는 인도 북서부의 어떤 도시에는 비카네르 까르니마타라는 쥐사원이 있는데요, 거기엔 25년간 쥐에게 먹을것을 주고 쥐들이 먹다 남긴 것을 먹으며 업을 쌓는 구루가 있습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는 새벽마다 나룻배를 타고 나오는 부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곧 시끄러운 갈매기들이 그 나룻배를 뒤덮고 그녀는 그 새들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게 그녀만의 좋은 업을 만드는 방법이며 20년째 하루도 안거르고 하는 의식입니다.


혹시 제 아내는, 그녀가 아니었으면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것이 틀림 없는 저같은 남자를 골라서, 평생 진심토록 사랑하는걸로 인해 현생의 카르마를 쌓고자 한게 아닐까요? 그녀는 매일매일 저를 보시의 대상으로서 보는게 아닐까요?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유력한 가설입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습니까. 저는 이미 인생의 내리막에 들어선 나이고 그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그리 안타까운 인생은 아닌듯 합니다. 그녀와 함께여서 정말 행복했고 행복한걸요. 아쉬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때 저는 아내를 심각하게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아내는 나를 사랑하는걸까? 혹시 완전히 무관심한건 아닐까? 이건 그냥 좋아하는 시늉에 불과한건 아닐까? 아무 남자라도 괜찮았던건 아닐까? 하고요. 그 느낌은 바로 담배를 끊기 시작했을때 불현듯 다가왔습니다. (3부에 계속)


담배 2.75



고등학교때 항상 화장실엔 담배연기가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상관 없는 세계였죠. 소수의 날라리 불량생들의 일탈일뿐 저 같은 순둥이 고삘이에겐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첫 문화 쇼크는 캠퍼스 일대를 떠도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함께 누구나가 피고 있는 담배들이었습니다. 저 같은 순둥이를 제외한 모든 날라리들이 대학에 들어왔나봅니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거진 모든 남학생이 복도와 휴게실에서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이는게 일상사였습니다. 문틈으로 언뜻 보이는 여학생 휴게실에서도 역시 여학우들이 담배를 피고 있었죠. 교양 철학이라는 선택과목에선 멋지게 턱수염을 기른 교수가 담배를 피우며 강의를 했고요, 심지어 서로 토론시간엔 학생들에게도 수업중 흡연을 허락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기저기 마음 맞는 상대들을 찾아서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요, 저는 너무나 큰 이질감속에서 그리고 천성적인 소심함 때문에 과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몇몇은 제게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는데요, 약속한듯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야, 담배있냐?' 였습니다. 상당히 많은 학우들이 쉬는 시간에 담배를 구걸하러 다니더군요.


친구를 사귀지 못해 학교가는게 전혀 즐겁지 않은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담배를 한갑 샀습니다. 그 당시 최고급이었던 거북선이었죠. 학우들은 자신의 은하수나 한산도 혹은 청자보다도 누군가가 거북선을 가지고 있다면 우루루 몰려서 거북선을 가진 친구의 담배를 아작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담배를 안피는게 소문났는지 며칠간 아무도 담배를 빌리러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먼저 다가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며칠 전에 제게 담배를 묻던 친구가 홀로 가방을 뒤적거리며 로비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나 담배있어. 여기~'

'어, 고맙다.'


그러더니 라이터를 꺼내서 척 불을 붙이더니 제 얼굴에 먼저 갖다대는 것이었습니다.


'???'

'넌 안피냐?'

'어... 난 담배 안펴.'


그 친구는 뭐 이런 미친놈이 있지? 하는 표정으로 절 잠시 바라봤습니다. 긴 얘기 짧게 : 결국 그친구와 저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걔는 저를 선술집에 데려가  '야야야, 여기 이 새끼 무지 웃기다, 글쎄...' 라며 자기 그룹에 소개시켜줬고요, 해서 저는 새로운 친구들에게 담배셔틀을 잠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저도 담배를 피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월 후에는 저도 이리저리 담배를 구걸하게 되었고요, 돈이 없을땐 한 갑 200원짜리 청자나 버스정거장의 100원에 3개짜리 거북선 까치담배를 사서 피는 신세가 되었죠. 하지만 그 보상은 엄청났습니다. 그때 사귄 7명의 친구들은 마침 다들 남부럽지 않게 가난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도 가끔 만나며 예전 젊은날에 같이 했던 미친짓들을 이야기 하는 죽마고우... 아니구나, 부랄친구... 도 아니구나, 하지만 그만큼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반이나 바뀔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두 배가 나오고 대머리가 되고 이젠 얼굴에 검버섯이 보이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갔죠. 이젠 모이면 나오는 화제가 누구 애가 군대를 갔느니 어느 대학을 합격했느니 하는겁니다. 저를 제외한 모두가 여전히 담배를 피고 있습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젠 술집에서조차 담배를 못핀다는 거네요. 양꼬치 집에서 저만 자리에 남겨두고 모두가 수시로 끽연을 하러 나가버립니다. 그리곤 들어와서 한마디씩 하죠. '너 독한놈. 옛말에 담배끊은놈이랑으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 모두다 담배를 끊고 싶어 하고 몇 번씩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을요. 술이 몇순배 들아가면 혀꼬부러진 소리로 비결을 또 묻습니다. 여러번 금연의 쾌락을 이야기 하고 금연 후의 좋아진 점을 이야기 합니다. 어어 하며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무척 부러운 눈길들을 하고 있네요.


속으로 한숨을 쉽니다. 저는 사실 제 친구들이 부럽습니다. 아직 이야기 하지 못한 그 금연의 쾌감을 제 친구들은 누릴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그 쾌감을 가져버렸고 이제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죠. 아아... 아직 내가 담배를 피고 있다면 그때의 그 즐거움을, 쾌락을, 희열을 또 가질 수 있을텐데... 이 부러운 자식들아~


제가 담배를 끊는 과정에서 가졌던 그 즐거움은,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그 열락은, 아무에게도 말알 수 없었던 그 통쾌함은 말이죠... (3부에서 계속)


19금) 담배 2.5


담배를 멀리하면서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증상은 나쁜것과 좋은것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1. 후각


갑자기 제 코가 개코가 되었습니다. 모든 냄새에 민감해졌습니다. 특히 담배냄새에 민감해졌습니다. 저는 전철에서 제 옆자리 네번째에 방금 앉으신 여자분이 20분 전에 역 근처 스타벅스 흡연실에서 한까치 태우신 후 급히 전철을 타셨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방금 지나간 아저씨가 흡연자인지 아닌지 저는 100%의 확률로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담배냄새가 역해요. 흡연자에게서 풍겨오는 냄새가 점점 역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담배를 피고온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하는게 고역이었습니다. 예전엔 내가 도대체 어떻게 저런 역한 것을 몸에 지니고 있었지? 하는 의문과 함께 차라리 담배를 다시 피면 이런 괴로운 상황이 없어지려나? 하는 생각조차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나 비흡연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니. 아니 근데 아내는 이런 나를 어떻게 참아냈지?


