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해! 너무 편하단 말이지.’
언젠가 아내가 불쑥 말했다. 뭔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해서 물어봤다.
‘뭐가?’
‘사는게 너무 편해. 아마 이번 생은 쉬어가는 삶인가봐.’
하드코어 무신론자인 나와는 달리 아내는 종교가 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유래한 윤회관을 바탕으로 한다. 아내가 처녀일 때 부터 인도 사상가와 종교가의 책이 아내의 서가에 가득 있었다. 따라서 아내의 이런 윤회관은 뿌리가 깊다. 아내는 다음 생에서도 또다시 나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고는 한다.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 왔고 지금도 함께 인생을 즐기고 있다. 20대 때 결혼해서 서른살이 되기 전에 두 아이의 부모가 됐다. 그리고 결혼하고 막 30년이 됐지만 아내는 여전히 나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최소한 나와 같이 사는 아내가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듯 하여 기분이 좋다.
이런 행복한 삶은 아내와 나의 취향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내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만났다면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나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애저녁에 이혼당하고 중년 독거남으로 외로이 살았을 수도 있다. 우리 둘이 맺어진 건 참 커다란 행운이다.
결혼 전 살았던 집은 서울 중심가에 있었기에 친구들이 자주 찾아왔다. 친구중 한놈은 영화시간이 한참 남았다고 자기 여자친구와 함께 우리집에 오고는 했다. 키가 크고 얼굴이 반반한 그놈은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었다. 그리고 그 녀석은 그 빈민가의 우리집 화장실을 사용하려다가 비명을 질러대는 자기 여자친구를 보며 낄낄거렸다. 나쁜놈. (세이노의 가르침 4, 5편 참조)
처음 아내를 그 집에 데려왔을 때, 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화장실을 아주 편안하게 사용했다. 그런 형태의 화장실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나중에 아내의 대학 학창시절 앨범을 보고나서 의문이 풀렸다. 아내는 여름방학마다 농활을 했다. 낯모르는 남학생들과 아내는 삽을 들고 밀짚모자를 쓰고 몸빼바지를 입고 목에는 수건을 두른 채 밭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야학을 열었다. 그렇게 농활을 하며 촌구석 화장실을 써왔을 테니 빈민가 우리집 그 화장실이 아내에겐 전혀 충격적인게 아니었을 터였다.
아름다운 용모와는 달리 아내는 수더분한 성격이다. 스스로 옷을 고르지 못해서 장모가 사준 옷만 입었다. 나와 연애를 할 때부터 아내는 더 이상 하이힐을 신지 못했다.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면 내가 아내를 올려다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아내도 성격이 뭔가 현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둘 다 재테크에는 아주 꽝이다.
다니던 회사의 지분을 팔고 목돈을 쥔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살 만한 돈이었다. 아내는 아파트에 사는 걸 끔찍히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 외곽 산 초입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그 집은 숲속에 폭 파묻혀 있었다. 우리는 그 집을 아주 좋아했다. 그 집 옥상에서 자주 바베큐 파티를 했으며 밤에는 주로 텐트를 치고 잤다. 텐트 방충망 사이로 별들을 바라보며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고 아침에는 산새들의 지저귐속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모친과 함께 텃밭을 크게 지었다. 텔레비전 아침 방송 프로그램이 우리집과 텃밭을 취재해 방송을 타기도 했다. 모친과 아내의 인터뷰를 따갔는데 정작 방송에선 아내만 나왔다. 아내의 그림이 괜찮았는지 그 후 몇번 아내에게 방송 출연 제의가 왔다. 아내는 자세한 내용을 듣기도 전에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
우리가 그 집에 투자한 돈 액수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 돈을 거기에 그렇게 태웠다고?’ 하며 우리를 한심해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집에서 무척 행복했다.
우리는 빚지는 걸 싫어한다. 남들이 할부로 비싼 차를 사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일시불로 싼 중고차를 사서 몰았다. 캐나다에서도 집을, 자의반 타의반, 일시불로 샀다.
캐나다로 이사 와서 국민연금을 정산한 것과 산속의 그 집을 판 돈을 몇 년 동안 그냥 은행 세이빙 계좌에 넣어 놨다. 당시 이율은 1%도 안 되었을 때였다. 은행 일을 볼 때마다 텔러는 잔액을 보고 놀라며 다른 투자를 권유하고는 했다. 나는 귀찮다고, 싫다고 했다.
집을 살 때 집값의 한 1/4 정도 모기지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모기지 브로커가 가져오는 조건이 영 시원찮았다. 그래서 그냥 일시불로 사기로 했다. 브로커가 아내에게 전화해서 모기지 이외에 다른 투자 상품도 많으니 나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저희 남편은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귀찮아해서 아마 안 할 거예요. 그래도 전해 볼게요.’ 하고 전화를 끊었단다.
아내는 명품 브랜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아내의 지인들이 들고온 샤넬백이나 구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자기는 이런 거 하나도 모르지?’ 하며 아내를 아예 끼워 주지도 않는단다. 아내가 애용하는 백은 집안에 돌아다니는 두꺼운 천을 사용하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자주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과학관, 박물관, 동물원 등등을 자주 갔다. 해마다 번갈아서 롯데월드 혹은 서울대공원 연간 회원권을 끊고 언제든 마음 내키면 놀러가고는 했다. 그런 곳에 놀러 갈 땐 항상 전철을 타고 움직였다. 사실 그땐 차를 굴릴 여유도 없었고 운전면허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애들이 성장하며 더 이상 우리들과 놀아 주지 않자 둘이 놀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여행을 많이 했다. 지리산 종주도 여러 번 했다. 여러 명산을 아내와 같이 올랐다. 산에 올라가 비박을 즐겼다.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단 둘이서 새벽의 절경을 즐겼다. 전국 각지에서 캠핑을 했다.
