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음식에도 유행이 있다.
요즘은 중국식 간식인 탕후루가 한국에서 인기인 듯 하다. 그 전에는 마라탕이 유행해서 아내와 나도 1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마라탕이란 걸 먹어 본 적도 있다. 80년대부터 등장한 삼겹살도 변화를 거듭하여 대패니, 오겹이니, 통삼겹이니 하는 여러 분야가 발전하다가 몇 년 전엔 갑자기 이베리코라는 스페인 돼지의 삼겹살까지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베트남 쌀국수가 유행했고 현재는 좀 시들시들한 상태다.
베트남 쌀국수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70년대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수많은 보트 피플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정착한 곳마다 쌀국수집이 생겨났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영업하며 베트남계 사람들은 물론 현지인의 입맛도 사로잡아 버렸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 온 북한 사람들이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을 남한에 유행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쌀국수라는게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던 90년대에 쌀국수를 먹어 봤다. 호주 멜버른으로 출장을 갔는데 상대 회사 사람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고 멜버른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대접한게 쌀국수였다. 처음엔 무척 당혹스러웠다. 커다란 그릇에 철철 넘치도록 국물이 있었고 아직 벌건 고기점들이 얇게 썰려서 올려져 있었으며 처음 보는 잎사귀들이 둥둥 떠 있었다. 비록 강렬한 동남아스러운 향신료 냄새가 부담스러웠지만 국수와 국물은 먹을 만 했었다. 하지만 그 정체모를 잎사귀들, 아마도 민트와 타이 바질과 실란트로였을, 은 먹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쌀국수에 대한 첫 인상은 ‘내 돈 내고는 안 사 먹는다’ 였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요상하게 그 국물이 가끔 생각났다. 특히 술을 잔뜩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는 다음 날이면 그 쌀국수가 그리웠다. 하지만 그때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 쌀국수를 먹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베트남 쌀국수는 나와 인연이 없는 음식으로 점차 의식 속에서 멀어져 갔다.
2000년대 중반 무렵 삼성동 도심공항터미널 근처 사무실에서 일할 때 직원 한 명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소장님, 베트남 쌀국수 드셔 보셨어요? 길 건너에 새로 생겼는데 가 보실래요?’
그 직원 때문에 10 수년만에 쌀국수와 재회했다. 한국 시장에 현지화되어 그릇은 좀 작아졌고 국물은 약간 맹해졌으며 향신료 냄새도 약했지만 반가웠다.
‘이 까만 소스를 한 바퀴 두르고요, 빨간 건 세 바퀴 둘러요. 그리고 요 작은 종지에다가 까만 거랑 빨간 거 적당히 섞어서 고기를 찍어 먹는 거예요.’
직원은 신이 난 듯 내게 쌀국수 먹는 법을 알려 줬다. 그 이후 포메인이라든가 포호아 같은 베트남 쌀국수 체인점이 여러 곳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숙취에 시달릴 때면 쌀국수 집에 가서 까만 걸 한 바퀴, 빨간 걸 다섯 내지 여덟 바퀴 둘러서 얼큰하게 국물을 들이키며 해장하곤 했다.
뚱딴지 같은 인생의 궤적으로 우리 가족은 지금 현재 캐나다에 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국 골목 골목마다 중국집이 자리하듯이 베트남 쌀국수집이 많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외식거리가 쌀국수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하는 쌀국수 체인과는 달리 북미의 쌀국수집은 대부분 베트남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운영한다. 따라서 쌀국수의 만족도는 한국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한국에선 쌀국수에 따라 나오던 양파절임이나 깍둑썬 단무지가 없어서 좀 서운하기는 하다.
아내와 나의 행동 반경 안에 쌀국수집이 7개나 있다. 어떤 집은 터프한 국물을 자랑하고 어떤 집은 맑고 깔끔하다. 어떤 집은 육수 향이 진하고 어떤 집은 국물이 좀 달다. 여튼 아내와 장을 보러 나갔다가 내키는 집에 들어가서 가벼운 마음으로 쌀국수를 들이키고는 한다. 나는 그 국물이 땡겨서 자꾸 국물까지 먹고픈데 아내는 그만 좀 마시라고 타박한다. 사실 나트륨과 MSG 투성이일 테니 건강에 딱히 좋은 건 아닐 터이다.
아이고, 웬 잡소리가 이렇게 길었나 모르겠네. 여튼 외식하면 먹는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꽤 재밌다. 그래서 쌀국수도 집에서 한번 만들어 보고자 했다.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정착한 방법이다. 물론 완전 야매다. 하지만 베트남 쌀국수 식당에서 먹는 것과 99% 동일한 국물맛을 자랑한다.
중국계 T&T 슈퍼마켓을 잘 뒤져 보면 이런 걸 찾을 수 있다. 이거 업소용이다. 15불 미만으로 산 것 같은데 이거 한 통으로 20인분의 쌀국수 육수를 만들 수 있다. 통 안에는 육수 페이스트와 향신료 패킷이 들어 있다. 향신료 패킷은 두 개가 들어 있다. 따라서 가정에서는 한꺼번에 10인분씩 두 번 만들 수 있다.
원래 레시피는 고기 덩어리와 함께 끓이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뜨거운 고깃덩어리를 꺼내 써는 걸 상상하니 귀찮아진다. 그래서 이런 소고기 육수 큐브를 넣기로 했다.
큰 들통에 대파, 양파, 생강, 팔각, 통후추와 위 페이스트통의 내용물 절반과 육수 큐브 세 개를 넣었다. 팔각과 통후추는 집에 돌아다니기에 그냥 넣었다. 생략해도 된다. 그리고 물을 적당량 넣고 불에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양파 절임을 만든다. 양파 반 개를 최대한 얇게, 길게 썰고 락앤락 통에 넣는다. 그리고 적당량의 식초와 물과 설탕을 넣고 통을 밀폐한 후 쉐킷쉐킷 흔들어 준다. 나중에 양파절임과 함께 이 식초물을 쌀국수에 넣으면 라임 대용으로 쓸 수 있다.
물이 끓으면 간을 본다. 아마도 무지 짤 것이다. 적당히 간이 맞을 때 까지 계속 물을 추가한다. 그리고 끓고 나면 위와 같은 그럴듯한 비주얼이 나올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로 향신료 패킷을 투하하고 15분간 더 끓여 준다. 그리고 향신료 패킷과 나머지 양파, 후추 등을 모두 건져낸다. 이 단계에서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 찰 것이다. 베트남 쌀국수 식당 문을 열면 맡을 수 있는 바로 그 냄새다.
육수가 준비되는 동안 쌀국수도 불려 놓고 숙주, 타이 바질, 실란트로 등도 준비해 놓는다. 아시안 마트에서 파는 얇게 썬 샤브샤브용 소고기를 육수에 데친다.
그릇에 쌀국수, 야채, 양파절임, 고기를 넣고 육수를 부으면 이런 모습이다. 집안에 돌아다니는 호이신 소스와 스리라차 소스 - 까만것과 빨간것 - 를 취향대로 넣고 즐기면 된다.
남은 육수는 아내가 요리할 때 곧잘 사용한다. 순두부 할 때도 넣고, 또 올해 1월 1일 아내가 해 준 떡국에서는 이상하게도 국물에서 익숙한 동남아의 향기가 났었다. 아, 물론 아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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