2. 시각


똑딱이 카메라를 쓰다가 풀프레임 DSLR 카메라의 결과물을 보신적 있나요? 오래 써서 여기저기 잔기스가 나고 색이 바래진 액정보호지를 떼어낸 후의 화사한 전화기 액정에 감탄해보신적 있나요? 금연 후에 제 망막에 맺히는 상들이 이랬습니다. 오랜 담배연기속에서 누렇게 낀 담배진이 씻겨나가듯 갑자기 제 눈에 보이는 장면들의 채도와 샤프니스가 팍 올라갔습니다. 흰 색은 더 희게, 빨간색은 더 빨갛게 보였습니다. 새벽의 새하얀 운무, 잿빛의 초봄에 액센트를 주는 분홍의 진달래, 예전엔 지저분해 보이던 흐드러지는 샛노란 개나리가 이리도 예뻣던가? 여기저기 좋은 경치를 찾아서, 산에서 맞는 아침의 장관을 위해 비박산행을 하던 무렵이어서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3. 미각


그 전에 저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약간은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식은 그저 인간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으로서 맛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생각이었죠. 맛을 찾아서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며 먼 거리를 이동하고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행동에 코웃음 쳤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제 짧은 소견에 의한 불찰입니다. 미뢰를 통해 감지되는 그 세련되고 풍부하고 때로는 거친 때로는 부드러운 맛들, 또한 입안을 애무하는 음식물의 질감과 이에 느껴지는 저작감 등을 통해 대뇌에 쏟아부어지는 그 쾌감이라니... 데코레이션을 통해 망막을 통해서 전해지는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미뢰를 안달나게 하는 그 기대감. 아아~ 미식은 고막을 두드려대는 클래식 음악, 시신경을 통해 이미지 전하는 미술이라는 예술에 전혀 꿀리지 않는 훌륭한 종합예술의 세계였습니다. 물론, 담뱃값보다 수 십배에 이르는, 새로운 예술을 향유하게 되는 금전적인 희생이 뒤따랐지요만은...


4. 정력


성적 성숙기에 이른 인간 남성에게는 적재적시에 커지고 쎄져야 하는 신체 부위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금연의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중간생략, 중간생략, 잘리기 싫어요.> ... 또한 이러한 상태는 적절한 시간만큼 유지되어야 ... <중간생략> ... 이전엔 마치 수인선 협괘열차가  비틀비틀 굴다리를 통과하는 것이었다면 ... <중간생략> ... 마치 KTX가 지리산맥을 꽤뚫은 끝없는 터널속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것만 같은 ... <중간생략> ... 리히터 지진계가 서서히, 끊임없이 신기록을 기록하면서 그 격렬한 진동을, 흔들림을 써나갈 때 ... <중간생략> ... 이전엔 없었던, 마치 억겁의 시간속을 잠들어있던 화산이 일거에 폭발하는 듯... <중간생략> ... 같은 느낌이 거진 매일매일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볼 때 이러한 부작용들이 금연에 수반되는 것이죠. 사회생활이나 경제적으로 봤을 때 그닥 크게 좋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이전편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금연 과정의 정말 큰 즐거움은 말이죠... (3부에 계속)


담배 2


연의 시작은  갑작스러웠습니다. 추석 연휴의 시작일이었고 연휴가 끝나면 바로 또 주말이었기에 5일 연휴의 첫날이었죠. 여느날과 같이 머리맡의 담배갑과 라이터를 챙겨들고 화장실로 가려는 시점이었습니다. 바스락 거리는 담배갑의 비닐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 순간 갑자기 머리속에서, 에휴~ 그만 두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안피기 시작했죠.


십수년간 매일 이어지던 습관을 버리고 약간 비현실적인 기분속에서 가족과 함께 추석준비를 했습니다. 아내의 심부름으로 장을 봐오고, 전을 부치고 등등...


모친도 흡연자였기에 집안 곳곳에 담배가 있었습니다. 이부자리의 머리맡에는 내가 피우던 것들이, 거실에는 모친의 담배가, 책상위에도 있었으며 책상서랍속에는 여러갑의 뜯지 않은 담배들이 저를 휴혹했습니다. 그들은 사방에 있었죠. 저는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 만 점점 저항은 힘들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금연이 제게 미치는 영향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습관의 단절에 의한 어마어마한 상실감입니다. 기상 전후, 식사 직후, 화장실에서의 똥담배 등등 담배는 제 생활의 일부였죠. 이런 모든게 뜯겨버린 당시의 저는 도대체 뭘 해야 좋을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식사후의 허전함, 담배 없는 커피 한잔의 공허함, 술자리에서의 좌불안석 등등 모든게 어색해진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집안 곳곳의 담배는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니가 감히 나를 버리겠다고? 라면서요.


둘째는 니코틴 중독에 의한 금단증상이었습니다. 갑자기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저려지며 정서적인 불안정과 자면서 식은땀을 한바가지 쏟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불쾌하고 괴로운 증상은 언제나처럼 담배 한까치를 입에 물면 엄청난 쾌락과 함께 저하늘로 날아갈게 틀림 없겠죠.


하지만 저는 저 두 가지의 괴로움을 넘어서 결국 담배를 멀리하는데 성공했는데요, 그 비결은 너무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담배끊는 과정이 정말, 너무, 엄청나게 재밌었습니다.


어느 순간 습관의 단절과 체내 니코틴 결핍에 의한 미쳐버릴것 같은 제 자아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괴로와하는 A와 이를 관찰하는 또 다른 나 B 였죠. 저는 담배를 못피워 미쳐버릴것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를 괴롭히며 조롱하는 또다른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괴로운 A는 다행히도 괴로운 속에서 점점 쾌락을 느끼게 되었어요. A는 메조키스트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담배를 진심으로 섬기는 노예였죠. 근데 최근 어떤 연유에선지 주인이 바뀌게 되었죠. 노예는 예전 주인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만 새로운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새 주인에게 반발하고 대들었으나 돌아오는건 끔찍한 고통뿐이었습니다. 근데요, 그 고통이 점점 쾌락으로 변하는 거였습니다.(제가 쓰고있으면서도 뭐 이런 병신같은게 있나 싶네요.)


A의 새 주인인 B는 노예를 처음 가져본 사람이에요. 처음에 B는 A를 잘 대해줄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말안듣고 옛 주인을 그리워하는 A가 점점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새 노예에게 옛 주인인 담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냄새맡게 하고 끊임없이 상기시켜줬지만 절대 예전과 같이 불장난을 하게 하진 않았죠. 주인은 노예가 몸부림치며 괴로와 하는걸 보면서 점점 흥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새디스트였던거죠. 저는 결국 저 자신을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면서 양쪽으로 즐기고 있는 이중 변태였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노예는 점점 옛 주인을 잊어갔습니다. 새 주인은 노예가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자 흥미를 잃고서 그를 버리고 떠나버렸어요. 결국 마지막엔 담배를 끊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담배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참 재밌고 흥분과 쾌락속에 지내던 나날이었죠.


하지만, 이보다도 더욱 더, 무지막지하게, 비교도 안되게 더 큰 금연 과정의 재미는 말이죠... (3부에 계속)


담배 1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지급받은 사무용품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게 두 가지입니다. 슬리퍼와 재떨이. 지금은 아마 절대 이런거 안주겠죠.


여튼, 첫 직장생활 때만 해도 남자라면 흡연자가 일반적이었고 오히려 담배를 안피우는 사람들이 좀 이상했어요. 사무실에서 일하면서도 피웠습니다. 기차나 고속버스에서도 피웠습니다. 팔걸이나 앞좌석 뒷면에 재떨이가 있었거든요. 지하철 역의 양 끝에는 흡연자들을 위한 재떨이가 있었습죠. 일본을 오고가는 비행기 뒷좌석 부분은 흡연석이었습니다. 짧은 두 시간의 비행이었습니다만 기내식이 나왔고 식사 후에 모두 담배 한 모금씩 하면 기내 뒷좌석이 뿌연 담배연기로 장관이었죠.


