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모친은 나를 홀로 키웠으며 나는 아주 행복하고 다이나믹한 유년기를 보냈다.
내 최초의 기억은 이불이 깔린 좁은 방과 밖에서 잠겨버린 방문이다. 용변은 방안의 요강에서 해결했다. 모친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동안 방안에 혼자 갇혀서 엎치락뒤치락하며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방 한켠에는 작은 소반에 밥과 반찬이 있었는데 혼자 식은밥을 맨손으로 퍼먹고는 했다.
내가 의사표시를 어느정도 할 시기가 되자 모친은 방문을 더이상 잠그지 않았다. 일을 나간 모친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동네를 휩쓸고 돌아다녔다.
가끔은 모친이 일하는 곳 근처에서 놀기도 했다. 그당시 모친의 직업은 삯빨래였다. 여기저기 가정집이나 업소에서 빨래를 받아와 개울가에서 빨고 다시 가져다 주는게 우리집의 밥벌이였다.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모친은 삯빨래를 했으며 나는 그 근처에서 썰매를 타며 놀았다. 주변 조무래기들은 아무도 나를 건들 수 없었다. 나의 모친이 바로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이 그렇게나 자랑스러울수가 없었다.
빨래를 가져다 줄때 모친과 동행할 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빨래의 원 주인이 은근슬쩍 나에게 지전을 찔러줄 때가 많았다. 나는 그 돈으로 구멍가게에서 아이스케키나 라면땅 등을 사먹었다. 그럴 때마다 동네 꼬꼬마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모두 나를 둘러싸고 '한입만, 한입만!' 을 외쳐댔다.
동네를 관통하는 큰 시내는 모든 꼬마들의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멱을 감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탔다. 봄에는 올챙이를 잡았고 가을에는 개구리를 쫓아다녔다.
개울가는 내다버린 온갖 쓰레기들이 산을 이뤘다. 이 쓰레기 산은 우리들의 보물창고였다. 성냥 몇개라도 발견하게 되면 바로 불장난을 시작하고는 했다. 도대체가 심심할 새가 없는 유년기였다.
물론 항상 재미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몇몇 동갑내기 꼬맹이들이 점차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도 같이 다니고 싶었다. 애들의 그 샛노란 유치원복과 가방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주인집 꼬마와 딱따구리나 뽀빠이 만화영화를 넋놓고 보고 있다가 주인집 가족이 밥먹는다고 쫒겨나올땐 좀 서럽기도 했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모친에게 유치원에 보내달라거나 TV를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포기하는게 점점 익숙해져 갔다.
언제까지나 삯빨래만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모친은 나를 친조부모댁에 위탁하고 서울로 갔다.
친조부모댁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충청북도 산골짜기였다. 나는 10리 이상 산길을 걸어 국민학교를 다녔다. 산과 숲이 다시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봄에는 진달래와 아카시아꽃을 따먹으며 다녔다. 여름에는 칡뿌리를 캐 씹으며 다녔다. 간혹 도라지꽃이 보이면 집으로 캐갔다. 그러면 할머니가 도라지 초무침을 해주시곤 했다. 가을에는 주인 없는 밤나무 밑에서 밤을 주워 생밤을 우적우적 씹으며 다녔다. 겨울엔 눈위에 남겨진 산토끼 발자국을 쫓아 산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사냥에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역시나 재밌고 익사이팅한 시절이었다.
할머니가 앓아 누우시고 나서 모친은 나를 서울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모친과 나의 단칸방 생활이 시작됐다.
서울 빈민가의 골목골목이 다시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숨바꼭질과 다방구를 하며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좀 아랫동네 큰 길가로 내려가 자전거를 빌려 타기도 했다.
유년기를 벗어나 중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를 가는 길에는 커다란 이층 양옥 주택단지를 지나야 했다. 이런 집들의 담장은 높았고 사람들이 출입하는걸 보는게 힘들었다. 나는 그런 집들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날 참 이상한 광경을 봤다.
검은색 커다란 승용차가 큰 저택 앞에서 서더니 중년의 운전사가 헐레벌떡 뛰쳐나와 뒷좌석 문을 여는 것이었다. 뒷좌석에는 운전사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 그저 앉아만 있다가 운전사가 문을 열어준 후에야 느릿느릿 밖으로 나왔다. 그는 커다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운전사는 그의 등짝에 대고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아무 생각이 안났다. 왜냐하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뭔가 비현실적이었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 같았다. 그들은 마치 연극배우들처럼 보였으며 나와 인연이 얽힐 경우는 전혀 없으리라 생각됐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집에서 아는 얼굴이 나왔다. 이상하게 나와 마음이 잘 안맞던 같은 반 급우였다. 그때 좀 쇼크를 먹은 것 같다. 이런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살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깨닫게 되었다.
