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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치과

 



최근에 캐나다 치과에서 생전 처음 신경 치료를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그닥 치과와 친한 사람이 아니였어서 좋은 비교는 될 수 없습니다만 이것저것 줏어들은 바와 아내의 경험을 통해 한국과 캐나다 치과의 차이점을 끄적여 볼까 합니다.


뱉을 수 없다


서구권에선 입에서 뭔가를 뱉는 걸 무척 불결하게 여깁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공공 화장실에서 양치질하는 행위를 불쾌하게 여길 정도죠.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는 일반적인 타구 Spittoon 가 치과 의자에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치위생사가 석션을 해 줄뿐입니다.


전담 치료를 한다


한국에선 오픈된 공간에 여러개의 치과 의자가 있고 환자들이 누워 있습니다. 치위생사가 대부분의 처치를 하는 동안 치과 의사는 잠깐 잠깐 보고 곧잘 또 다른 환자에게 가곤 하죠. 캐나다에선 정해진 시간에 의사는 정해진 환자만 보는 것 같았습니다. 병실도 오픈된 공간이 아니라 독립된 방이 여러 개 있고 방마다 치과 의자 단 하나만 있었습니다.


한 번에 끝낸다


한국에서 신경치료를 한 아내의 경험에 의하면 치료를 위해 여러 번 병원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에선 단 한번에 신경 치료를 끝내려 합니다. 그게 감염 위험을 회피하여 오히려 더 신경치료 성공 확률이 올라간답니다. 저는 두 번의 신경 치료를 받았는데요, 처음에 거의 두 시간 정도, 두 번째도 1시간 이상 치과 의자에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치료를 위해서 예약은 어느 날 몇 시부터 몇 시간 동안, 이라는 식으로 정해집니다. 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신경치료, 그리고 코어를 심고 본을 뜨기 위한 처치에 두 시간의 예약을 잡았습니다. 치과 의사는 해당 날짜에 두 시간 동안 저만 전담한다는 의미죠.


러버댐을 한다


치료해야 할 치아를 완전히 분리합니다. 조그마한 수술 도구가 목구멍 안으로 떨어지는 걸 막고, 가장 중요하게는, 감염을 예방합니다. 두 번의 신경 치료와 코어를 박을 때, 그리고 크라운을 씌울 때를 포함하여 총 4번 러버댐을 했습니다. 한국에선 경험하지 못한 사전 처리였습니다.


스페셜리스트가 있다


저는 일반 Dentist 를 찾았습니다. 그는 제 어금니 신경 세 개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엑스레이 상에서 보이는 네 번째 신경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저에게 상황을 전하며 Endodontist 에게 저를 리퍼했습니다. Endodontist 가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신경치료 전문 의사인가 봅니다. 치과 대학을 마치고 2년 정도 더 공부해야 Endodontist 가 될 수 있다고 하네요. Endodontist 는 치료 과정 중에 여러 번 이쪽저쪽 방면으로 엑스레이를 찍어 가며 제 신경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래 치과로 돌아가 나머지 치료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 보이는 치과들이 뭔가 전문 분야를 내세우는 곳이 많습니다. 전술한 Endodontist 가 있고 교정을 전문으로 하는 Orthodontist 가 있습니다.


비싸다


저는 캐나다 알버타에 있습니다. 알버타는 캐나다에서도 치과 치료비가 비싼 주에 속합니다. 그래서 알버타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옆 BC 주로 가서 치과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예전에 캘거리 경전철에서 “멕시코 칸쿤으로 오셔서 관광도 하고 치과 치료도 하세요” 라는 광고를 본 적도 있습니다.


이런 비싼 치료비가 문제인지 알버타 주 정부에서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신경치료의 경우 신경관 한 개당 900 몇십 불입니다. 제 어금니의 경우 총 네 개의 신경관이 있었으므로 정가는 3,600 불이 넘습니다. 비싸죠.