저도 헤비스모커였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독한 담배를 피웠었죠. 아시다시피 세상은 갑자기 담배와 적대적이 되어 갔습니다. 가장 먼저 제게 영향을 준 것은 비행기였습니다. 기내 전면 금연이 된 후 열 몇 시간 동안 강제 금연 후 뉴욕에서 핑 비틀거리며 피우던 담배가 어찌나 그리 맛있던지요...


젊은 시절 저의 하루는 기상하자마자 이불속에서 한까치 피우면서 시작했습니다. 머리맡엔 항상 재떨이가 있었어요. 하루의 마지막은 그날의 마지막 꽁초를 머리맡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끝났습니다.


결혼 후에도 이런 생활은 지속되었는데요, 물론 그리 길진 않았습니다. 아내가 정말로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건 되도록 말하지 않을라고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내가 도저히 못견디겠어. 제발 방에서는 담배 안피면 안돼?'


이제 재떨이는 화장실로 퇴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을 하고 담배를 끊으라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자기 담배 끊으면 좋겠다.'

'어, 아기 낳으면 안필게.'


공수표였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도 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애들과 같이 놀이공원에 간 사진을 봤는데 아이들과 놀고 있으면서도 저는 담배를 물고 있네요. 참 나쁜 아빠이자 남편입니다.


아내의 영향으로 산에 다니기 시작하며 갑자기 담배가 귀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박 산행을 하면서 무게를 1그램이라도 줄이려고 고민고민 하던 때입니다. 장기 산행에 갑자기 2~3일간 피워야할 담배를 챙긴다는게 구차하게 느껴진거죠. 거기다가 어떤 전문 산꾼이 말하길 "무게를 줄이려는 노력만큼 체력을 길러라. 같은 무게가 가벼워질 것이다." 라는 겁니다. 명언이죠. 담배를 끊으면 가벼워지고 게다가 체력도 늘겠는데?


그래서 심각하게 담배를 피우며 금연해볼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2부에 계속>


아내가 무서워진다. 아내는 무자비하고 치밀한 조련의 여왕이다


사진설명 : 아내는 처음 만난 코끼리마저 조련해 버린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나는 아내의 조련 대상이자 내 모친의 조련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갑자기 아내가 무서워진다. 아내는 무자비하고 치밀한 조련의 여왕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모친은 아내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소싯적에 아내는 어마무시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고기 뷔페에서 모친에게 아내를 소개한 후 아내는 고기를 가지러 자리를 떴다. 모친이 테이블 너머로 상반신을 쑥 내밀어 내 근처로 가까이 숙이고서 속삭이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디게 이쁘다 야! 곱기도 하다! 너 재주도 좋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릴 적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청상과부인 모친은 나를 홀로 키웠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나는 홀어머니와 자란게 아니라 마치 홀아버지와 자란것처럼 느껴진다. 모친은 호쾌한 남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거친 세월, 홀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그렇게 변하셨을 게다.


결혼 후 첫 김장을 할 때 아내는 모친의 비법을 보고 신기해 했다. 모친의 김장김치는 꽤 맛있다. 진하게 고은 사골 국물을 풀처럼 섞어서 김치를 만든다.


김장김치가 적당히 숙성이 됐을 때, 아내가 감탄하며 내게 말했다.


'나 지금까지 우리 엄마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줄 알았는데, 와! 이거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인 걸!'


나도 일찌기 장모의 김치맛을 알고 있었지만, 뭐 그렇게까지 많이 차이가 나는건가? 생각했다. 그래도 아내가 모친의 김장김치를 더 맛있어 한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엄니. 엄니 새 아기가 말하길, 엄니 김치가 자기 친정엄마 김치보다 몇 배나 더 맛있다 그러네!'


혼자 모친의 집에 들렀을 때 아내가 김치를 맛있어 한다고 말해 줬다.


모친은 무심한 듯


'그러냐?'


대답하며 쭈구려 앉아 바닥에 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모친의 얼굴을 목격했다. 입이 찢어져서 양 귀에 걸렸다. 양 볼에 홍조까지 띠었다. 지금까지 모친과 살면서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찐으로 행복하고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모친이 여자가 되어 있었다.


결혼한지 3년 정도가 지나서 모친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모친과 아내는 사이가 좋았다. 둘이 같이 공중목욕탕에 다니기도 하고 시장에 장을 보러 가기도 했다.


일요일에 소파에 드러누워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노라면 저쪽 부엌 바닥에선 모친과 아내가 마늘 같은 것을 까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가끔은 키득키득 하고, 나를 보면서 소곤소곤 말하는게 둘이서 꼭 나를 흉보는 거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의 얼굴엔 항상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모친은 점점 더 여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지 어느 정도 지난 후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했다.


'어떡하지? 나 친정 엄마 보다 어머님이 더 좋아지는 거 같아!'


나는 이 말을 듣고도 별 생각이 없었다. 사실 둘이서 좋아 죽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 둘이서만 놀면서 나 혼자 심심한 걸 뭐.


언젠가 모친과 둘이 있을 때, 아내가 해줬던 말을 전해 드렸다.


'엄니, 어멈이 자기 친정 엄마 보다 엄니가 더 좋다는데?'


'에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진짜 그러겠냐.'


모친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 얼굴을 또 보고야 말았다. 다시 한번 양 입가가 찢어져서 두 귀에 걸렸다. 세상 행복한 표정이다.


이 즈음에 아내는 모친의 자랑거리였다. 누구에게나 당신의 며느리를 자랑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영천댁의 이쁘고 착한 며느리를 칭찬하기 바빴으며 부러워하곤 했다. 심지어 모친은 나에게까지 당신의 며느리를 자랑했다.


'이놈아, 내가 인복이 있어 가지고 네가 어멈이랑 만난거여. 고맙지? 이놈아.'


내가 결혼을 할 때 친구들은 아직 대부분 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결혼 생활이 보통인줄 알았다. 고부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주말 드라마에서나 과장되게 묘사되는 것일 뿐이고 실제 생활은 모두 나와 비슷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친구들이 점점 결혼을 하고, 술자리에서 자기 아내와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니, 나의 아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친구들은 고부갈등이라는게 뭔지를 이해조차 못하는 나를 신기해 했다. 아니 모친과 같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사실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나도 이상한 점을 느껴 여기저기 알아보니, 드디어 내가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로또에 연속으로 두 번 당첨된 것과 같은 상황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모친은 말년에 딸이 생겼다. 같이 장도 보고 목욕탕도 가고 수다도 떨고, 항상 웃음기가 얼굴에 맴돌았다. 아내는 완벽한 기교와 치밀한 작전으로 시어머니를 자신에게 홀딱 빠트렸다. 아내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엄청난 행복을 모친에게 선사한 것이다.


오래전 모친은 암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약 일년간에 걸친 병수발은 몽땅 아내의 몫이였다. 아내는 마치 친딸처럼 병상을 지켰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내에게 한없이 면목이 없다.


세월이 지나며 아픔이 가라앉은 후 아내는 다시 조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아내의 조련 상대는 오롯이 나 혼자다. 아내의 능수능란한 조련 기술에 의해, 나는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 마냥, 꼬리를 흔들어 제끼고 배를 뒤집어 까고 어쩔줄 몰라하는 강아지마냥, 아내에게 홀딱 빠져 버린다.