이 때 처음 내가 아는 부자를 목격한 때이다. 그동안 항상 같은 환경의 친구와 사람들만 보다가 처음 부잣집 아이를 보게 되어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 단지 신기할 뿐이었다. 딱히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부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난 포기하는게 빠르니까. 그는 그냥 어린시절 내가 다닐 수 없었던 유치원을 다니는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부자 아버지, 대저택, 유복한 환경 등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난 그저 나와 같은 수준의 주위 사람들과 안락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누릴 뿐이었다.
모친의 등골을 뽑아먹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운이 좋아서 직업상 해외여행을 많이 했다. 일본은 제집 드나들 듯 했으며 싱가폴, 미국, 호주, 중국 등등을 돌아다녔다. 항상 산동네 초입 다 쓰러져가는 코딱지만한 집에서부터 수트케이스를 끌고 공항에 갔다.
나는 비행기 타는게 참 좋았다. 친절한 멋쟁이 승무원들이 자리를 안내해주고 황송하게도 식사와 음료까지 갖다 준다. 그리고 다양한 최신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나의 보딩 패스는 항상 이코노미 클래스였다. 우연한 기회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탑승한 적이 두 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이였을뿐 기본적으로는 항상 3등칸이다.
보딩을 기다리다 보면 항상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를 먼저 호출한다. 나는 그들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안했다. 왜냐하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중학교 통학길에 있던 그 커다란 저택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같이 여행을 많이 했다. 한국에서 괌으로, 네팔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태국으로, 베트남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캐나다로, 많은 비행을 했다. 가끔 LA나 라스베가스로 비행기를 타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전에 볼리비아 여행을 위해 황열병 주사를 맞았는데 10년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 남미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물론 좌석은 항상 이코노미다. 비즈니스니 퍼스트 클래스는 우리의 세계가 아니다. 꿈도 안꾼다. 그런 비싼 자리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관심도 없다. 그 자리는 그저 내가 갈 수 없었던 유치원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이 비루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다.
모친과 나는 끔찍히 가난했다. 세이노보다 훨씬 가난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유년시절이 찬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모친 또한 항상 웃으면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아내가 모친에게 홀딱 반해버릴 정도였으니까…
아내와 나는 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예약하며, 공항으로 가며, 보딩을 기다리며 그저 행복할 뿐이다.
그런데 세이노가 우리의 행복을 부정한다.
세이노는 그 자신이 의사이자 봉급의 여러명을 수하에 둔 개인병원 원장을 아버지로 두었다. 그가 중학생일때 그의 부친이 사기를 당하고 집안이 몰락 했단다. 갑자기 가난해진 세이노는 자살하기 위해 손목을 두 번 그었다.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난 그는 피보다 진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의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 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크게 성공했다.
목표를 달성한 세이노는 뒤에 남겨진 가난한 사람들을 능욕하기 시작한다. 나와, 나의 모친과,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다. 그리고 세이노는 이들을 멸시하고 없애야할 사회의 병균쯤으로 간주하는듯 하다. 우리의 가난이 형편없는 무지와 나태함 때문이라고 책 전반에 걸쳐 고래고래 악을 써대고 있다.
세이노는 이코노미클래스 승객들을 경제전쟁의 패잔병쯤으로 간주하는듯 하다. 세이노는 일등석 승객이 경제신문이나 경제주간지를 읽는데 반해 돈도 없는 3등석 승객은 흥미위주의 스포츠신문, 연예주간지나 보고 있다며 흉본다. 그 중에는 신문도 안보고 자리에 앉자마자 영화목록이나 찾고 있는 더더욱 한심한 사람도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멀쩡히 3등칸에서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영문없이 욕먹은 기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 탔는데 갑자기 루저라고 흉본다.
세이노는 이 세상이 유혈이 낭자한, 돈을 둘러싼 전쟁 상황이라고 한다. 사방에 포탄이 터지고 비명이 난무하는 와중인데 3등석 승객들은 무사태평하다고 일갈한다.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단다.
확실히 세이노는 돈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전쟁속에 살고 있지 않다. 비록 세이노의 입장에서 보기에 나는 한심한 가난뱅이지만, 나 나름대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왔고 현재도 꽤 즐기고 있다.
해변에서 모히또 한잔하며 선탠하고 있는데 갑자기 군복입고 총칼들고 들이닥쳐 전쟁터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 늙은 운전사와 뒷자석 젊은 남자가 벌이던 이상한 연극, 연장자가 젊은 사람에게 절하던 그 부조리극을 보는 느낌이다.
휴~ 세이노가 지옥같은 전쟁통속에 사는데 나는 그저 맘편히 아내와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으니, 이거야 원, 도대체 부자가 될 방도가 없네!
걸리적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 에미 보지구멍이니, 18년들이니 쌍욕을 해대는 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2편 참조). 그저 치열한 전쟁통속에 살아가는 세이노같은 부자들의 무운을 빌 뿐이다.
(계속)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