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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노의 가르침 8) 퍼스트클래스의 땅콩!



일본으로 짧은 출장을 갔다가 올 때의 일이다.

1박 2일 일정이라서 손가방에 속옷과 서류 정도만 챙긴 간소한 출장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 출장 결과에 골몰하면서 보딩 패스를 끊기 위해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묘령의 여직원이 내가 내민 티켓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머리를 들어 사인을 보니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를 위한 창구였다. '어머 미안!' 하고 사과하며 긴 줄이 형성된 이코노미 클래스 창구에 줄섰다.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니 아까 그 여직원이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서로 어색한 웃음을 주고 받은 후 그녀에게서 보딩 패스를 받아 들었다.


출국 심사 후에 면세점을 지나쳐 보딩 대기 장소에 도착했다. 보딩 패스를 보니, 어라? 비즈니스 클래스 패스였다. '아이쿠, 이거 뭔가 크게 잘못됐구나!' 생각하며 보딩 입구에 서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마침 내게 보딩 패스를 끊어준 그 여직원이 무전기를 들고 그곳에 서 있었다.


'아노, 데스네, 뭔가 착오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저는 이코노미 클래스인데 비즈니스 클래스 패스를 주셨어요.'

'하이, 소-데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만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이쿠, 마음에 안들기는요. 혼마니 도모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네!'


이런 행운이 있나. 나는 널찍하고 편안한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웰컴 드링크를 마시며 진짜 도자기 식기에서 맛있는 기내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남들보다 빠르게 보딩을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진짜 유리로 된 잔으로 서빙된 음료를 즐기고 있는데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이 내 자리를 지나 뒤쪽 자리로 줄줄이 지나갔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과의 불평등은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나 노골적이라니, 새삼 자본주의의 잔인성을 깨닫게 됐다.


솔직히 비행 내내 편하지 않았다.


나는 과도한 친절을 싫어한다. 고깃집에서 종업원이 고기를 구울 때 뭐라도 거들어야 될 것 같고 식당에서 이모님이 서빙할 때 나도 반찬 옮기는 걸 돕고는 한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젊은 여직원이 무릎 꿇듯 쪼그리고 앉아 테이블 밑에서 올려다 보며 주문받는 걸 극혐한다(요즘도 그러나?). 해서 항상 3등칸에 익숙하던 놈이 비즈니스 클래스에 적응을 못 했던 듯 싶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아마 내가 어릴 때 갑질을 한번 부린적이 있는데 대실패로 끝나고 모친께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매질을 당한 후 트라우마가 생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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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초창기 문간방 세입자 중에 같은 또래가 있었다. 그 애도 편모 슬하에 할머니와 같이 세식구가 살고 있었다. 같은 국민학교 꼬맹이들이니 손쉽게 친해졌다.


하지만 애들이 항상 사이가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어느날 문간방에서 그 애와 같이 놀고 있다가 갑자기 뭔가로 투닥투닥 다투게 되었고 그 애가 나에게


'씨~ 너랑 안 놀아. 너 나가!'


했다. 약이 바짝 오른 나는 차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 우리집이야. 니가 나가!'


구석에서 홀로 화투패를 띄고 있던 그 애의 할머니 손이 딱 멈췄다. 어린 마음에도 큰 실수를 해 버린 걸 깨닫고서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애를 버려 두고 방을 나왔다.


며칠 후 이 일은 모친의 귀에도 들어가고 나는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너 왜 그랬어, 엉?'

'훌쩍 걔가 먼저, 훌쩍…'

'그게 아니고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네가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그런건 이제 필요없어. 니가 제일 나빠!'


이런 식으로 혼나고 또 두들겨 맞았다.


모친은 평소에도 '애비없는 후레자식' 소리 안 나오도록 처신을 잘 하라고 내게 당부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모친이 내게 하는 잔소리가 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해 주셨지만 골자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다.


'세상에 너보다 못난 사람 없다.'

'위만 보면 너는 항상 가난뱅이다. 아래를 보면 네가 제일 부자다.'

'꿈을 꿀 때만 위를 봐라. 삶을 살아갈 때는 오로지 밑을 보아라. 현실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항상 윗사람처럼 대해라.'

'세상에 40억명의 인간이 있으면 40억개의 인생이 있는거다. 그러니 남들 따라하려고 애쓰지 말고 간섭하지도 말아라.'


모친의 이런 밥상머리 교육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삶의 결과로 볼 때 썩 나쁘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병적으로 타인에게 반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 됐다.

