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여름에 한국을 방문했다. 새삼스럽게 한국에는 만날 가족이 한 사람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모친과 단 둘이 살았다. 부친은 내가 세 살 때 세상을 떠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그래서 오랜만의 가족 모임이라는 것은 처가 쪽 식구뿐이었다. 연로한 장인 장모를 만나고, 처형을 만나고, 처 조카 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다. 조만간 오랜만에 만나 볼 친구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기대에 충만했다. 마침 친구들은 단톡방에서 모임 계획을 잡고 있었다. 거기에 짠 나타나면 애들이 모두 놀라겠지? 흐흐흐!
학창시절, 모친과 단 둘만의 단촐한 생활을 하다가 친구들과 인연이 되어 걔들 집에 놀러가곤 했었다. 친구들 집에는 다른 식구들이 북적북적 있는게 생경했었다. 아버지도 있고, 누나도 있고, 형과 동생도 있고, 여동생도 있더라.
마천동에 사는 친구 집에 갔더니 나이 차이가 큰 형이 결혼해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다. 친구 형의 부인이 내 친구에게 “도련님, 도련님” 하고 친구는 “형수, 형수” 하며 대화를 하더라. 나는 드라마에서나 도련님이란 말을 쓸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그런 말을 쓰는 걸 처음 들었다. 꽤나 신기했었다.
은평구 신사동 친구 집에는 다정스러운 누나가 있었다. 술에 취해 하룻밤 신세지러 갔을 때 누나가 정겹게 말을 걸어 주며 맞아 줘서 그 친구가 무척 부러웠었다.
미아리 산동네 사는 친구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날 여동생이 학교로 찾아왔다. 남매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은 내 친구에게 “오빠, 오빠” 하며 뭔가를 이야기하면서 친구의 손을 주무르며 손톱 주변에 일어난 덧살을 잡아 뜯으며 정리해 줬다. 어우, 은평구 신사동 친구 누나보다 백배는 더 부럽더라.
미아리 친구가 군대 갔다가 휴가를 왔을 때 일이다. 휴가 마지막 밤 같이 퍼마시고 술에 취해 헤롱거리다가, 그래도 부대 들어가는 걸 배웅하고 싶어서 놈이 사는 미아리 산동네 골목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때는 한여름이었고 전날 마신 술 때문에 갈증이 너무 심했다. 아직 한참 오르막이 남은 지점에 조그마한 과일 가게가 있었고 수박이 눈에 띄었다. 갈증을 못 이기고 수박 한 통을 사서 놈의 집까지 들어가 친구의 어머니께 수박을 건네 드렸다. 나는 순전히 술 처먹고 갈증 때문에 수박을 산 것인데, 친구 어머니는 나를 세상 예의 바른 청년으로 오해를 해버리셨다. 그리곤 나를 사윗감으로 점찍으셨다. 하지만 당시 본의 아니게 복잡했던 나의 여자관계를 알고 있던 친구놈의 결사 반대로 여동생과 교재까지는 못갔다.
친구의 반대만 아니었다면 나도 “오빠, 오빠”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내 손톱 주변을 정리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놈이 그 당시엔 무척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생명의 은인이다. 친구의 반대 때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면목동 사는 친구의 집에서 군대 가기 전날 모여 당일 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마침내 출발하는 시간이 되어서 나를 포함해 몇몇이 논산까지 따라가기로 했다. 친구의 아버님은 잠깐 얼굴을 비추시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어머님이 서럽게 우셨다. 이 매정한 친구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휘뿌윰하게 날이 밝아오는 거리를 뛰듯이 걸어 나갔다.
친구 집에 갔을 때 친구의 형제자매나 어머니와는 자주 만났는데 아버님들과는 별로 교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그게 자연스러운 건 줄 알았다.
어느 토요일 밤, 의정부에서 군 생활하던 놈에게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서울에 왔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친구와, 친구의 동네 친구 몇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놈이 의정부에서 외박을 받아서는 서울까지 온 것이다. 당시 헌병에게 걸리면 위수 지역 이탈이라는 죄목으로 영창에 가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동네 친구 둘과 나까지 셋이서 의정부까지 전철을 타고 같이 가기로 했다. 혹시 헌병이 검문하면 때려눕힐 계획이었었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런데 친구의 아버님이 불안하셨는지 의정부까지 동행하셨다. 우리들 넷은 전철에서 실없는 헛소리들을 떠들어댔고 아버님은,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 계셨다. 의정부에 도착하자 마자 아버님은 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전철로 갈아타셨고 우리만 의정부역에서 내렸다. 친구의 아버님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게 내가 경험한 가장 길고도 밀접한 ‘아버지’ 라는 존재였다.
하도 인상적인 경험이어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그때 군인이었던 친구에게 당시 이야기를 했더니 그놈은 전혀 기억을 못 했다.
이처럼 나도 서울 여기저기 친구 집을 방문하곤 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모인 장소는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이 서울 한가운데인 중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경 써야 할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없어서 배짱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친의 호방한 성격 탓에 내 친구들도 모친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친구 몇몇이 우리 집에서 자면 모친은 천 원짜리 세 장에서 다섯 장 정도를 밥상 위에 놓아두고 직장에 나가셨다. 우리는 그 돈으로 근처 신당동에서 떡볶이를 사 먹거나 저녁때 또 술잔치를 하고는 했다. 그 당시 최루탄 자욱한 대학가 허름한 선술집에서 한강처럼 퍼 담아 주는 두부찌개나 김치찌개 안주가 1200원에서 15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한바탕 취하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술자리에서 우리는 지방 방송이 생기거나, 말다툼으로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라는 노래 구절을 다 같이 부르며 술잔을 꺾었다.