아내의 조련 기술에 걸리면 마법이 일어난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데 또 사랑에 빠져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번 반해버리는 말도 안되는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아내를 볼 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이유다.


나는 전생에 생사를 넘나들며 나라를 여러번 구했나 보다. 혹시 나는 이순신 이었을지도…


*****


아내의 이러한 마수는 아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현재 일어나고 있다. 여기저기 파트들이나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내를 요구하고 있다. 매니저는 아내를 공평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새로운 스케줄표가 나오면 여기저기 환호와 탄식이 교차한다. 이 때문에 아내는 때로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할 때도 있다. 10일 연속으로 휴일 없이 일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언젠가 다른 글에서 계속… 할지 안 할지는 나중에 결정.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먼저 열반에 드신 큰 선배님이시다. 불법에선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불교 수행자들은 부처님을 따라 열반에 드는 걸 목표로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선 고락이 윤회한다고 한다. 열반은 이 고락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한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 상태, 그게 열반이다. 부처님의 표정이 바로 열반의 미소다.


고란 괴로움이다. 락이란 즐거움 혹은 행복한 상태다. 즉 불교에선 행복한 상태 마저 좋은 것으로 보는게 아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건 타당하다.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르듯, 큰 즐거움에는 곧 큰 괴로움이 뒤따른다.


듣기 좋은 음악을 처음 들으면 즐겁다. 하지만 이 음악이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면 세상 듣기 싫은 소음이 된다.


맛있는 음식도 언젠간 질린다. 보자마자 침이 질질 흐르는, 마블링이 훌륭한 한우 스테이크도 하루 세끼씩 일주일만 먹게 되면 보자마자 구역질이 나온다.


술마시며 늦게까지 즐거운 밤을 보내면 다음 날 숙취 때문에 하루를 망치게 된다. 마약을 하며 강력한 쾌락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순간 중독되어 인생 자체를 망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되면 즐겁지만 어느날 그 사람과 이별할 때 큰 괴로움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즐겁지만 어느날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거나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면 부모는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괴로움에 떨게 된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들은 모든 인연을 끊고 출가한다. 즉 고와 락의 원천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는 물론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출가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경구로 유명한 한국 선불교의 거승, 성철스님도 노모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출가했다. 성철스님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러 절에 찾아왔을 때 성철스님은 노모에게 돌팔매를 던지며 숲으로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부처님과 성철스님은 불교의 창시자 이시고 불교계에 큰 자취를 남기신 이름이기에, 부모 자식을 져버리고 출가한 것이 수행을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일컬어 지지만, 나같은 속세의 소인배가 같은 짓을 한다면 세상 책임감 없는 후레자식이 된다.


깨달으신 후 부처님이 고향에 방문하셨을 때, 부처님은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의 머리를 깎이고 출가를 시켜 버렸다. 또한 성철스님도 아기때 헤어졌던 딸이 성장하여 암자로 아버지를 보러 왔을 때, 즉시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를 만들어 버렸다. 깨달으시거나 불법의 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렇게 좋으신가 보다. 그런데 이렇게 다 출가를 해 버리면 소는 누가 키우나? 아마 나 같은 소인배의 몫이겠지!


여튼 불교에서 열반에 이루기 위한 첫 걸음으로 꼽는게 욕심을 버리는거다. 다른 말로 집착을 없애는 거다.


나는 축복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포기에 익숙했다. 즉 집착하지 않는다.


대학 신입생 시절, 통과의례와도 같은 미팅에 여러번 참석했다. 나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에, 가난뱅이에, 못생기고 땅달보다. 여러번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 여자와의 인연을 완전히 포기했다. 더 이상 파트너로 지정된 여성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는게 싫었다.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걸 각오했다. 여학우들과 후배들에게 데면데면 대했다.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자 쪽에서 먼저 나와 사귀기를 청해 오는 경우가 생겨났다. 심지어 두 여자가 나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다. 학창시절 남부럽지 않은 연애 생활을 보냈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오면 오고, 가면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점점 줄어 갔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에, 가난뱅이라는 현실이 여자분들이 다가오기에 주저 되었을 것이리라. 그런데 갑자기 꿈에서나 나올법한 여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가족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에게 시집왔다. 아직까지 그녀는 나와 한솥밥을 먹고 같은 이불을 덮는다. 어? 얘기가 왜 이리로 흘렀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나는 절대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나의 스탠스는 항상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달복달 하지 않는다. 그냥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절대 업무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남들보다는 화려하게 보냈다. 전반적으로 행복한 직장 생활을 했다. 뭐 지금은 트럭 운전을 하고 있지만… 캐나다까지 와서 트럭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집착을 버리라는 이 가르침은 놀랍게도 기독교에도 똑같이 있다. 바로 찬송가 구절,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 구절의 기원은 이렇다.


유럽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800만명 넘게 살육 잔치를 벌이던 때의 일이다. 한 목사가 있었다. 그가 외출했을 때 카톨릭 교도들이 들이닥쳐 그의 집을 불태우고 두 아들을 죽였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가 불에 타 무너진 집과 참혹하게 시신으로 변한 두 아들을 보고 기도했다. 그 기도의 첫 구절이 바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다.


기원이야 어떠하든 이 구절은 찬송가로 불리며 기독교 전반의 설교와 기도의 주요 주제가 됐다.


절대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빌지 않는다. 사업의 성공을, 취업을, 시험 합격을 간절히 빌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하고 다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다. 그러면 불교의 '집착을 탁 놔 버려라.' 와 일맥상통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간절히 원하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더더욱 괴로움에 빠지고 만다. 간절히 원하던게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위에 밝혔다시피 더 큰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뭔가 큰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큰 기대조차도 욕심이고 집착이다. 큰 기대를 가지고 원하는 직장을 구했다 해도 기대와 부합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될 수 있고, 동료나 상사와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기대와 현실이 어긋나서 어렵게 구한 직장을 곧 그만두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집착을 버리면 원하던 직장을 구하지 못해도 괴로움이 없다. 직장을 얻었어도 기대를 하지 않으므로,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보다 훨씬 편안하고 원활하게 직장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간절히 원하지 않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괴로움이 없다. 마치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영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집착을 버리고 그냥 그 장소를 떠나면 그만이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집착을 탁 놔 버려라' 혹은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인생 모토는 지금껏 훌륭하게 작동했다. 집착을 버림으로써 언제나 편안했다. 일종의 고락을 벗어난 행복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런 얘기를 얼굴 뻣뻣이 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역린! 용의 온몸에 덮인 비늘 중 딱 하나 거꾸로 달린 비늘! 용의 유일한 급소! 누구라도 역린을 건드리면 죽는다. 아무리 유순한 용이라도 누군가 역린을 건드리면 미쳐 발광하며 세상 끝까지 쫓아가 그자를 죽인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내가 내 역린이였을 줄이야!


최근 올린 글에 어떤 분이 댓글로 내게 일침을 주셨다. 그걸 계기로 내 내면을 돌아봤다. 내 안에서 역린이 건들여져버려 화가 난 흑염룡이 아직 꿈틀대고 있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 중이다.


올 겨울 처음 ***에 왔을 때, 대통령 선거 후에 난장판이 된 게시판을 둘러보고,


'여기 사람들은 서로 싸우려고 글 쓰네? 왜 이렇게 서로의 화를 돋우려고 하는 글들을 쓰지?'