나는 지금껏 꽤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에게 쌍욕을 하거나 욕을 얻어 먹은 경험이 없다.


아, 생각해보니 내가 남에게 욕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그 대상은 삼성그룹의 이재용이다.


어느 날 업체를 방문하기 위해서 어떤 빌딩에 들어갔는데 양복 차림의 떡대들이 나를 제지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이재용이 수행원들과 같이 내 앞을 지나갔다.


'신발새끼. 지까짓게 뭐라고…'


나는 내 스스로가 상당히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는데 또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반항적이다. 특히 누군가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갑질을 하는 걸 극히 싫어한다. 내 피에 빨갱이 기질이 좀 흐르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 내가 일정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가 총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위의 밝혔지만, 갑질을 못 하게 됐다. 부록으로 갑질하는 자들을 혐오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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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노는 스스로 갑질에 뛰어나다고 자평하고 있다. 직원들에 대한 갑질은 물론 타인에 대한 갑질 능력 또한 탁월하다. 심지어 공공기관에게도 갑질을 시도한다.


그는 매월 많은 돈을 의료보험으로 내고 있는데 그에 대한 혜택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한다. 의료비 할인도 없고 그가 병원에 갔다 왔을 때 공단에서 위로 문자 하나 없다고 불만이 대단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편법을 동원하여 의료보험료를 절반 이하로 스스로 깎아 버렸다고 자랑한다.


세이노는 비행기를 탈 때 주로 퍼스트클래스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받아야 할 서비스의 명확한 표준이 있다. 그의 신경은 그가 받는 모든 서비스가 완벽하고 철저한지 감시하고 평가하기 위해 바짝 곤두선다.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사무장에게 따로 인사를 받는가 보다(부담스러워라). 그냥 건성건성 인사하는 사무장을 못마땅해 한다. 그가 다리를 풀기 위해서 일어나 서성거리면 승무원은 뭔가 대나무 지압대를 가져와 제공해야 하는가 보다. 승무원이 빤히 바라만 보고 있으면 그는 속으로 '나 같으면 잘라 버린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그냥 요청하면 안 되나?).


이 외에도 그는 커피를 따르는 방법, 라면을 끓여다 주는 방식 등등에 집착한다. 그는 명시적으로 일등석 손님은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표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승무원들은 그의 하인과 다름없다.


그는 만족스러웠던 일등석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먼저 탑승하면서 탑 언니가 자기 휘하의 승무원들을 엄청나게 꾸중하는 걸 목격했다. 그걸 보고 그는 만족스러웠다. 탑 언니가 지랄을 할수록 승무원들의 서비스가 빠릿빠릿 하기 때문이다. 평소 그의 지론과 일치한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 어떻게 파악했는지 모르겠다만 - 사비를 들여 생화를 사와서 장식되어 있었단다. 엄청난 부자이지만 승무원들이 자기 돈을 써서 꽃을 사와 일등석 승객을 기쁘게 하면 그도 매우 흡족한가 보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의 주역 조현아 부사장을 두둔한다. 물론 비행기를 회항시킨것은 잘못이지만 조현아의 승무원들에 대한 갑질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귀족이신 일등석 손님이 땅콩 껍질을 손에 들고 있게 만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현아의 개지랄은 그녀의 지위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세이노는 모든 일등석 승객들은 자신처럼 서비스에 민감하고 갑질에 능하다고 한다. 글쎄,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상상이 안간다만, 여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참 피곤하게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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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키 땅콩 회항 사건 중 -


2007년 이후에는 봉지를 들고 가서 보여주고 취식 여부를 물어본 뒤 먹겠다고 하면 까서 접시에 담아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승무원은 이 지침을 완벽하게 준수했다. 공식 매뉴얼에 나온다. 대한항공 사내 커뮤니티에서는 승무원의 대응이 제대로 된 대응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 대한항공이 제작한 홍보 영상에 마카다미아를 봉지에 담은 채 주는 모습이 나와 있다.


결국 서비스는 전혀 잘못되지 않았는데, 부사장이 퍼스트 클래스 서비스 지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엉터리 질책을 한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서비스 지침을 다시 전자로 바꾸는 것은 부사장의 권한이므로 가능하겠지만, 탑승시점에서 승무원은 지극히 정상적인 서비스를 했는데, 이를 질책했다는 것이다. 즉, 임원이라는 사람이 자기 회사 규정도 몰랐던 것.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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