한국에 갑자기 캠핑 붐이 불었다. 캠핑장엔 스노우 피크니, 콜맨이니 하는 외국산 시스템 텐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3인용 코딱지만한 전문 등반용 텐트를 사용했다. 그들이 낑낑거리며 1시간 넘게 텐트를 설치할 때 우리는 단 10분 만에 텐트를 펴고 접을 수 있었다. 미니멀리즘이 우리의 캠핑 스타일이다.
캐나다에 이사와서도 여행을 많이 했다. 히말라야와 인도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많은 추억을 쌓았다. 알버타와 브리티시 콜롬비아에 있는 국립공원 구석구석에서 캠핑을 했다. 북미대륙을 아내와 같이 누볐다. 여정 중에 타이어가 다 닳아서 교체했고 엔진오일도 여러 번 갈아가며 여행을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만지고 느꼈다. 아내와 함께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때를 돌아보면 추억이 방울방울 주위를 맴돈다.
물론 나도 지금까지 놀고만 지낸 건 아니다. 일이 무척 바빠서 서울역의 노숙자가 부러워 보여 아내에게 ‘노숙자가 되고 싶다’ 고 징징거린 적도 있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는 6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출퇴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삶은 일할 때가 아니고 놀 때 충만했다.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 참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도 인생을 꽤 즐기고 있다. 아내가 피아노도 더 못 배웠고 노래도 못 하고 춤도 못추지만 아내는 행복하다. 나 또한 부자가 아니지만 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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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삶의 형태는 세이노가 보기엔 참으로 한심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세이노는 인생의 모든 시간을 바쳐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펑펑 놀면서 지냈다.
세이노는 끊임없이 공부하여 경제 지식을 갖춰 목돈을 만든 후 투자하여야 부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놀기 바빠서 재테크에 신경도 안 썼다. 소싯적에 주식 투자를 약간 한 적이 있었는데 놀 때도 주가가 신경 쓰이는게 짜증이 나서 곧 때려치웠다.
세이노는 이 세상을 돈을 둘러싼 전쟁터로 본다. 사람은 오직 승리자와 패배자만 있다. 그가 볼 때 우리는 패배자일 터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 속에 살고 있지 않다. 어쩌다 이 지구별에 태어났으니 마음껏 구경하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재밌게 놀다가 죽자는게 나의 삶에 대한 태도다.
세이노가 보면 황당한 일일 테지만 이렇게 우리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세이노의 입장에서는 기함을 할 일이겠지만 차를 굴릴 여유가 없던 시절에도 전철을 타고 아이들과 놀러 다녔다. 수중에 돈이 없다고 손목을 두 번 그어 자살을 시도한 세이노와 같은 부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이노는 일과 가정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이노의 말처럼 많은 영화에서 일벌레들이 결국은 가정 소홀로 이혼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이노는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는 가정의 유지도 일처럼 했다.
세이노는 가족이 가장 큰 고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고객을 상대하듯 자기 가족을 상대했다. 아직 부자가 아닐 때, 그는 아내를 대동하고 훌쩍 고속버스를 타고 오색약수에 가서 택시를 대절한 후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서 단풍 구경을 했다. 그리고 같은 택시를 다시 타고 바로 내려와서 곧장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단다. 왜? 시간이 아까워서!
그런데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접대를 받은 세이노 부인은 기뻤을까? 고객 접대를 위해 설악산까지 간 세이노에게 단풍은 과연 어떻게 비쳤을까?
세이노는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갈 때 길에서 버릴 시간이 아까워서 헬리콥터를 대절하여 갔다고 한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그도 재미있었을까? 아마도 두고 온 일로 머리는 꽉 차 있었을 것이고 어서 빨리 아내 고객님과 자녀 고객님들이 만족하여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만을 바랬을 것 같다.
세이노의 아내는 행복했을까? 어느 날 ‘늘어나는 건 돈밖에 없다’ 라고 세이노에게 푸념했단다. 그다지 고객만족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여튼 이런저런 낌새 때문에 세이노는 2000년대 무렵부터 사업을 줄였다고 한다. 그가 현재 70대이니 대략 40 후반 혹은 50대에 드디어 일을 줄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나이 때까지 일만 한 그가 과연 다른 일로 인생을 즐길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하긴 그 이후에도 자기에게 걸리적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새끼, 소새끼, 18년 하며 욕하고 다녔으니 그다지 여유롭고 온화한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돈의 전쟁터에서 한발 물러선 그는 아직도 전쟁 PTSD 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느닷없이 언어 폭력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가 하루빨리 회복되길 바란다.
+++
‘뭔가 불안하단 말이지.’
며칠 전 아내가 불쑥 말했다.
‘뭐가?’ 내가 물었다.
‘아무 걱정이 없어서 불안해.’
별 실없는 소리도 다 있다, 라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오직 지나간 날들처럼, 그리고 오늘처럼, 남아있는 날들도 아내와 함께 즐거운 추억을 계속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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