치과는 치료 전에 대략적인 치료비 예상액을 프린트하여 환자에게 제시합니다. 첫 치과에서 제 예상 신경치료비는 약 2,000불 정도 제시되었습니다. 단 신경관 세 개 기준이었습니다. 의사는 실제 상황에 따라서 가감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술했다시피 의사는 신경 하나를 찾는데 실패했고 그걸 솔직하게 저에게 말해 줬습니다. 그리고 치료비를 받지 않고 저를 Endodontist 에게 리퍼했죠. Endodontist 가 이메일로 제시한 예상 치료비는 약 2,700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청구된 치료비는 약 2,800불이었습니다. 진짜 비싸죠. 저를 리퍼해준 덴티스트와 Endodontist 간에 치료비 정산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덴티스트는 제 신경관 세 개를 치료한 치료비를 저에게 청구하지 않았거든요.


참고로 6년 전에 제 아들이 캐나다에서 교정 치료를 받았습니다. 약 1년간의 치료 기간 동안 8,000불 넘게 썼습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지금은 더 비싸졌을 걸로 예상합니다.


보험이 있으면 좋다


아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노조가 있고 노조 주관으로 계약한 괜찮은 의료보험이 있습니다. 제가 치과 치료를 받을 때는 백수였습니다. 부랴부랴 아내의 부양가족으로 저를 등록하고 치과 치료를 했습니다. 치료비 전액이 보험회사로부터 지급됐습니다.


직장 보험도 그렇고 정부에서도 치과치료비가 비싼 걸 인식하고 있어서 정부 보험도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 구만불 미만의 가구 소득이나 시니어라면 쉽게 주정부나 연방정부로부터 치과 치료를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다


이상은 하나의 어금니 신경치료를 위해 단 두 군데의 치과를 방문한 극히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제 경험이 전체 캐나다 치과 상황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그냥 참고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치아 건강은 오복 중 하나라고 하죠. 이번에 극심한 치통을 겪어보니 왜 그런 말이 있는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모두 건치를 가지시길 빕니다.


야매요리 : 규동

 


대학을 졸업하고 새파란 청춘일 때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했었다. 회사 근처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근처에 요시노야라는 규동(소고기 덮밥) 집이 있었다. 처음 회사 선배가 거기서 밥을 사 줬을 땐 ‘뭔 이런 음식이 다 있나’ 생각했다. 반찬도 없고 국물도 없고 덜렁 큰 대접에 밥을 담은 후 그 위에 끓인 소고기를 얹은 간단한 음식이였다. 여러 가지 반찬과 국물이 있는 한국식 식문화에 익숙했던 나에겐 농담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마 후 맛을 들였고 내 단골집이 됐다.


실내는 주방을 중심으로 ㅁ 혹은 ㄷ 자 다찌로만 좌석이 이루어져 있었다. 즉 일행이 식사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손님이 1인이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고 주문을 하면 주방 가운데 서 있던 알바생은 밥을 담은 후 큰 국자로 소고기와 국물을 떠서 밥 위에 얹어 내준다.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오는데 단 1분이 걸리지 않는다. 단 10분도 안 걸려서 뚝딱 식사를 하고 나올 수 있었다. 맥도날드나 버거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일본식 패스트푸드였던 것이다.


그 당시 주문은 나미와 오오모리, 즉 보통과 곱배기 만이 있을 뿐이다. 규동 이외에 메뉴가 없다. 사이드로 미소시루나 날계란을 주문하기도 한다. 저녁때 가 보면 생맥주 한잔을 시켜 놓고 규동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직장인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식탁에는 시치미라는 고춧가루 비슷한 양념과 붉은 물감을 들인 베니쇼가라는 초생강이 있었을 뿐이다. 베니쇼가도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먹지 않았는데 나중엔 맛이 들어서 듬뿍듬뿍 넣어 먹고는 했다.


