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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먼저 열반에 드신 큰 선배님이시다. 불법에선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불교 수행자들은 부처님을 따라 열반에 드는 걸 목표로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선 고락이 윤회한다고 한다. 열반은 이 고락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한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 상태, 그게 열반이다. 부처님의 표정이 바로 열반의 미소다.


고란 괴로움이다. 락이란 즐거움 혹은 행복한 상태다. 즉 불교에선 행복한 상태 마저 좋은 것으로 보는게 아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건 타당하다.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르듯, 큰 즐거움에는 곧 큰 괴로움이 뒤따른다.


듣기 좋은 음악을 처음 들으면 즐겁다. 하지만 이 음악이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면 세상 듣기 싫은 소음이 된다.


맛있는 음식도 언젠간 질린다. 보자마자 침이 질질 흐르는, 마블링이 훌륭한 한우 스테이크도 하루 세끼씩 일주일만 먹게 되면 보자마자 구역질이 나온다.


술마시며 늦게까지 즐거운 밤을 보내면 다음 날 숙취 때문에 하루를 망치게 된다. 마약을 하며 강력한 쾌락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순간 중독되어 인생 자체를 망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되면 즐겁지만 어느날 그 사람과 이별할 때 큰 괴로움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즐겁지만 어느날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거나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다면 부모는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괴로움에 떨게 된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들은 모든 인연을 끊고 출가한다. 즉 고와 락의 원천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는 물론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출가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경구로 유명한 한국 선불교의 거승, 성철스님도 노모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출가했다. 성철스님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러 절에 찾아왔을 때 성철스님은 노모에게 돌팔매를 던지며 숲으로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부처님과 성철스님은 불교의 창시자 이시고 불교계에 큰 자취를 남기신 이름이기에, 부모 자식을 져버리고 출가한 것이 수행을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일컬어 지지만, 나같은 속세의 소인배가 같은 짓을 한다면 세상 책임감 없는 후레자식이 된다.


깨달으신 후 부처님이 고향에 방문하셨을 때, 부처님은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의 머리를 깎이고 출가를 시켜 버렸다. 또한 성철스님도 아기때 헤어졌던 딸이 성장하여 암자로 아버지를 보러 왔을 때, 즉시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를 만들어 버렸다. 깨달으시거나 불법의 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렇게 좋으신가 보다. 그런데 이렇게 다 출가를 해 버리면 소는 누가 키우나? 아마 나 같은 소인배의 몫이겠지!


여튼 불교에서 열반에 이루기 위한 첫 걸음으로 꼽는게 욕심을 버리는거다. 다른 말로 집착을 없애는 거다.


나는 축복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포기에 익숙했다. 즉 집착하지 않는다.


대학 신입생 시절, 통과의례와도 같은 미팅에 여러번 참석했다. 나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에, 가난뱅이에, 못생기고 땅달보다. 여러번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 여자와의 인연을 완전히 포기했다. 더 이상 파트너로 지정된 여성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는게 싫었다.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걸 각오했다. 여학우들과 후배들에게 데면데면 대했다.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자 쪽에서 먼저 나와 사귀기를 청해 오는 경우가 생겨났다. 심지어 두 여자가 나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다. 학창시절 남부럽지 않은 연애 생활을 보냈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오면 오고, 가면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점점 줄어 갔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에, 가난뱅이라는 현실이 여자분들이 다가오기에 주저 되었을 것이리라. 그런데 갑자기 꿈에서나 나올법한 여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가족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에게 시집왔다. 아직까지 그녀는 나와 한솥밥을 먹고 같은 이불을 덮는다. 어? 얘기가 왜 이리로 흘렀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나는 절대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나의 스탠스는 항상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달복달 하지 않는다. 그냥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절대 업무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남들보다는 화려하게 보냈다. 전반적으로 행복한 직장 생활을 했다. 뭐 지금은 트럭 운전을 하고 있지만… 캐나다까지 와서 트럭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집착을 버리라는 이 가르침은 놀랍게도 기독교에도 똑같이 있다. 바로 찬송가 구절,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 구절의 기원은 이렇다.


유럽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800만명 넘게 살육 잔치를 벌이던 때의 일이다. 한 목사가 있었다. 그가 외출했을 때 카톨릭 교도들이 들이닥쳐 그의 집을 불태우고 두 아들을 죽였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가 불에 타 무너진 집과 참혹하게 시신으로 변한 두 아들을 보고 기도했다. 그 기도의 첫 구절이 바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다.


기원이야 어떠하든 이 구절은 찬송가로 불리며 기독교 전반의 설교와 기도의 주요 주제가 됐다.


절대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빌지 않는다. 사업의 성공을, 취업을, 시험 합격을 간절히 빌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하고 다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다. 그러면 불교의 '집착을 탁 놔 버려라.' 와 일맥상통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간절히 원하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더더욱 괴로움에 빠지고 만다. 간절히 원하던게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위에 밝혔다시피 더 큰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뭔가 큰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큰 기대조차도 욕심이고 집착이다. 큰 기대를 가지고 원하는 직장을 구했다 해도 기대와 부합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될 수 있고, 동료나 상사와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기대와 현실이 어긋나서 어렵게 구한 직장을 곧 그만두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집착을 버리면 원하던 직장을 구하지 못해도 괴로움이 없다. 직장을 얻었어도 기대를 하지 않으므로,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보다 훨씬 편안하고 원활하게 직장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간절히 원하지 않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괴로움이 없다. 마치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영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집착을 버리고 그냥 그 장소를 떠나면 그만이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집착을 탁 놔 버려라' 혹은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인생 모토는 지금껏 훌륭하게 작동했다. 집착을 버림으로써 언제나 편안했다. 일종의 고락을 벗어난 행복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런 얘기를 얼굴 뻣뻣이 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역린! 용의 온몸에 덮인 비늘 중 딱 하나 거꾸로 달린 비늘! 용의 유일한 급소! 누구라도 역린을 건드리면 죽는다. 아무리 유순한 용이라도 누군가 역린을 건드리면 미쳐 발광하며 세상 끝까지 쫓아가 그자를 죽인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내가 내 역린이였을 줄이야!


최근 올린 글에 어떤 분이 댓글로 내게 일침을 주셨다. 그걸 계기로 내 내면을 돌아봤다. 내 안에서 역린이 건들여져버려 화가 난 흑염룡이 아직 꿈틀대고 있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 중이다.


올 겨울 처음 ***에 왔을 때, 대통령 선거 후에 난장판이 된 게시판을 둘러보고,


'여기 사람들은 서로 싸우려고 글 쓰네? 왜 이렇게 서로의 화를 돋우려고 하는 글들을 쓰지?'


라고 생각했다. 역린이 더럽혀진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글들을 쓰고 있다. 완전히 흑화 되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예전의 유순했던 나를 되찾기 위해 ***을 떠나야 될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무거워 졌다. 밝게 끝내야지.


요 몇 년간 불교 쪽 자료들을 들척거리며 어리숙한 보살 흉내를 냈었는데 최근 내 수준을 스스로 깨우친 바가 있다. 최근의 사태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절대로 아내를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향한 내 집착은 확고하다. 나는 절대 열반에는 이루지 못할듯 하다. 아니, 열반은 커녕, 보살행의 발끝에도 못미친다.


이 행복의 끝에 어떤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두렵기도 하다만 지금은 그저 아내와 함께, 부처님은 잠시 잊어 버리고, 그저 두 마리 무소의 뿔처럼, 아내와 손잡고 둘이서 가야지. 히히…


그런데 이 글의 주제가 도대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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