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트럭스탑에서 샤워를 하는데 치약이 다 떨어졌다. 힘을 주어 마지막 남은 걸 꽉 짜서 이를 닦았다. 완전히 비워진 치약 껍데기가 처량하다.
생명이 다한 치약통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사람으로 치면 죽은 것이다. 나도 조만간 저 껍데기 신세가 되겠지. 난 이제 한 3분의 1 정도 남은 치약이다. 나도 저 볼품없는 껍데기처럼 점점 짜여지면서 추하게 변해갈 것이다. 서글프다.
점점 줄어드는 머리숱과 흰머리를 못 견디겠는지 아내는 한 달마다 나를 붙잡고 강제로 염색을 해 준다. 점점 늙어 가는 내 얼굴이 보기 싫은지 세수만 하고 나오면 강제로 자기 옆에 앉히고는 로션을 처덕처덕 발라 주고 마스크팩을 해 준다. 다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어떻게 해도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
외모가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생명을 다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건전지가 그렇다. 마침 그저께 써모스탯 에서 건전지 교체 표시가 나서 바꿔 끼웠다. 3년 넘은 시간 동안 소모된 건전지가 새로 바꿔 끼는 것들과 외관상 차이가 없다. 다 쓴 것과 새것을 헷갈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정도다. 사람도 건전지처럼 아름답게 수명을 다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적으로 조물주의 작품이, 특히 인간에 대한 결과물들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죽음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것 조차가 너무 싫다.
처음 지구상에 생명이 등장하고 수십억 년간은 단세포 생물의 시대였다. 이들은 세포 분열을 통해 번식했다. 그저 환경이 허락하는 한 생명은 계속 분열해 나갈 뿐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엔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수명이라는게 딱히 정의되지 못한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세포 생물이 출현했다. 그리고 섹스가 발명되었다. 성의 목적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획득하기 위함이다. 다양한 유전자는 진화의 키인 돌연변이를 통해 환경 변화에 적응하여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함이다. 긴긴 진화의 역사 속에서 유전자의 다양성 확보는 엄청나게 유리한 것으로 증명되어 왔다.
그래서 암수가 만나 섹스를 한다. 다시 한번, 섹스의 목적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섹스를 하는 생명체는 죽어야 한다. 어느 정도 후손을 만든 암수는 더 이상 유전자 다양성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세포 생물의 죽음은 섹스의 댓가다.
다 짜여진 치약 껍데기를 보고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다. 주책바가지다. 아마도 요즘 끄적거리는 '결혼 출산 육아' 시리즈 때문이리라.
샤워를 마치고 면도를 한 후 애프터 쉐이브로션을 발랐다. 로션 병을 보니 얘도 죽을락 말락 한다. 그래도 얘는 내용물은 점점 비워져도 겉모습은 젊을 때 그대로네! 건전지처럼은 못돼더라도 최소한 로션 병처럼 죽어가면 좋으련만…
에잇! 죽은 것은 쓰레기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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