하루는 입대 영장을 받아 놓은 친구가 집에서 자고 갔다. 친구는 모친에게 군대 간다고 인사했다. 모친은 입대하기 전에 잘 놀고 가라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친구에게 줬다. 이를 본 오금동 사는 능글능글한 친구 녀석이 몇 주 후에 자기도 군대를 간다고 모친에게 사기를 쳤다. 그렇게 용돈을 받아 놓고선 몇 달 후에 진짜 영장이 나왔을 때 또 얘기를 하고는 다시 용돈을 챙겼다. 모친은 아는 척 모르는 척 속아 넘어가 줬다.
그런데 이 사기꾼 친구는 국가유공자녀여서 허우대는 멀쩡한데 6개월 방위를 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6개월짜리 사회복무 요원이 된 것이다. 당시 이 친구의 별명이 제비였다. 군 복무를 서울 모처의 사령부 사무실에서 군무원들과 사무업무를 봤는데 녀석의 별명에 걸맞게 군무원 여자 직원을 꼬셔서 사내 연애를 했다. 그래서 나도 자주 그 군무원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근데 이 녀석이 6개월 후 제대하자마자 여자 친구를 차 버렸다. 물론 그 전에 나에게 그 여자 친구가 너무 지배적인 성격이라고 불평하긴 했었다. 문제는 이 친구가 확실하게 정리를 하지 않고 잠수를 타서, 그녀가 자주 우리 집에 전화해서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고는 했다. 중간에서 곤란하고 난처한 지경이었다. 하루는 모친이 그녀의 전화를 받고는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며 혼구멍을 내줬다. 이렇게 모친은 그 제비 친구의 여자관계까지 정리를 해 줬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이러한 치부가 아주 많다. 그래서 우리 친구 모임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절대 부부동반 모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 전부터 누군가가 뭣 모르고 여자친구를 데려오면 모두 그 친구의 과거 치부를 여친 앞에서 까발리며 망신을 주고는 했기 때문이다.
매일처럼 붙어 다니던 우리는 취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계절이 바뀔 무렵엔 꼭 한 번씩은 만났다.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는 주말에 만나 같이 산행을 하기도 했다. 골프 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나를 그 모임에 끌어들이기 위해 친구 한 놈이 나의 직장 근처 골프 연습장에 자기 돈으로 나를 등록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7번 아이언으로 똑딱이를 몇 주 정도 했는데 영 체질에 맞지 않아 때려쳤다.
나이가 더 들어가자 부정기적으로 또 다시 친구들이 모이는, 달갑지 않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친구들의 조부, 조모 상이 그 기회였다. 그 와중에 세 친구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상을 당한 친구는 상복을 입고 형제자매와 함께 문상객을 맞았다. 고인께 두 번 절하고 상주인 친구와 그 친구의 형제자매와 함께 맞절을 했다. 문상객을 맞는 상주의 심정은 내가 막상 상주가 되어 보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친이 병석에 들고 병원 생활을 할 때 친구들이 몇 번 병문안을 왔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 나는 홀로 상주가 되었다. 친구들이 형제 자매가 없는 나를 위해 모친의 발인 날, 화장터와 장지까지 나와 함께 했다. 큰 은혜를 입었다.
이상한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캐나다까지 이민을 와서 살게 됐다. 12년 간의 이민 생활 동안 친구들은 나 빼고 곧잘 모인다. 철이 바뀔 무렵엔 친구들 모임 단톡방에 불이 붙는다. 모임의 성격도 달라져서 얼마 전까지는 주로 캠핑을 하더니 요즘 들어선 배를 하나 전세 내서 바다낚시를 하는 것 같다. 그런 톡을 볼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 나도 같이 놀고 싶다.
어느 날 친구들 단톡방에 대화가 올라왔길래 무심코 봤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한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갑자기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상주의 입장에서 조문객에게, 특히 친한 친구에게 위로받는다는게 어떤 건지 이제 나는 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 줄 방법이 없었다.
내 기억에 아마 1년도 안 된 거 같은데, 아버님마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또 올라왔다. 북미 대륙 방방곡곡을 누비는 보부상 같은 직업을 가진 나에겐 친구에게 달려갈 방법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참담할 뿐이었다.
재작년 겨울에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그저 나를 핑계로 매주 모여서 먹고 마셔댔다. 짧은 기간에 부모님을 여읜 친구도 나를 반겨 줬다. 속으로 나는 면목이 없었으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날 친구들은 나에게 숯불 민물장어구이를 사 줬다. 국가대표 축구팀이 단골이라는 곳으로 용인에 위치했다. 최근 부모님을 잃은 그 친구는 자차로 서울에서 나를 픽업하여 용인까지 실어 날랐다. 그리곤 다시 나를 서울까지 태우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았다. 자리가 파하고 아내와 내가 묵고 있던 동대문의 허름한 호텔 앞까지 나를 태워다 줬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맨정신의 그 친구와 술로 알딸딸해진 내가 오랜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만 그 내용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친구 녀석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결국 아내가 기다리고 있던 호텔로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집으로 향했다.
올 초여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반겨 줬다. 학창 시절엔 꿈도 못 꿨을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글쎄, 안주는 기똥찬데 우리는 더 이상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라는 노래 구절을 부르지 못한다.
모임 마지막 무렵엔 노래주점 큰 방을 빌려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다 함께 소리를 꽥꽥 질러대다가 지쳐서 잠시 소파에 앉아 친구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봤다. 모두 겉모습은 중늙은이가 됐는데 그 내면에는 20대 초반 청년이 아직도 다들 살아 있다.
곧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 그 때문에 친구들이 힘들 때 나는 높은 확률로 곁에 있어 주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나지막히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사람 노릇을 못하고 산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