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 검색

일본이 아니었다면 키작고 못생기고 가난한 내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동영상 : 일본의 버블시절을 상징하는 코카콜라 광고


일본이 거품경제의 최고 전성기에 있을 때, 그리고 거품이 폭삭 꺼질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평균 3개월에 한 번씩 일본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외국인 노동자로서 근무했다.

한일합작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신분의 한국인이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조차 두려워하던 존재였다. 일본 땅을 팔면 미국을 몽땅 몇 번 살 수 있다는둥 하는 말들이 돌고 실제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소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등 기세등등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일본엔 일감이 넘쳤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우리 같은 한국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정말 휘황찬란했다. 이제 막 국민소득 1만불을 넘네마네 하던 한국에서 일본에 간 우리 젊은이들은 일본의 넘쳐나는 풍요를 신기해 하기도 하고 부러워 하기도 했다. 한국인 직원들중 일부는 빠칭코 등 도박에 빠졌고 일부는 토요일, 일요일마다 모여서 볼링을 쳤다. 나는 볼링파였다. 우리들은 한국말로 떠들어대며 볼링장을 전세낸듯 주말마다 놀았다. 간혹 한국인끼리 모여 회식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간사가 되어 회비를 걷고 회식장소를 정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TV에서 가끔 조용필이나 이연자가 등장해 엔카를 불러 제꼈을 뿐이다. 심야시간에 여성의 알몸을 다 드러낸 성인 오락 방송은 그야말로 컬쳐 쇼크였다.

화무십일홍이다. 거품이 꺼지며 일본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일본에서도 이곳 저곳 출장을 다니고 있었다. 마지막 프로젝트가 일본의 지방경시청 일이었다. 개발이 끝나고 현장 설치를 하려니 경시청에서 외국인은 들어올 수 없다며 나의 출입을 막았다. 혼자서 본사 사무실에서 빈둥거리게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거품 붕괴와 더불어 출장 인원들도 줄어들고 점점 한산해 졌다. 일본 정부도 한국인에게 더 이상 3개월 장기 비자를 내 주지 않아서(무비자협정 이전이다) 나도 일주일 간격으로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게 되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지방경시청으로 출장 간 팀원들이 내가 담당한 부분을 적용할 때 뭔가 문제가 있으면 대응하기 위해 계속 일본 본사에서 빈둥거렸다.

여자 숙소는 더욱 비참하게 되어 대부분의 아파트가 공실이 되었다. 그런데 평소 볼링을 같이 치던, 엄청난 미모를 가진 여직원 한 분이 나처럼 일주일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얼굴만 이쁜게 아니라 꽤 능력도 있는 듯 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도 출장을 왔다갔다 하겠지. 그분은 일본 본사에 도착하여 다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모 발전소로 출근 하곤 했다. 그러니 나와 얼굴 볼 일도 별로 없었다.

어느날 오랜만에 일본 본사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왁자지껄 하던 한국인들이 모두 빠지고 갑자기 외로운 처지가 된 한국인 두 사람이 만났다.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모처럼 둘이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근 2년간 주말마다 볼링을 같이 쳤는데 단 둘이서 밥을 먹은건 처음이었다. 그녀와 난 차분히 이러저러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일로 돌아갔고 나 또한 사무실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한국에서는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감원을 단행했다. 분위기는 참담했다. 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의 한계도 느꼈던 바, 나는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내가 사표를 냈다는 소식은 빠르게 회사 사람들에게 전파됐고 예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사표 내셨다면서요? 신기하네! 나도 오늘 사표 냈는데…'

'어, 그래요? 어디 갈 데는 있어요?'

'아니요. 이제부터 찾아 봐야죠.'

이게 인연이 되어서 나는 그녀와 같이 갈 수 있는 회사를 찾게 되었다. 마침, 일본 합작 회사를 다니기 이전 회사의 이사님이 생각났다. 그분은 내가 사직할 때, 언제든 돌아온다면 받아주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 이사님께 연락해봤다. 이사님은 대표이사로 승진해 있었고 나의 복귀를 환영해 줬다. 이전 회사로 돌아갔다. 그녀도 나의 부하직원으로서 같이 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2년 후에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일본 거품경제의 흥망성쇠가 만들어 준 인연이었다.

일본의 버블이 꺼지지 않았다면 키작고 못생기고 가난한 내가 감히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난 일본이 약간 고맙기도 하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에 이르는 장기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인터넷엔 온갖 한국 뉴스와 연예인 뉴스가 흘러넘친다. 한국 드라마와 음악이 일본에 깊숙이 침투해 있고 기무치는 일본인의 기본 반찬이 됐다. 많은 일본의 10대들은 한국에서 K-POP스타가 되기를 열망한다. 실제 많은 수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일본의 이런 몰락이 가끔은 안타깝기도 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