라고 생각했다. 역린이 더럽혀진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글들을 쓰고 있다. 완전히 흑화 되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예전의 유순했던 나를 되찾기 위해 ***을 떠나야 될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무거워 졌다. 밝게 끝내야지.


요 몇 년간 불교 쪽 자료들을 들척거리며 어리숙한 보살 흉내를 냈었는데 최근 내 수준을 스스로 깨우친 바가 있다. 최근의 사태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아내를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향한 내 집착은 확고하다. 나는 절대 열반에는 이루지 못할듯 하다. 아니, 열반은 커녕, 보살행의 발끝에도 못미친다.


이 행복의 끝에 어떤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두렵기도 하다만 지금은 그저 아내와 함께, 부처님은 잠시 잊어 버리고, 그저 두 마리 무소의 뿔처럼, 아내와 손잡고 둘이서 가야지. 히히…


그런데 이 글의 주제가 도대체 뭐였지?


호수물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




 아내는 산을 참 좋아한다.


아내가 일본에서 직장생활 할 때, 같은 부서 50 여명이 후지산에 도전했다. 그때 단 세명만이 정상 정복에 성공했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아내였다. 그만큼 몸이 가볍고 산을 참 잘탄다.


한국에서도 많은 산들을 아내와 함께 올랐다. 서울 근교의 산들은 물론, 주말을 이용해서 설악산, 지리산 등도 자주 찾았다. 국립공원의 산장 숙박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박도 불사했다. 아니, 산속에서 자는걸 좋아했다.


영주권이 나온 후 캘거리로 정착지를 정한 것도 산과 관계가 깊다. 토론토는 산이 없고, 밴쿠버는 너무 비싸고, 캘거리가 로키산이 가까우면서 경기가 좋다고 해서 왔는데 오자마자 저유가로 경기가 곤두박질 쳤다. 역시 마이너스의 손!


여튼 한동안 록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미국을 로드트립 할때도 여건만 주어진다면 등산화를 신고 트래킹을 했다. 요세미티 폭포 위로도 올라가고 옐로우스톤 숲속을 방황하기도 했다.


아내가 산에 가서 특히 좋아하는게 있다. 하산길에 계곡물에 발담그고 노는거다. 계곡물만 나오면 등산화와 양말 벗고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적신다. 혼자하면 좋으련만 항상 나에게 같이 하자고 강권해서 곤란하다. 난 신발 벗고 양말 벗고 못생긴 발 적시고 닦고 또 주섬주섬 신는거 귀찮은데 말이다. 대부분 내가 져서 결국은 같이 물놀이 하곤 한다.


한국에 있는 많은 산골짜기 계곡물이 아내의 발을 적셨다. 또, 캐나디언 로키와 아메리칸 로키는 물론이고 미국의 여러 공원의 계곡물도 아내의 발을 스쳐갔다. 심지어 히말라야 몇몇 계곡물도 아내의 발을 담갔다.


많은 북미의 트레킹 목적지가 호수인 경우가 많다. 옐로우스톤 어떤 트레킹 끝에서도 큰 호수를 만났다. 트레킹중엔 물론이고 호수에서도 인적이 전혀 없었다. 큰 호수 하나를 우리가 전세냈다.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맨발로 호수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단이 났다.


이 글은 정보글이다.


절대 호수물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 원인은 모르지만 한동안 아내는 발목 가려움증 때문에 고생했다. 무언가 벌레 때문인지 옐로우스톤 특성의 화산성 화합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위험하다.


다행이 며칠 후 가려움증은 사라졌다. 한국처럼 생각하면 안될것 같다. 고인 물에 대해선 조심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큰 호수라 하더라도…


아, 아내와 같이 또 여행 다니고 싶다.


우와아~ 소방관들 지인짜 멋찌드라아~


지금으로부터 10년전 11월 영주확인서를 들고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캐나다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일반 여행자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바로 자원봉사자에게 픽업되어 별도의 방으로 이끌려가 랜딩절차를 밟고 이민자를 위한 여러가지 안내 브로셔를 받은 후 캘거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캘거리에 도착하니 사방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는 겨울 왕국이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인생이 리셋되듯 계절마저 온화한 가을에서 단 두 시간만에 매서운 한겨울로 리셋되어 있었다.

 

거주할 곳을 잡고 여러가지 생활에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이민자를 위한 무료 영어 교육 LINC를 등록하기 위해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너는 읽기와 쓰기는 LINC에서 가르칠 레벨이 아니야. 듣기와 말하기만 들을 수 있는데 이 경우는 파트타임 강좌를 들어야 해. 파트타임 클래스는 야간에만 있어.'

'응, 야간 파트타임 듣기 말하기 좋아.'

'근데 읽기 쓰기를 이렇게 잘하는데 듣기 말하기는 왜 이모양이니?'

'어, 나 한국말도 듣기 말하기 잘 못해.'

'정말?'

'정말!'

'ㅋ'

'ㅋㅋ'

'ㅋㅋㅋㅋ'

 

해서 리스닝, 스피킹 야간 파트타임 클래스를 다니게 되었다. 이민 오자마자 만나는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몰려든 같은 이민자였던 것이다.

 

클래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처럼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이민자부터 벌써 1년동안 LINC를 다니고 있는 사람까지 망라되었다. 의사인 남편을 따라온 저널리스트 출신의 글래머의 베네수엘라 여성분, 불어가 네이티브라 퀘벡으로 랜딩했다가 일자리가 없어서 캘거리로 다시 이사온 세네갈 출신의 석유 엔지니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캐나다군 통역 군무원으로 일하다가 캐나다군의 철수로 함께 캐나다로 건너온 수다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인, 어?

 

아니, 통역병이 왜 영어를 배워? 통역병이 같은 클래스에 있다. 수업 시작 전에 여기저기 여러가지 잡담으로 왁자지껄 했다. 내가 보기엔 모두 원어민 수준으로 거침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게 틀림없다.

 

갑자기 들어온 땅딸막한 아시아인이 궁금했는지 여러 사람이 나에게 뭐라뭐라 질문했지만 나는 단지 what? sorry? pardon? 을 연발할 뿐이었다. 아 씨, 도대체 뭘 알아들어 먹을수가 있어야지…

 

재미가 없었는지 더이상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손쉽게 왕따가 되었다.

 

수업중엔 한달에 한번정도 10~15분간 주제를 정해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도 있었다. 오, 이런건 내 전문이지. 그간 얼마나 많은 제안서를 써제꼈으며 얼마나 많은 프리젠테이션 자리에서 구라를 쳐댔었던가. PT 자료를 구성하고 여기저기 펀치라인을 집어넣은 스크립트를 써서 딸딸 외워서 출전했다.

 

강사와 클래스메이트들의 배꼽을 빼놓으며 뒤집어놨다. 이렇게 프리젠테이션을 마치니 또 사람들이 내게 뭐라뭐라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또다시 what? sorry? pardon? 을 연발할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세번 정도 PT를 하니 이제 LINC를 하산하란다. 아니 이보슈 나는 아직 what? sorry? pardon? 수준인데 날더러 나가란 말이오? 여튼 이렇게 LINC를 쫓겨났다.

