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소니에서 나온 이북 리더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미 단종된지 오래된 물건입니다. 이게 전자잉크라는 디스플레이를 쓰고 있어서 사용시간도 길고 사전도 내장되어 있고 결정적으로 눈이 참 편안해서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이걸 쓰고 있습니다. 특히나 부피가 작고 가벼워서 화장실에 갈 땐 항상 가지고 갑니다. 물론 이 분야의 강자는 아마존의 킨들이라는 제품입니다만 현재 쓰고 있는 것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여행 중에도 항상 소지하였는데요, 그만 이번 여름 여행 중에 온타리오의 바다 같이 넓은 Lake Superio 변의 PUKASKAWA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틀림없이 화장실에선 들고 나왔는데 그 후 샤워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놓고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사실을 빨리 알아챘다면 되돌아갈 것이었겠지만 이미 그곳에서 동쪽으로 500Km 이상 떠나온 참이었기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숙소를 정하고 긴긴 밤을 보내는데 읽을거리가 없으니 아쉽더군요. 그래서 킨들이라도 살까 하고 스테이플스나 베스트바이를 들렀습니다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후에 포기하고 결국 오랜만에 종이책을 한 권 샀습니다.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라는 제목이고 국제적인 베스트셀러라는군요.
아직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요, 개인적으로 참 재미진 책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 사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흥미진진하게 설명하는데 정말 매혹적이고 저로 하여금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네요. 읽는 즐거움을 이렇게 느끼는건 참 오랜만입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게 막 아깝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며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20만년 전에 동아프리카에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즉 우리들은 아프리카에서 나와서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때 이미 먼저 아프리카를 떠난 인간종들이 세계 각지를 선점하고 있었답니다. 유럽의 추운 지역에서 이미 네안데르탈인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지금의 인도네시아 부근엔 호모 에렉투스가 이미 백만년 이상 살고 있었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들과 가끔 사냥터나 채집터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며 살았는데요, 오랜 시간 공존했다고 합니다. 서로의 능력치에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죠. 사피엔스처럼 네안데르탈과 에렉투스도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이용했으며 소규모 무리생활을 했죠.
7만년 전쯤에 사피엔스의 두뇌에 돌연변이가 발생합니다. 갑자기 어떤 개체군에서 추상적인 상상을 하는 능력이 생겼고 이런 돌연변이는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답니다. 이 후에 사피엔스는 개별적인 신체 능력으론 절대 당해낼 수 없었던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습니다. 또한 백오십만년간 살아오던 생존의 천재 호모 에렉투스를 고고학속의 존재로 추방시킵니다(호모 사피엔스는 등장한지 겨우 20만년입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같은 종류의 먹이를 채집하고 사냥하던 경쟁자를 말살해 버렸습니다. 지구에 등장한지 13~14 만년이 걸린 성취입니다. 마치 아프리카 사자 무리가 같은 먹이를 놓고 경쟁하는 같은 고양이과 동물인 치타나 표범을 멸종시킨 것과 같은 것이죠.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갑자기 같은 호모속을 멸종에 이르게 한 능력을 얻은 과정을 인식 혁명 – Cognitive Revolution – 이라고 칭합니다. 구체적으로 이게 뭐냐 하면 상상력입니다. 이 즈음부터 인간은 벽화를 그리고 머리는 사자, 몸은 인간인, 세상엔 존재할 수 없는 조각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력, 즉 거짓을 만들고 믿는 능력에 의해서 같은 호모종을 멸종시킬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겁니다.
침팬지 등의 무리생활을 하는 유인원의 규모는 150 개체 이상을 넘을 수 없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아무런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고 인간의 단순 친목 모임도 이와 같습니다. 유인원의 무리는 서로 잘 알고 있는 개체로만 이뤄집니다. 이 무리에 낯선 개체들이 등장하면 두 무리 사이엔 호전적인 적의가 등장하여 싸움이 일어나거나 약한 무리가 다른 곳으로 피해 버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력 혹은 추상적인 것들을 떠올리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 추상적인 목표를 위해 돌진하는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오늘 처음 만나는 다른 개체들을 동료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 소규모의 네안데르탈 무리나 호모 에렉투스 무리를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인식 혁명 이후에 인간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냥 단순한 대화가 아닌 가십을 즐기게 되었다고 하네요.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가십을 즐기는 동물입니다. 외과의사간에 혹은 명문대 물리학과 교수간의 심포지움 자리에서도 주로 들리는 대화는 수술 이야기나 최근의 끈 이론에 대한게 아니라 그냥 잡담이랍니다. 상상력과 대화를 통해 공통된 신화나 우화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화가 현대 인류 문명의 시작점이라는군요.
제 상상력을 가미하면 이렇습니다.
- 얘들아, 예전에 아주 용맹한 곰이 있었는데, 그 곰이 굴속에서 마늘만 먹고 오래오래 살았는데, 천지신명이 그 곰을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우리 엄마의 엄마의 엄마였어.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곰족이란다. 자 이걸 잊지 말고 우리 곰족의 표식으로 우리 콧볼에 이렇게 뼈다귀를 끼워놓도록 하자.
이제 오늘 처음 보는 놈이라도 코에 뼈다귀가 끼워져 있다면 같은 곰족이 됩니다.
- 얘들아, 우리 곰족은 말야, 사냥하거나 싸울 때 맨 처음 돌진하다가 죽으면 사실 죽은게 아냐. 우리 곰엄마가 평생 먹을 것을 주고 27명의 미인들에게 둘러싸여서 평생을 살 수 있는 거야. 자 오늘 저 네안데르탈놈들을 치기 위해서 5개 곰족 무리가 모였는데 어느 무리가 맨 처음에 설거냐?
이제 조직을 위해 헌신하고 죽음을 하찮게 여기게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습니다.
원숭이에게 – 너 지금 가지고 있는 바나나를 내게 주면 나중에(네가 죽은 후에) 1000개의 바나나를 줄게 – 라는 제안을 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원숭이는 절대 응낙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식혁명 이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런 불확실한 내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호모종 친척들을 멸종시킨 것이죠. 나쁜 호모 사피엔스들 같으니라구…
----------------------------
3주 간의 캐나다 동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PUKASKAWA 국립공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혹시나 잃어버렸던 이북 리더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공원은 이미 비수기 모드로 접어들어서 비지터센터도 문을 닫았고 공원 입장 키오스크도 무인 시스템으로 변했더군요. 물어볼데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결국 그 리더기는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
며칠 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넉 달 이상 장기여행을 위한 짐들이 차 속에 꽉 차 있었는데요, 그걸 정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짐 구석에서 잃어버렸던 이북 리더가 아내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어떤 절대자가 저로 하여금 본문에 소개해드린 책과 인연을 맺어주려고 그 이북 리더를 차 속에 숨겼을 것입니다. 암요, 저는 호모 사피엔스인걸요. 이게 단순한 헤프닝일 수는 없는 겁니다. 제가 그 때 얼마나 샅샅이 리더를 찾기 위해 뒤졌었는데요, 내가 그 때 못찾았을리가 없지, 내가 그렇게 멍청할리가 없지. 뭔가가 있는게 틀림 없어.
2016.9.27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