그래서 요시노야는 회사 근처에 있으면서 나에게 간단한 끼니를 빠르게 제공하는 소중한 장소였다. 내 청춘의 소울푸드중 하나였다.


나이가 먹으면서 옛날 일이 자꾸 생각난다. 그래서 요시노야의 규동이 먹고 싶어졌다. 덮밥 하나 먹겠다고 일본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집에서 몇번 만들어 봤다. 썩 훌륭하지는 않지만 가족 모두가 맛있게 먹었다.


코스트코에 가면 브리스켓이라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판다. 현지인들은 이걸 숯불 그릴에 넣어 10시간 이상 훈연하여 먹는다. 우리는 이걸 사서 양지와 차돌박이를 분리하고 나머지는 국거리로 쓰거나 훈제하기도 한다. 어느 날 냉장고에 돌아다니는 얇게 썬 차돌박이를 이용하여 규동을 만들어 봤다. 아들 녀석이 “아빠 최고” 하더라. 짜식, 아빠의 청춘의 맛이 어떠냐!


내가 요리를 할 땐 대충 감으로 한다. 고기가 꼭 200g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충 남아 있는 고기를 냄비에 넣은 후 고기 양에 맞추어 나머지 재료를 준비한다. 그래서 어떨 땐 무척 맛있는 요리가 되기도 한다. 그때 사용한 차돌박이와 대충 감으로 던져 넣은 조미료들이 최고의 조합을 이루었는가 보다.


여튼 주 재료는 얇게 썬 쇠고기와 양파뿐이다. 나머지는 아래 동영상을 보고 대충 따라 하면 된다. 아, 와인은 생략했다. 대충 요리술과 미림 좀 넣고 끓였을 뿐이다.


베니쇼가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잠깐 옛날 청춘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청춘의 음식을 먹는다고 진짜 과거의 찬란했던 청춘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서글프다.



야매요리 : 지라시 스시 집에서 만들어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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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매요리 : 베트남 쌀국수 집에서 (많이) 만들어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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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매 요리 : 고르곤졸라 피자 집에서 만들어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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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겠지


괴로움 혹은 고통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게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괴로움과 고통을 겪었다. 가장 심하게 겪은 고통은 급성 담낭염에 걸렸을 때였다. 쓸개의 돌이 담도를 막아 염증이 생겼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FootHill 병원 응급실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이 수치스러운 모습은 모두 아내가 직접 목격했다. 나는 정말 통증을 못 견디는가 싶었다. 바둑을 두면서 팔뚝 살을 갈라 뼈에서 독을 긁어낸 관우의 인내심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나는 정말 고통을 못 견디는가? 사실 그건 또 아닌 듯 싶다. 응급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 몇 년 후에 또 대상포진에 걸려 몇 주 집에서 쉬었다. 오른쪽 가슴과 등쪽에 발진이 생겼는데 무척 아팠다. 흔히 대상포진의 통증은 산통과 비교된다. 의사가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하며 진통제를 먹으라고 권하였지만 그냥 고통을 참고 넘겼다.


최근 한국 여행을 마치고 캘거리에 돌아와서 잔디를 깎고 집 외벽 수리를 하며 육체노동을 했다. 그리고 3시간 이상 자전거를 타고 보우 강변을 달렸다. 시차에 적응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를 했는지 약간 몸살에 걸렸다. 그리고 우측 위 어금니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회사에 복직한 후 의료보험을 살리고 치과에 갈 생각이었다. 아내가 산을 가고 싶어 해서 회사에 복귀하기 전에 카나나스키스 등산을 했다. 그런데 올라가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높아지면서 점점 어금니가 욱신거리며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산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홀로 치통을 참아 넘겼다.