 

한편 아내는 정규 LINC 코스를 다니고 있었다. 밤에 하는 파트타임 LINC와는 다르게 정규 코스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과외활동이 많았다. 다 같이 글렌보우 박물관도 가고, 은행에서 사람이 와서 집사는 방법도 알려주고, 경찰서에서 경찰관이 와서 여러가지 안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다채로운듯 했다.

 

어느날 아내는 캘거리 소방서를 다녀온 이야기를 해줬다. 아내는 아주 환한 얼굴로 두 눈에 하트가 뿅뿅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우와아~ 소방관들 지인짜 멋찌드라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 했다. 서구의 소방관들은 섹시맨의 상징이 아니던가. 미드를 보니까 911을 콜하고선 아픈 남편을 팽개치고 곧 닥칠 소방관을 맞이하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는 아내가 다 있더라. 그만큼 구미의 소방관은 모든 여성이 선망하는 알파메일의 상징이 아니더냐. 내가 그들을 어떻게 이기냐고요…

 

나는 그저 장화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선 아내를 바라보며 선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으으~ 아내의 눈에는 지금 내가 얼마나 오징어로 보일까. 여튼,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캐나다로 이민온걸 후회한 날이다.

 

기우와는 다르게 아직 아내는 나와 살을 맞대고 살고 있다. 아내와 손잡고 산책할때 어떤 할머니가 'You guys make such an adorable couple.' 해준적도 있다. 하하. 나는 지지않아.

 

소방관! 인정한다. 멋진 사람들이다. 섹시하다. 당신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진정한 영웅이다. 나의 연적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나도 영웅인적이 있었다. 봐라. 이렇게 증거도 있다.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_18.html

 

자, 영웅대 영웅으로서 겨뤄보자. 난 절대 지지 않는다. 아니, 난 승리하고 있다. 아내는 내것이다.


아내를 뺏겼다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다. 짧게는 일주일, 길 땐 5주 정도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와서 며칠 쉰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노닥거리는게 나의 최대 행복이다.


올 초에 아내가 취직했다. 집 근처에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리타이어먼트 센터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했다. 두 주에 30여시간 일한단다.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두세시 정도에 퇴근한다고 했다. 업무는 레지던트 아침 및 점심식사 서빙과 그 뒷처리란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내는 한 주에 6일동안 일했다. 그런데 7일째 또 나와달라는 메시지가 메니저로부터 왔다. 내가 못가게 했다. 파트타임이라며… 뭔 파트타임이 일주일에 칠일을 출근한다냐?


어떤 날은 아침에 나가고 또 어떤 날은 점심 이후에 나가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 돌아온다. 집에서는 액셀로 뭔가 서류작업을 하고 있다. 뭐하냐 물어보니,


'어, 직원 교육자료. 매니저가 달래. 그리고 내가 신입 한명 내일부터 가르쳐야 해.'

'??? 거기 일 시작한지 한달됐잖아. 근데 뭔 교육을 시켜? 그리고 교육자료를 왜 자기가 만들어???'

'그렇게 됐어.'


아내와 식사를 하며 혹은 아내가 내 머리를 깍아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막을 알게 되었다.


서구인들의 아침식사는 참 복잡하다. 빵은 화이트 혹은 브라운, 빵을 구을지 말지, 음료는 오렌지 주스 혹은 애플 주스 혹은 밀크, 계란은 삶을건지 후라이할건지, 후라이는 서니사이드업인지 이지오번지, 또 잼은 어떤걸 할건지, 베이컨은 몇개나 먹을지 조합이 무지 많다.


아내는 아침에 수십명의 레지던트로 부터 이런 주문을 받아서 메모하여 주방의 쿡에게 전달하고 조리가 되면 음식을 서빙해야 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아내가 꾀를 냈다. 각 개개인별로 선호하는 아침 스타일의 변화가 별로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간을 대폭 절약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집에 와서 개개인의 이름 하에 아침 주문을 미리 프린트하여 출근한 것이다. 그래서 주문받는데 잡아먹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개발새발 휘갈겨진 주문지를 상대하던 쿡들이 최첨단 프린트아웃된 아내의 주문지를 받아들고 뒤집어졌다. 아내는 서류작업을 통해 레지던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샐리, 오늘도 어제랑 같은거?'

'매리, 오늘은 어쩐일로 우유대신 사과주스를 원하니?'


이렇게 응대하니 레지던트들이 아내만 보면 하하호호 좋아한단다.


아내는 이렇게 절약된 시간에 놀고있진 않을 거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 몫까지 일할 거다. 틀림없다. 나는 아내와 사내연애했고 사내결혼했고 결혼후에도 대부분의 기간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일했었다. 그래서 잘 안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 자기 일이 끝났다고 손놓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도 사랑받고 있겠지.


아내가 엑셀로 만든 시스템이 내부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아직 교육을 받고 있을 상태의 아내가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맙소사…


언젠가 하루는 저녁 스텝이 빵꾸나서 아내가 대타를 처음으로 뛰었다. 이 때는 서빙이 아니고 일종의 주방 보조였다. 다음날 서빙될 디저트 푸딩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푸딩 플라워에 우유를 9L 부어 잘 저은 후 어쩌구 저쩌구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아내는 두 개의 4L 짜리 우유통을 플라워에 냅다 들이부었다. 쿡을 포함한 주방 스텝들이 깜짝 놀랐다.


'계량컵 써야지 그러면 어떡해!'


아내는 수학과 나온 여자다. 내심 황당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해줬다.


'이거 4L 통 두 개. 8L 들어갔고 1L만 계량컵 써서 넣으면 되잖아.'


쿡과 스텝들의 눈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땡그래졌다.


이틀 후 출근한 아내는 뒤집어진 매니저와 쿡과 주방 스텝을 상대해야 했다. 매니저가 입이 귀에 걸린채 물어봤다.


'너 도대체 푸딩에 무슨짓을 한거니? 레지던트들이 맛있다고 또 해달라고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였어.'


이거 나조차도 믿어야 할지 의심이 되는 일화였다. 해서 나도 아내에게 물어봤다.


'그래서 그 푸딩에 무슨짓을 한건데?'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 잠깐…'


아내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며 번뜩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내생각에 그 낡은 계량컵이 뭔가 수상쩍어.'


여튼 그래서 아내는 이주일에 30여시간 일하기로 한 오전 파트타임 일을 잡았는데 오전 서빙팀은 물론, 오후 주방팀에서도 에이스가 되어서 일주일에 심하면 칠일을 아침저녁으로 불려다니며 혹사당하고 있다. 난 집에 와도 이제 같이 놀 사람이 없다.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다. 짧게는 일주일, 길 땐 5주 정도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와서 며칠 쉰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노닥거리는게 나의 최대 행복이다.


그런데 아내를 뺏겼다. 심심하다.


절대로 아내 앞에서 흰 셔츠와 검은 멜빵 반바지를 입으면 안된다



 

마지막 소원 1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_17.html


 마지막 소원 2


사춘기 딸을 둔 사이좋은 일본인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결혼기념일을 자축해 중학생인 딸을 일본에 남겨두고 유럽을 여행중이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즉흥적으로 독일 전통 의상을 파는 의상실에 들러 민속의상을 사기로 했다. 시착실에서 남편이 독일 민속의상을 입고 나왔다. 흰 셔츠에 굵은 멜빵이 달린 검은 반바지였다. 그 순간이었다. 독일 민속의상을 입은 남편을 본 아내의 표정이 순간 웃음기가 사라지고 싸늘해졌다. 그리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백을 챙기고 아무런 말도 없이 의상실을 나가서 사라졌다. 아내는 이후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 부부는 그대로 이혼했다.


