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모친을 보러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분중에 일수 아줌마가 계셨다. 모친이 집을 사기 전에 이 일수 아줌마의 집에서 셋방 살이를 했었다. 이분은 모친을 너무 좋아해서 거의 매일 저녁 놀러오다시피 했다. 모친이 쉬는 날에는 점심 전에 와서는 점심을 우리 집에서 먹고 낮잠까지 자고는 저녁 바로 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거나 집수리 때문에 목돈이 필요할 때 모친은 곧잘 그분에게 일수돈을 빌려 썼다. 2~3일 단위로 약정된 금액을 갚을 때마다 모친과 그분은 머리를 맞대고 일수 수첩에 도장을 찍고는 했다. 하도 자주 봐서 나도 그 아줌마와 격의가 없어졌다.
어느날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집을 가기 위해 시장골목을 지나가는데 그 일수 아줌마가 악귀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어떤 가게를 뒤집어 엎고 있었다.
'빨리 내돈 내놔, ㅆ년아!'
모친과 항상 살갑게 대화하던 그 아줌마가 그렇게 변하다니, 어린 나에겐 상당한 쇼크였다.
모친은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끔 낙찰계도 했는데 계주가 바로 그 일수 아줌마였다. 당시엔 낙찰계 계주가 돈을 횡령하고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 해서 9시 뉴스에 곧잘 피해자들의 사연이 방송을 타고는 했다. 나는 시장에서 본 그 아줌마의 모습이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모친에게 낙찰계를 그만 두는 것이 어떤가 말해 봤다.
'그래도 사람인데 믿고 해야지! 사람을 못믿으면 아무것도 못해.'
이 날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생의 가르침을 모친에게서 배웠다. 바로 '사람을 믿는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이런게 있다.
'사람을 어떻게 믿냐?'
그럼 나는 이렇게 대꾸 해주곤 한다.
'너는 사람을 안 믿고 뭘 믿니?'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시크교도 청년이
'나는 사람을 절대 안 믿어!'
이러기에
'그럼 넌 뭘 믿는 거니? 도대체 너네 종교에서 가르치는게 뭐야?'
이러면서 시건방을 떤 적도 있는데, 쩝, 후회된다.
하여튼 모친의 그 가르침으로 나는 처음 본 상대도 믿으려고 노력한다. 비록 작은 거래에서 속았다 하더라도
'에이, 그양반 오늘 나 때문에 땡잡았네. 그러면 됐다!'
하고 넘어간다. 나의 이런 성향 때문에 한동안 아내는
'내가 바보랑 결혼한 건가?'
하고 나를 의심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꽤 장점이 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어떤지 이리저리 재보고 하는 스트레스가 없다. 속아서 약간 손해를 봤다 해도 모친의 가르침인 '네가 항상 손해 보고 살아라' 와 부합하기에 문제가 없다. 상대에게 신뢰를 주기 때문에 상대방은 나에게 호의를 보낸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물론 이런 믿음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본 적도 있다. 사기를 당해서 큰 재산을 잃고 결국 캐나다까지 흘러들어와 외노자로 살아가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게 됐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다. 아내와 오래된 중고차에 몸을 싣고 북미 대륙을 몇 달간 돌아다니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사기 사건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거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고? 믿는다!
어차피 사람을 속이려 들면 누구든 속는다. 세이노의 가르침 책에도 있다시피 검사조차 사기를 당한다. 세이노의 의사 아버지도 사기를 당해서 망했다. 요즘도 가수 임창정을 비롯한 주가조작 사기에 걸린 사람들 - 모두 부자이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 이 한국 뉴스에 잔뜩 나오고 있다. 안 속겠다고 모두를 불신하고 주의를 바짝 기울여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봤자 결국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당한다. 그럴 바엔 앗싸리 처음부터 '믿어 버리자' 라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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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세이노는 일본어가 아니고 영어다. Say no 다. 모든 것에 대해서 '아니' 라고 말하라는 의미란다. 여기에는 당신이 믿고 있는 모든 것, 보편적인 상식 등등이 포함된다. 필명 부터가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다.
그래서 세이노는 책에서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구성원들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직원을 안 믿고, 기자를 안 믿고, 물론 신문 기사도 안 믿고, 변호사도 안 믿고, 의사도 안 믿고, 공무원도 안 믿는다. 모든 종류의 '전문가' 자체를 안 믿는다.
물론 세이노가 강력하게 믿으라고 하는 것도 있다. 책 전반에 걸쳐서 '나를 믿어라', '나의 말을 믿어라' 라는 말이 숱하게 나온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세이예스(Say yes)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길이요 진리다.
세이노의 세상에 대한 이런 불신은 필연적으로 그를 만물박사로 만들었다. 그는 벽지를 새로 바를 때도 인테리어 업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벽지와 풀과 기타부자재의 가격과 인부의 품삯을 다 따로 계산하여 견적을 뽑는다. 벽지를 할 때 그 자신이 인테리어 업체 사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는 매사가 그런 식이다.
새로 공장을 지어야 하는데 전문가들을 믿기 어려우므로 그 자신이 수개월간 공부했다. 용달차 세대분의 자료와 관련 과거 월간지들을 모아들여 공부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그 자신이 전문가가 되어 공장설비 설치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변호사를 불신함으로 그 자신이 변호사에 준하는, 아니 혹은 더 뛰어난 법률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책에 보면 여러가지 소송의 승리 사례가 즐비하다.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는 의사도 불신한다. 자기가 병에 걸리면 자신이 그 병의 전문가가 된다. 그리고 의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폄하하면서 스스로 병을 치료한다. 놀라울 뿐이다.
세이노는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도 그렇게 하라고 주장한다. 인부들의 집수리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권한다. 공사판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유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고쳐야 한단다. 그게 돈을 버는 길이라고 한다. 향후 사업 하게 될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금' 이라는 격언은 부자에게만 해당한다. 어차피 가난뱅이인 당신은 시간 밖에 없지 않은가. 세이노를 믿어라!
잠깐!
여기서 욱 했다. 나는 가난뱅이지만 내 시간이 소중하다. 돈 없어도 놀고 즐기며 행복을 만끽할 거리는 산처럼 넘친다.
또한 시간은 사실상 가난뱅이에게 더욱 부족하다. 부자가 기사 딸린 자가용 뒷자석에서 자기 시간을 활용하며 이동할 때, 가난뱅이들은 만원버스와 전철에서 꼼짝없이 자기 시간을 죽여야 한다. 부자가 가사도우미를 고용하여 가사노동에서 해방될 때, 가난뱅이는 절대 누릴 수 없는 여유 시간을 만끽하게 된다. 부자가 노동에서 해방되어 레저를 즐길 때, 가난뱅이는 목에 풀칠을 하기 위해 자기 시간을 태워 푼돈을 벌어야 한다.
누가 감히 '시간은 금' 이라는 말이 부자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누가 감히 가난뱅이에게는 시간 밖에 없다고 말하는가.
가난뱅이에게 시간은 부자보다도 더 희귀하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부자가 되고 싶다면 모든 것에 No 라고 말하며 아무도 믿지 말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된다. 나에겐 무리다. 그냥 지금처럼 맘 편한 가난뱅이로 살 수 밖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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