산행을 마치고 카나나스키스 입구에 있는 카지노 부근의 팀호튼에서 팀빗과 아이스캡을 샀다. 집으로 가는 길에 먹고 마시기 위해서였다. 운전대를 잡으며 아이스캡을 한 모금 쭉 빨아 올렸는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차가운 음료가 어금니에 닿으면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역시 아내에게 내색하지 않고 집으로 달렸다. 집에 도착한 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아이스캡을 보고 아내가 왜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냥 적당히 둘러댔다.


고민에 빠졌다. 그냥 회사로 갈 것인가, 치과에 들려 어금니를 치료한 후 복직할 것인가. 밥을 먹다가, 그리고 치통 때문에 잠을 못 이루면서, 치료를 더 이상 미루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치통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는데 결국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다. 이부프로펜 600mg 혹은 아세트아미노펜 500mg을 먹었다. 흔히 약국에서 애드빌 혹은 타이레놀로 파는 그것이다. 이런 약들을 먹으면 못 견디게 심한 치통이 어느 정도 견딜만한 고통으로 가라앉는다.


참으로 신기하다.


치과에서는 내 어금니가 세로로 금이 갔고, 그 틈을 타고 들어 뿌리에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신경 치료 후 크라운을 하거나 발치하고 임플란트를 하는 두 개의 옵션을 줬다. 만약에 금 간 것이 뿌리까지 이어졌다면 발치를 할 수밖에 없다며 임플란트를 권했다. 나는 먼저 신경 치료 후 크라운을 하는 방향으로 희망했다. 이에 덴티스트는 일단 아목시실린 500mg 짜리를 일주일치 처방해 줬다. 하루 세 번 항생제를 먹게 됐다. 이런 항생 물질이 내 몸의 소장해서 흡수되어 혈관을 타고 흐르다가 극히 일부분이 나의 어금니 쪽 염증 부분까지 도달하여 염증을 유발하는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파괴할 것이다.


정말로 신기하다.


아, 담낭 제거 수술을 마친 후 패밀리 닥터는 여러 가지 검사를 했었다. 의사는 담석증의 원인으로 고지혈증을 특정했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로수바스타틴 20mg을 처방해 줬다. 나는 매일 잠들기 전에 이 조그마한 알약을 삼킨다. 그러면 이 약은 내 간에서 LDL 콜레스테롤 합성을 방해한다. 결론적으로 혈액에 녹아있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급강하 한다.


생각할수록 신기방기하기 짝이 없다.


내가 여기서 참으로, 정말로, 생각할수록 신기하게 여기는 것들은 바로 그 하찮은 단위 때문이다. 0.5 그램, 0.02 그램의 눈곱만큼도 못 한 것들이 내 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소금이나 설탕을 치는데 보통 수십 그램 단위다. 소금이나 설탕을 0.5g이나 0.02g을 사용한다면 전체 요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런데 극소량의 이런 약물들은 냄비안의 내용물보다 수십 배의 용적을 가지고 있는 내 몸속에서 생사를 가를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경이로울 뿐이다.


비단 약물 뿐만이 아니다.


최근 저혈당 쇼크를 경험했다. 살을 뺀다고 24시간 이상 단식을 했는데 갑자기 오한이 들고 현기증이 나며 식은땀을 흘리면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갔다. 저혈당의 기준은 혈액 속의 포도당이 50mg/dl 이하일 경우를 말한다. 정상 혈당은 공복인 상태에서 60mg/dl 이상이다. 즉 혈액 1리터당 단 0.1g의 포도당 차이가 정상과 저혈당을 가른다. 당뇨병 환자가 저혈당 쇼크를 일으키면 곧장 실신에 빠져 목숨을 잃는 일까지 일어난다.


나는 저혈당 쇼크 속에서 겨우겨우 브라운 슈가가 든 오트밀 스프를 먹었는데 단 두 숟갈을 먹고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배터리를 0% 까지 모두 소모하여 전원이 꺼지기 직전이었는데, 단 두 스푼의 오트밀 죽으로 순식간에 70% 가까이 충전된 느낌이었다.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아이쿠,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내가 하도 예전에 담석증에 의한 고통으로 엄살을 부려서 아내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그 후의 경험으로 내가 단지 엄살꾼만은 아니다라는 걸 나타내고 싶었다. 그런데 예전에 쓰다가 중단한 삼체 시리즈 중 Sophon 에 대한 설명 도입부처럼 글의 내용이 변해가고 있다.