이상은 이 부부의 딸이었던 여자가 남자주인공에게 10여년전 자기 부모가 이혼한 경위를 설명한 내용이다. 예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온 에피소드다. 너무 오래 전이라 소설의 제목이나 전체적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위 에피소드만 마치 대뇌 피질에 문신을 새긴 것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후에 엄마는 딸에게 그 때가 바로 자신이 남편을 그동안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 때 아내의 남편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여자의 아빠는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별로 다뤄지지 않은걸로 기억된다.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말 호러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말 한마디 없이 영문도 모른 채 한순간에 버림받은 것이다. 단지 하얀색 셔츠에 검정색 멜빵 반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만약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아내와 결혼한지 25년이 훨씬 넘었다. 아내는 여전히 나만의 치어리더다. 항상 나를 응원한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결혼한 아내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이 나이에 지금까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살고 있다. 부모형제복 없고 키작고 못생기고 가난한 나에게 일어난 기적이다.


만약 이 여자가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결혼 전보다 결혼 후에, 젊었을 때보다 같이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더 좋아진다. 아직도 난 아내와 눈이 마주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트럭운전을 하며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과거에 했던 못난짓, 흑역사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심사숙고한 결과 나는 참 못난 놈이다. 전혀 아내에게 사랑받을만한 놈이 못된다. 때문에 위 내용이 불현듯 떠오르면 어느날 갑자기 아내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벌벌 떠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아내 앞에서 흰 셔츠와 검은 멜빵 반바지를 입으면 안된다.


아내의 마지막 소원은 나보다 먼저 죽는거다. 나의 죽음과, 그리고 그 후의 혼자 살아가는 삶이 싫다는 거다. 말도 안되는 소원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오래산다. 또한 아내의 집안은 장수혈통이다. 아직 장인장모가 한국에서 정정하시다. 나는 이미 형제자매 부모없는 천애고아다. 통계적으로, 혈통적으로 고려할 때 내 사후에 아내는 홀로 30년 이상을 살아갈 거다.


10여년 후에 나의 마지막 날이 찾아올 것이다. 나의 임종에는 아내가 슬픈 표정으로 앉아있을거고 의사가 나의 죽음을 선포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그 때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화장실로 갈거다. 그리고 천장에 숨겨놓은 흰 셔츠와 멜빵달린 검정 반바지를 꺼내서 갈아입을 거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를 보고 의사는 어안이 벙벙하겠지. 아내는 잠깐 놀랐다가 이내 내가 이런 형편없는 놈이랑 지금까지 살아온건가? 하는 깨달음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갈 것이다. 천천히 침대에 몸을 누이며 좀 슬퍼질 것이다. 마지막에 보는 아내의 얼굴이 나에 대한 경멸이 가득찬 표정이라니…


하지만 이걸로 아내는 홀로 30년 이상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나의 죽음 따위는 아내의 남은 생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걸로 족하다. 의사만이 지켜보는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겠지.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얼굴 옆으로 흘러 베개를 적실 때 내 입꼬리는 살짝 올라갈거다. 의사는 빈 방에서 내 죽음을 선포하겠지.


훌륭해! 완벽한 계획이다. 이제 아내의 흰 셔츠와 검은 멜빵 반바지가 뭔지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안돼! 네 남편은 이제 내꺼야. 넌 집에 가!

마지막 소원 1


여러해전 극심한 복통으로 응급실로 달려갔다. 여러가지 검사 결과, 담석에 의한 급성 담낭염이란다. 당장 입원하고 수술하는걸로 결정됐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응급실에서 헤롱거리다가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병실을 배정받았다.


그때까지 내 옆을 지키던 아내와 함께 배정된 병실로 가니 간호사가 악수를 청하며 밝게 맞아주었다. 정해진 침상에 자리잡은 후 간호사가 아내에게 이제 집에 가라고 했다. 아내는 병실에서 나와 함께 지내길 원한다고 했다. 간호사는 단호히 말했다.


'안돼! 네 남편은 이제 내꺼야. 넌 집에 가!'


캐나다에선 한국처럼 간병인이 병실에 같이 지내는 시스템이 아니라는걸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간호사의 단호한 말에 절망의 기색이 잠깐 지나간후, 체념한 표정으로 아내는 집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난 어벙벙한 표정으로 이 어색한 삼각관계의 원치 않았던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내는 내 속옷등 몇몇가지를 챙겨 병실에 찾아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얼굴은 웃고있지만 반쪽이 되버렸다. 남들이 보면 환자와 보호자가 바뀐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날 오후 늦게 수술받았고 다음날 오후에 퇴원했다. 수술 자체는 전신마취 후에 배에 구멍을 네 개 뚫어서 복강경으로 담낭을 제거하는 간단한 것이었다. 시야 확보와 복강경 조작을 위해 얼마나 공기를 내 뱃속에 불어넣었는지 죽을만큼 아팠다.


빠른 회복을 위해 자주 가벼운 산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지독한 수술후 통증 때문에 누워있고만 싶은데 아내의 닦달 때문에 자주 끌려나가 산책을 하곤 했다. 그 때 집 근처에 CO-OP 슈퍼마켓이 있었다. 산책삼아 자주 그곳에 가서 간단히 이것저것 사서 돌아오곤 했다.


어느날 저녁 쇼핑한걸 담은 몇개의 비닐봉다리를 덜렁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가 쓸개빠진 놈이 되다니, 흑흑…' 주접을 떨어 아내를 웃기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내게 말했다.


'자기보다 먼저 죽는거야. 집에서 혼자 있을 때 자기가 죽는걸 상상하고 나 혼자 사는걸 떠올리니까 무섭고 못견디겠더라. 그래서 난 자기보다 먼저 죽을거야. 내 마지막 소원이야.'


이 여자, 나에 대한 애정 표현을 참 섬뜩 하게도 한다. 여튼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알게 되었다. 아내의 소원을 이뤄줄 숙제가 생겼다.


여자는 보통 남자보다 평균수명이 많이 길다. 열심히 건강을 유지해서 여성 평균 수명 이상을 살아내야 할까? 아서라. 나처럼 게으른 놈에겐 불가능 할꺼다.


아내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어야 할까? 안된다. 내가 죽은 후에도 아내의 생물학적 생존 시간은 무척 길 것인데 포기할 수는 없다.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고민해 봐야겠다.


까르르까르르 웃는 아내를 보며 어깨를 으쓱으쓱 기분이 좋아지고 싶었는데...

 아내와 같이 회원 가입된 사이트나 카페가 있었다. 거기에 종종 글을 쓰곤 했다. 글의 주제는 주로 아내와 관련된 것이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국엔 끝에 아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넣고는 했다. 혹은 아내와 가볍게 대화한 내용의 심화판을 주로 끄적이곤 했다.


예를 들면


'아 씨, 트레일러 타이어 빵구났는데 메카닉이 나더러 스페어타이어 꺼내게 시키네. 그래서 옷이 좀 더러워졌어. 타이어 무거워 혼났네.'


'아니, 딴데로 가지 그랬어.'


'시골이라 갈데가 없었어. 그리고 메카닉이 할아버지더라고'


'아, 그럼 꺼내드려야지'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눈 일이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html



이렇게 쓰여진다.