다시 통증으로 돌아가서!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치과 신경치료라는 것을 받았다. 첫 치과에서 2시간 동안 신경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나의 네 번째 신경을 못 찾았다. 의사는 무척 미안해하며 신경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다른 병원으로 나를 리퍼했다. 그래서 Endodontist 라는 스페셜리스트에게 또 다시 신경 치료를 받았다. 나는 이 과정을 두려움 없이 의연하게 받아 넘겼다.


비록 담석증에 의한 통증으로 병원 응급실에서 데굴데굴 굴렀었지만 최근의 치통과 대상포진 등의 경험으로 볼 때 내가 유독 통증에 과민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살아갈 날은 아직 많이 남았고 죽기 전에 경험할 고통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담석증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 수술을 기다리며 나는 코데인이라는 마약성 진통제를 먹었다. 두 알의 코데인을 삼키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사라진 경험이 있다. 닥터하우스라는 미국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은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바이코딘이라는 마약성 진통제를 사탕 먹듯 먹는다.


본격적인 통증 관리를 위해서 몰핀이라든가 펜타닐 등이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죽기 전에 고통스럽겠지만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경감 수단이 많이 있다.


괴로움 혹은 고통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게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겠지.


저혈당 쇼크였다. 죽을 뻔했다.


아내는 전생을 믿는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아내의 믿음을 존중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 아내와 살아온 경험으로 나는 아내의 전생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주아주 먼 옛날에 제다이 기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연방군 잔당과 제국군이 전쟁을 벌였다. 여러 태양계를 아우른 이 별들의 전쟁 시기에 아내는 우주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내는 두툼한 우주복이 나오는, 외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끔찍히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아내는 과거에 굶어 죽은 경험이 확실하게 있다. 왜냐하면 아내는 삼시세끼를 꼭 제시간에 챙겨 먹는 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내 끼니까지 철저히 챙긴다. 그래서 내가 살을 못 뺀다.


한국 여행 할 동안 모종의 이유로 아내와 여러 날 떨어져 지냈다. 아내와 함께라면 절대 할 수 없었던 단식을 실행할 훌륭한 기회였다. 하지만 전술했다시피 훌륭하게 실패했다. 친구들과 만나 먹고 마셔댔다. 또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맛집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캐나다로 돌아갈 무렵엔 오히려 살이 더 쪘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단식의 기회는 또 찾아왔다. 나는 몇 주 더 쉰 후 직장에 복귀 하기로 했고 아내와 아들은 바로 출퇴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챙겨 준 밥은 최대한 깨작깨작했고, 나 홀로 있을 때는 완전히 음식물 섭취를 중단했다.


어느 날 24시간 정도 공복 상태를 유지했다. 아내는 새벽같이 출근했고 아들도 늦잠을 자다가 9시가 넘어서야 직장으로 향했다. 나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으며 유튜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격하게 컨디션이 나빠졌다. 온몸의 기운이 빠졌다. 굶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추웠다. 한여름에 추위 때문에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손발이 저리고 차가워졌다. 눈 앞에 오른손을 들어 쳐다보니 가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현기증이 나고 식은땀이 솟았다. 너무 추워서 서모스텟을 조절하여 퍼나스를 켰다. 곧 벤트에서 더운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두터운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었다.


그 상태로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TV 속 유튜브를 뒤적거렸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힘이라도 내기 위해 뭔가를 먹기로 결정했다.