혹은


'아 씨, 요즘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써써 거려. 나 진짜 늙었나봐.'


'그러게 염색 하라고 했잖아. 오늘 머리깎고 염색하자.'


'아, 시러시러, 귀차나 <도망>'


이런일이 있은 후에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_6.html


요런걸 쓴다.


아내는 뜬금없이 올라온 이런 글을 게시판에서 발견하고 무지 재밌어 한다.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 나도 어깨가 으쓱으쓱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내가 쓰는 잡글의 제 1 독자는 주로 아내로 상정되어 쓰여진다.


그런데 이런 사이트나 카페가 문을 닫는 일이 흔하다. 결국 자연스럽게 글을 안쓰게 되었다. 글을 써서 아내를 까르르까르르 웃긴지 몇년이 지났다. 간혹 아내는 왜 더이상 글을 안쓰냐고 물어보곤 했지만 쓸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내가 가끔 ***을 방문하는걸 봐왔다. 게다가 작년 초엔 함께 밴쿠버 다녀온 이야기를 이곳 게시판에 남기기도 했다. 즉, 아내는 이곳 게시판에 데뷔한 필자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약 다시 뭔가를 끄적거린다면 *** 자유게시판이 되겠구나 하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뭐 지금 보니 잘못된 생각같다만…


최근에 아내가 다시 취직했다. 긴 트립 이후에 집에 돌아와도 나 혼자 심심하게 지내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갑자기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고 이곳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내가 더이상 ***에 안온다는 거다. 새로운 일때문에 여유가 안생기는가 보다. 아내와 나만 아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넣어놨는데 아무 기색이 없는걸 보니 안오는게 틀림없다. 당분간 아내가 까르르까르르 웃는걸 보는건 어려울것 같다.


그동안 글을 써제꼈던 곳들과 ***은 많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사람이 너무 많다. 예전엔 조회수가 100이 넘으면 메가히트였는데 여기선 쉽게 1000이 넘는다. 좀 겁이 나기도 한다.


뭔가 분위기가 내가 쓰는 글들과 안맞는것 같다. 예전엔 그래도 나름 팬도 생기고 그냥 일상의 끄적거림을 즐겁게 맞아주신 분이 많았는데 여긴 뭔가 전투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올라오는 글들이 대부분 읽는 특정인들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게 목적인것 같다. 괜히 내가 분위기를 망치는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잠깐 흑화되어서 <공산당 만세> 같은 본격 정치경제 꽁트를 표방하는 뻘글도 쓰기 시작했지만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공산당 만세>를 읽고 아내가 까르르까르르 웃어줄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여기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3주간 좋은 일도 있었다. 먼저 여러가지 글빨을 생각하다 보니 운전할때 덜 졸린다.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10개 넘게 이미 쓰여져 있다. 그런데 최근 이곳 규칙을 보니 글을 이틀에 하나만 올려야 한단다. 그것도 모르고 며칠전에 이틀동안 연이어 두 개의 게시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하마터면 강퇴당할뻔 했다. 휴~


또 의외로 트럭운전을 하면 기약없이 기다리는 일이 많은데 글쓰기는 이런 시간 죽이기에 참 좋다. 스맛폰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따다닥 써제끼면 55%가 오타다. 오타 수정하고 있으면 벌써 로딩이나 언로딩이 완료됐다고 싸인하러 오란다. 아따, 시간 잘간다.


여튼, 여기에 아내를 까르르까르르 웃기기 위한 글을 꽤 써놨는데 아내가 안와서 슬프다. 까르르까르르 웃는 아내를 보며 어깨를 으쓱으쓱 기분이 좋아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2022.3.16


미처 몰랐던 아내의 취향

 아마 이 글은 아래 글의 속편격이다.


https://nonsense-delusion.blogspot.com/2023/10/blog-post_15.html


여튼 처음에 이런저런 일상 글들, 예를들면 나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너 어디서 왔니?' 나, 어느날 갑자기 노화에 대한 자각을 한 존재의 슬픈 자화상 '그때 나는 꿀이었고 내 심장은 달달했었지' 같은 뻘글들을 써제낀 후 아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니 영 내가 쓴 글들과 겉도는거였다. 물론 그때 모국에서 대통령 선거 전후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내가 뭔가 게시판의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뭔가 약간 울컥해져서 '우 씨, 나도 정치글 쓸 수 있는데…' 하며 공산당 만세를 쓰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반응도 뜨뜻 미지근하고, 아내도 이런 글은 좋아할것 같지 않고, 쓰고있는 나 자신도 흥이 안나서 때려 칠려고 했다. 그런데 이후에 게시판에 방문한 아내가 의외로 공산당 시리즈를 무척 재미있어 하는 거였다.


특히 아내가 좋아하는 BTS 를 0.01% 정도 가미한 5편 자기거세의 시대에서부터 아내는 공산당 시리즈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이더니 6편 현대 계급론에선 '빨리 다음편을 내놓아라' 하는 분위기가 되버렸다.


아내가 일상 다반사를 묘사한 꽁트보다 이런 하드보일드 정치경제 꽁트를 더 좋아할지 전혀 몰랐다. 아내의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다. 아내를 즐겁고 기쁘게 하는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다. 나도 저절로 신이나서 현실 정치에 대한 내용이 잔뜩 들어간 7편 선거 게임을 후다닥 써서 올리고 다시 집을 나섰다.


어제밤 카카오톡 보이스콜로 나의 제 1 독자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7편 재밌었어요?'

'웅! 웅!! 재밌어! 재밌어!!'

'다행이네요!'

'웅! 웅!! 공산당 끝나면 다음엔 종교글 써줘. 종교글!!'

'종교글???'


나는 뼛속까지 무신론자다. 아내도 내가 하드코아 무신론자인걸 알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나의 종교글을 원한다. 무슨 속셈일까?


그간 생각해 놨던 여러가지 글거리들, 예를들면


루이지애나에서 캘거리까지 히치하이커 태우고 온 얘기,

인도 바라나시 강가에서 부녀간으로 오해받아 아내에게 들이대는 인도 청년들과 대적할뻔한 얘기,

라오스 메콩강에서 이틀동안 보트타고 떠내려간 얘기,

태국 숲속 강가에서 코끼리들과 물장난한 얘기,

미국 세콰이어 국립공원 트레일에서 그리즐리 베어랑 눈싸움한 얘기,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일에서 김치찌개 먹은 얘기,

헬리코박터파일로리라는 이쁜 이름을 가진 애들을 뱃속에서 다 죽인 얘기


같은거를 쓸려고 했는데 이런게 갑자기 다 사라지고 이상한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찰스 다윈, 리처드 도킨스, 유발 하라리 같은 이름들이 떠오르며 여러가지 글거리들이 떠오른다. 예를들면,


신이라는 상상력이 인류문명발전에 끼친 영향,

유일신 종교에 뿌리깊게 남은 다신교의 흔적들,

석가모니는 아트만교 신자였다,

자살해도 괜찮은 자이나교,

카스트제도는 지배층에게 개꿀같은 제도,

그 때 두 시크교도는 왜 나때문에 싸웠을까?

선악과를 먹고 각성한 후 처음 이브가 지은 표정


같은거, 우와 주제가 무궁무진 하잖아!


그런데 까딱 잘못하면 대차게 욕처먹고 ***에서 도편추방당하기 딱 좋은 주제이기도 하다.


아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중이다. 어우, 아내는 무서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