부엌의 팬트리를 뒤져 보니 즉석 퀘이커 오트밀이 눈에 띄었다. 포장지에는 Maple and brown sugar 라고 적혀 있었다. 커다란 머그컵에 내용물을 붓고 큐리그 커피 머신을 사용하여 뜨거운 물을 받았다. 다시 비틀거리며 소파로 돌아왔다.


스푼으로 머그컵 속의 내용물을 휘젓는 순간 달큰한 메이플 향이 올라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제하며 한 스푼 입에 넣었다. 달콤한 설탕 맛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스푼을 입에 넣었다. 갑자기 무더위가 확 느껴졌다. 현기증이 사라졌다. 손발 저림도 사라졌다. 내 몸에 대한 엄청난 불안이 갑자기 사라지고 100% 정상적인 상태로,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돌아왔다. 오리털 파카를 벗어 던지고 퍼나스를 꺼버렸다. 그리고 아직 한참 남은 오트밀을 말끔하게 비웠다.


매운 맛 진라면을 끓였다. 계란도 풀어 넣었다. 허겁지겁 라면을 조졌다. 이 라면이 참 맛있다. 조선시대에 라면을 가져갔다면 누구라도 인정하는 산해진미의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아마 왕이라 해도 삼시세끼 라면을 진상하라고 명령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맛있는 라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인터넷을 검색했다. 내가 경험한 것은 정확히 저혈당 쇼크였다. 어휴~ 죽을 뻔했다.


최근 몇 년간에 걸쳐 체중이 많이 늘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놈들이 내게 한 얘기도 ‘몸이 불었다’ 와 ‘머리숱이 줄었다’ 였다. 머리숱은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는데 체중은 노력한다면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소싯적에 담배를 한 순간에 끊은 적이 있다. 그래서 체중 조절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단기간에 체중을 줄이고자 결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단식일 터였다. 하지만 금연보다 체중 조절이 훨씬 더 어려운 것으로 판명됐다. 금연은 그저 참으면 되는데 단식은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제길, 단식에 의한 다이어트는 포기했다.


아내와 아들이 직장을 다니고 나는 집에서 논다. 집에서 놀면서 요리를 한다. 규동을 만들고 바베큐를 하며 치킨을 굽는다. 모두 훌륭한 맥주 안주다.


오~ 예! 체중은 더더욱 늘어만 간다.


처음으로 여름에 서울로 갔다

 “왜 이렇게 습하죠?”


비행기에서 내린 후 입국 심사를 위해 같이 걸어가던 아들 녀석의 말이었다. 나도 역시 뭔가 답답하고 습하면서 후덥지근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을 다녀왔다. 12년의 이민 생활 동안 한국을 자주 방문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돌이켜 보니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는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습하고 무더운 한국의 여름을 잊고 있었다. 청량하고 맑은 아침을 가진, 건조한 여름속의 캘거리에 익숙해져 버렸다. 한국의 고온다습한 기후는 약간 고역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온몸을 끈적끈적하게 하는 습기는 캘거리 여름의 청량한 아침을 그립게 만들었다.


아내는 김포공항 근처에 숙소를 예약했다. 일반 호텔이 아니라 주택가의 방 두 개짜리 신축 빌라를 빌렸다. 시내 중심부와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별로 불편하진 않았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지하철역이 있었고 지하철만 타면 서울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민 오기 전에는 대충 팔개 노선 정도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수인 분당선이니 김포 골드라인이니 서해선이니 하며 노선도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집 근처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서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민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제품들이 있었다. 밀키트라고 하는 것들인데 엄청나게 많은 종류를 자랑했다. 어떤 건 엉터리지만 메이저 브랜드에서 나온 약간 비싸 보이는 것들은 그럴듯한 맛을 내기도 했다. 더 이상 설렁탕, 갈비탕, 육개장 등등을 요리하지 않아도 된다. 밀키트를 냄비에 붓고 팔팔 끓이기만 하면 그냥 먹을만해진다. 점점 혼자 살기 최적화된 세상이 되어간다.


한국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다. 재활용으로 지정된 걸 함부로 쓰레기통에 넣었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분리수거를 할 때도 정확히 규칙을 지켜야만 한다. 컵라면을 먹고도 깨끗이 씻어서 재활용을 해야 한다. 삼다수 대형 생수병도 포장지 레이블을 제거한 후 압축하여 정해진 날짜에 지정된 장소에 놓아 두어야 한다. 음식물 쓰레기는 아무 때나 함부로 내놓을 수 없다. 계란 껍데기 마저 한국 웹사이트를 참고하여 음식물 쓰레기가 아닌 일반 쓰레기로 버리며 규제에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숙소로 묵은 빌라 입구에 쓰레기와 재활용에 대하여 하도 엄중하게 경고가 있어서 뭔가를 버릴 때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 후 처리했다. 스트레스!


아내는 장인 장모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며칠간 지방으로 내려갔다. 아들 녀석은 매일 점심쯤 나가서 밤 늦게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끝마치지 못하고 뒤늦게 캐나다로 끌려 왔지만, 역시 학장 시절의 친구가 오래 가는가 보다. 내게도 익숙한 아들의 친구 이름들이 들려왔다. 오늘은 이놈과 만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내일은 저놈과 만나서 이사를 도와준 후 저녁을 먹고, 모레는 그놈이 점장으로 있는 옷 가게에 들러 옷을 산단다. 십 몇 년 만에 한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친구들과 노느라 바쁘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아내가 없는 동안 나는 숙소에서 홀로 비상대기를 했다. 항상 끼니마다 밥 먹으라고 보채는 아내가 없고 아들은 밖으로만 도니 아주 훌륭한 기회였다. 나는 다이어트를 위해 단식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훌륭한 기회는 훌륭하게 실패했다. 아내가 돌아온 후 친구들을 만나면서 술과 요리에 푹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친구 녀석들은 여전했다. 작년 말 망년회 이후 다들 처음 만난단다. 나 때문에 내가 있는 동안 여러 번 만나서 놀았다. 소주잔이 돌고 맥주병이 난무하며 양주병을 따고 노래방에서 고함을 질러댔다. 씨바, 몸만 늙었지 다들 마음은 청춘이다.


아니, 사실이 아니다. 다들 폭삭 늙었다. 한 놈은 건강을 위해 하루에 삼만 오천보에서 사만보를 걸으며 뱃살을 쏙 뺐다. 또 한 놈은 당뇨병 진단을 받고서는 담배도 끊고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얼굴이 반쪽이 됐다. 투실투실 하던 놈들의 얼굴에 살이 빠지니 더 늙어 보였다. 나 또한 그럴 터이다.


사업하는 친구에게 “요즘 경기 어떠냐?” 물으니 “요즘 그런 거 물어보면 욕하는 거랑 똑같아, 새꺄!” 라고 쫑코를 먹었다.


캘거리는 새벽에 일어나서 일찍 잠이 든다. 서울은 아침 늦게 일어나서 밤 늦은 시간까지 잠에 들 생각을 안 한다. 숙소 근처의 새벽 거리에서 커피 파는 곳은 편의점 뿐이다. 그 무수하게 많은 커피숍들이 10시, 11시가 되어서나 문을 연다. 친구들과의 모임을 파하고 밤 11시가 넘어서 전철을 타고 숙소 근처로 돌아와 걸어가노라면 오전에 잠들어 있던 그 수많은 가게들이 불을 켜 놓고 불나방처럼 비틀거리는 나 같은 취객을 유혹한다.


약 한 달간의 방문을 마치고 캘거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0여 시간의 비행 후 캘거리에 도착했다. 집에서 시차 때문에 자다 말다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청량한 여름 아침이었다. 곧 고온 경보가 내려진 캘거리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낮은 습도 탓인지 한국에서보다 훨씬 쾌적했다.


무더운 열대지방으로의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